<93화>
루인이 가장 먼저 목소리 그룹의 유적을 찾아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무인과는 달라서 절대로 자신의 마도를 독점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충돌하는 가치를 통해 긴 세월 동안 마법을 진화해 왔다.
각국의 마탑이 연구한 사례를 마법학회에서 공유하고 논쟁하는 것은 바로 그런 유구한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더구나 아카데미를 직접 창립했던 마도사 슈레이터라면 그런 마법사의 본질적인 성향에 더욱 가까운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루인은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샅샅이 살펴봐도 이 유적 동굴에는 그의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끝내 그가 완성하지 못한 마도.
후배 마법사들에게 남겼을 만한 그런 단서나 화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 하나쯤은 남아 있을 거라 예상했건만.
그렇게 동굴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루인을 향해 시론이 외쳤다.
“아무것도 없다. 그만 포기해라.”
분명 자신의 팀에 도움이 될 만한 뭔가가 존재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다니.
‘이래서였나.’
‘열망하며 은둔하는 목소리’ 그룹이 어째서 마법학부에서 완벽하게 버려졌는지 이제야 루인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실망한 표정의 루인이 동굴 밖으로 향할 때였다.
“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루이즈.
그런 그녀가 동굴의 벽면을 쓰다듬으며 점점 깊숙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루이즈……?”
조심스럽게 루이즈를 불러 보는 루인.
하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달라 보였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표정.
그때, 루이즈의 손길에 닿은 동굴의 벽면에서 미세한 마력이 번져 가고 있었다.
잔류 마나?
마력의 잔향?
그 정도가 아니었다.
마나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지극히 미약한 힘.
루인의 초월적인 감각으로도 극도로 집중해야 겨우 느낄 수 있는.
그 정도로 미세한 마나가 그녀의 손끝에서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루인이 그런 루이즈에게 다가갔다.
“루이즈. 뭘 느끼고 있는 거지?”
루이즈는 배시시 웃으며 루인을 향해 입을 오물거렸다.
“목소리……? 목소리가 들린다고?”
끄덕끄덕.
열기 가득한 눈빛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루이즈.
시론과 다프네가 다가와서 당황스러운 속내를 드러냈다.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음성 마법의 흔적은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아요.”
여전히 웃고 있던 루이즈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동굴의 깊숙한 곳을 가리켰다.
“함께 살펴보자.”
루인이 루이즈의 시선을 좇으며 말하자 시론이 당황해했다.
“너무 깊은데? 그리고 시간도 늦었다. 곧 기숙사의 출입 제한 시간이다.”
“루이즈가 뭔가를 느꼈다면 살펴볼 가치가 있다.”
루인의 단호한 대답에 생도들은 어쩔 수 없이 루이즈를 따라나섰다.
행정 요원에게 배운 대로 앞 사람의 어깨를 잡으며 10분쯤 구불구불한 동굴을 나아갔을 때.
“응? 길이 끊어졌네요?”
다프네가 발광 마법으로 연신 이리저리 비추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길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때 루이즈가 어느 한 벽면에 서서 두 손을 밀착시키고 있었다.
우우우웅-
그것은 마력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미지의 숨결.
마치 동굴의 벽면과 대화를 하는 듯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
그러다 루이즈는 루인을 쳐다보며 다급한 표정으로 방방 뛰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뛰고 있는 루이즈를 향해 루인이 물었다.
“그곳을 부숴 달라는 거지?”
루이즈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융합 마력을 일으켜 혈주투계를 운용한 루인이 그대로 루이즈가 살펴보고 있던 벽면을 후려쳤다.
콰쾅!
“뭐 하는 짓이야!”
“아악!”
이런 좁은 동굴을 함부로 부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행위.
생도들은 천장에서 떨어지고 있는 돌 부스러기들을 다급히 피하며 불안한 시선으로 붕괴를 걱정하고 있었다.
“…….”
한데.
평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루인이 놀란 얼굴로 얼어붙어 있었다.
어느새 붕괴된 벽면을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는 루이즈.
자욱한 먼지를 풍계 마법으로 걷어 낸 다프네가 발광 마법을 벽면에 비춘 그때였다.
“어?”
그것은 작은 방.
한데 방의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먼지가 잦아들며 기다란 형체가 점차 드러난다.
얼음처럼 투명한 보주(寶珠)를 감싸고 있는 고풍스러운 양식의 나무 지팡이.
비로소 루인은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이곳은 바로 적요하는 마법사, 무시무시한 침묵의 심판자 루이즈를 탄생시킨 곳.
무수한 악제의 군단을 소멸시킨.
저 무시무시한 마법 지팡이의 태초(太初)를 바라보고 있자니.
루인은 마치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루이즈의 이명에 적요(寂寥)라는 특이한 단어를 새기게 만든 전설적인 아티펙트.
사방 수백 미터의 언령을 봉쇄한 채, 오직 자신만이 마법사로 군림하는 오롯한 전능력.
그런 ‘진노하는 침묵의 영언자’가 마도사 슈레이터가 탄생시킨 위대한 아티펙트였다니.
“이, 이건!”
경악한 다프네가 즉시 아공간을 열어 리퀴르 측정기를 꺼냈다.
그러나 이내 당황하고 마는 다프네.
“제로 리퀴르?”
“마력 보주에 마력이 없다고?”
한데.
우우우우웅-
루이즈가 웃으며 손에 들자 지팡이의 보주가 반응하기 시작한다.
순간 리퀴르 측정기의 게이지가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부근까지 치솟는다.
“9천 리퀴르예요!”
“뭐?”
적요하는 마법사, 루이즈의 손에서 천 년 전의 마도(魔道)가 피어난다.
천 년 동안 은둔한 채 후인을 만나기만을 열망했던 한 마도사의 목소리가 세상을 휘감고 있었다.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마력의 파장.
너무나도 독특한 그 숨결에 다프네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영멸했다고 여겨졌던 마도사 슈레이터의 마도는 그만큼 형이상학적이었으며 또 강렬했다.
그렇게 루이즈는 눈을 감은 채로 천 년 전의 마도사와 대화하고 있었다.
루인은 지금 그녀의 심상이 결코 깨어져선 안 된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깨달았다.
“다들 물러서. 우린 바깥에서 기다린다.”
“아, 알겠어요.”
“알았다.”
이 에어라인에 악제의 군단장들을 압도했던 위대한 초인의 둥지가 있었을 줄이야.
검성(劒聖).
성녀(聖女).
바람의 대행자.
적요하는 마법사.
.
.
인간 진영의 초인들 중 악제의 군단장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이 바로 루이즈였다.
대군단전에서만큼은 독보적인 장악력을 지녔던 천재 마도사.
다수를 상대하는 전장에서는 오히려 대마도사 루인보다도 더욱 효율적인 마도(魔道)를 구사하던 그녀였다.
인간 진영이 구축했던 전략의 핵심.
그런 루이즈의 위상과 영향력을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을 반드시 지켜 내야만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줄어들지가 않아요.”
리퀴르 측정기의 게이지는 미동도 없이 9천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마력 방출이 몇 시간째 유지되는 현상을 다프네는 경험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다프네는 입탑 마법사로 살아온 모든 세월보다 루인을 만난 짧은 기간 동안 받은 충격이 더 컸다.
루이즈가 엄청난 동조 감응의 보유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단숨에 자신의 경지까지 근접해 오리라곤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것이다.
츠츠츠츠츠-
루이즈로부터 흘러나오는 마력의 파장을 살피던 시론이 경악의 얼굴로 굳어졌다.
“저 녀석…… 벌써 네 번째 고리를 추가하고 있다!”
세베론이 허탈한 듯 자조했다.
“말이 돼? 이게?”
마나에 대한 폭넓은 이해도.
끊임없는 이미지를 통한 감각의 향상 등.
이렇듯 마법사가 고리를 추가한다는 것은 깨달음을 통한 마도의 점진적인 완성을 뜻했다.
이렇게 몇 시간 만에 줄넘기를 넘듯이 연속적으로 경지를 돌파한다는 것은, 마법이라는 학문의 정체성이 무시되는 현상.
그런 루이즈의 압도적인 재능에 생도들은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와…… 이건 다프네 양보다 더 심하네요.”
“이대로라면 단숨에 5위계를 돌파할지도.”
입탑 마법사인 다프네의 실력만 해도 세상의 상식으로 설명할 수가 없는데 저런 저세상급 재능이라니.
마치 혼자만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듯한 경이로운 광경.
그때.
“끄, 끝났다!”
드디어 루이즈가 뿜어내던 마력이 씻은 듯이 잦아들자 시론이 벌떡 일어나며 그녀를 살피기 시작했다.
<모두들 기다려 줘서 고마워.>
생도들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울려 오는 루이즈의 목소리.
리리아의 두 눈이 더 이상 뜰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저…… 절대언령……?”
어브렐가의 전설 속.
침묵의 마법사 ‘드리미트’의 절대언령이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고마워. 고마워 다들.>
익숙한 그 언령에 루인이 여느 때보다 활짝 웃었다.
“어차피 네 인연이었다, 루이즈.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분의 오랜 이야기를 들었어. 그분의 마법을 배웠고, 그분이 남긴 마력을 모두 전해 받았어.>
“마력?”
<그분이 남긴 마력은 이 동굴 전체를 감싸고 있었어. 그리고 이 지팡이. 이게 바로 그분의 마력을 모을 수 있는 매개였거든.>
“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도 않았지만 애써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루이즈의 동조 감응 능력은 범인이 이해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지금 몇 위계나 되었지?”
<그분의 지혜가 너무 방대하고 어려워서 안타깝게도 5위계에서 그쳤어.>
단숨에 다프네급 실력자로 올라선 주제에 아쉬운 듯이 말하다니!
약이 바짝 오른 시론과 세베론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친. 무슨 전설의 마녀냐?”
“한 대 때려도 돼?”
그때 리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도사 슈레이터 님의 마법을 보여 줄 수 있나?”
“맞아! 나도 보고 싶어!”
루이즈는 한 차례 싱긋 웃어 보이더니 손에 든 지팡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나직한 공명음이 일어나며 사방으로 잔잔한 마력이 방출됐다.
우우우웅-
수인으로 술식을 맺은 것도, 염동력으로 마력회로를 그린 것도 아니었다.
한데.
“……!”
“……!”
기이한 감각을 느낀 생도들이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경악한 표정의 시론.
비명을 지르듯 크게 고함을 질러 대는 입 모양.
“……!”
하지만 역시 동굴 내부는 극도로 고요하기만 했다.
절대언령으로 펼치는 대규모 언령 봉쇄 마법 앱솔루트 사일런트(Absolut Silent).
동굴을 통째로 감싸 버린 그런 지독한 적요(寂寥)에 루인이 나직이 감탄을 터뜨렸다.
“역시 대단하군. 어지간한 마법사들은 죄다 마법이 봉쇄당하겠어.”
깜짝 놀라며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는 루이즈.
<넌 어떻게 말할 수 있어?>
“하하.”
미안.
같은 초인이라지만 이쪽은 대마도사 출신이라서.
“오직 시전자의 의지와 심상으로 발현되는 마법. 그래서 절대언령 마법에는 술식이 존재하지 않지.”
씨익.
<그러므로 루이즈. 같은 절대언령을 구사할 수 있는 마법사를 조심해야 한다. 특히 정신력에서 밀린다면 역으로 네 심상이 붕괴될 수도 있다.>
<윽!>
루이즈가 머리를 감싸며 비틀거렸다.
극한의 염동력으로 맺어진 루인의 심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유유히 휘젓고 있었기 때문.
루이즈의 얼굴이 지독한 두려움으로 얼룩졌을 때 루인이 염동력을 회수하며 담담히 말했다.
“그게 네 약점이다, 루이즈. 어떤 상황에서도 강력한 정신 방벽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네 평생의 고민이 될 거야.”
생도들이 루인과 루이즈를 미친놈 쳐다보듯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