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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92화 (92/187)

<92화>

커다란 짐을 등에 멘 시론이 아카데미의 전경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와…… 이 한 블록이 전부 아카데미라고?”

에어라인은 총 10개의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세 번째 블록인 C블록 전체가 아카데미인 듯 보였다.

공업구, 상업구, 주거구, 왕궁부, 귀족부, 군단부 등.

왕궁 전체를 축소한 듯한 이 에어라인에서 한 블록 전체를 아카데미로 활용한다는 것.

그만큼 르마델 왕국이 아카데미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뜻일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비행선.

건물들 사이를 쉴 새 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부유 계단.

날씨에 따라 열고 닫을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는 각종 개폐 시스템.

사방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마력 등불까지.

최신 마공학의 첨단이 듬뿍 담긴 아카데미의 전경은 지상의 아카데미와는 비교가 무의미한 수준이었다.

멀리 휘날리고 있는 아카데미의 깃발을 바라보며 슈리에는 가슴이 벅찼다.

그것은 이런 엄청난 왕립 아카데미의 정식 등급 생도가 된 자부심.

하지만 그런 그녀의 환상은 금방 깨어지고 말았다.

-아악! 살려 줘!

아카데미 쪽에서 희미하게 들려온 비명.

시선을 주고받던 루인 일행이 곧장 정문을 지키고 있는 행정 요원에게 명찰을 내보이더니 아카데미에 진입했다.

이내 생도들의 시선이 향한 곳.

“대, 대체 뭐 하는 짓이지?”

“허…….”

그곳에는 붉은 견장의 생도들, 즉 마법학부 생도들이 일렬로 늘어져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곳은 거대한 배기 시스템의 환풍구였는데 한두 걸음만 더 가면 온몸이 분쇄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장소였다.

벌벌 떨고 있는 마법 생도들.

쪼그려 앉은 채로 연신 낄낄거리고 있는 기사 생도들.

주변에 많은 생도들이 바쁜 걸음으로 지나고 있었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눈만 힐끔거릴 뿐.

그럼 이게 흔한 일상이라는 건데…….

“이건 좀 심하네요.”

눈살을 찌푸리는 다프네.

아무리 기사의 나라라지만 아카데미 시절부터 이런 노골적인 권력이라니.

“아니 마법학부에도 생도 서열의 상위 랭커들이 있잖아? 저런 짓을 왜 내버려 두는 거지?”

“이명을 지닌 상위 랭커가 기사학부에 더 많은 것이 문제겠죠. 그리고 애초에 후원의 질적 차이도 무시하지 못할 테고요.”

진득이 입술을 깨무는 시론.

렌시아가의 후원이 왕실의 그것보다 훨씬 영향력 있게 작용하는 것이 현실.

앞으로 이런 미친 곳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생도들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러나 루인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

“기숙사로 가기 전에 에덴티아 선배가 말했던 그룹 유적을 먼저 살펴보는 게 좋겠군.”

그룹 유적.

그것은 원래 지상의 아카데미에 있었던 옛 유적들이었다.

그 유적들을 통째로 공간 이동시키기 위해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 몇몇이 마력 폭주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졌다.

“그룹 유적이라…….”

왕립 아카데미를 창립한 초대 학장, 마도사 슈레이터에겐 세 명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다.

원소마법사, 불새의 란데오.

소환술사, 유리하는 환영 듀스란.

그리고 마도사 슈레이터의 제자들 중 가장 강력한 마법을 구사했던 진멸의 천공(天空) 루카소.

현재, 마법학부의 그룹은 이들의 가르침에서 파생된 세 개의 유파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었다.

“저기…… 저건 누가 봐도 불새의 둥지네.”

경이로움으로 물든 세베론의 눈빛.

거대한 타원형의 붉은 원반이 블록 타일에 깊숙이 박혀 있는 그야말로 기이한 형태의 건물.

과연 불새의 둥지라더니 한눈에 봐도 그룹의 연원을 알 수 있는 건물이었다.

“저건 환영의 등나무 탑일 테고.”

거대한 등나무.

사람의 몸통보다 더 굵은 가지에 매달린 자그마한 방들.

마치 새하얀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세계수와 같은 모습. 그곳은 환영의 등나무 탑이었다.

“천공(天空)은 역시 찾을 수 없나?”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는 시론이었지만 마법학부의 다른 그룹 유적은 찾을 수 없었다.

폐쇄적인 특성을 지닌 천공.

당연히 그들의 유적은 지극히 비밀스러운 장소에 있을 것이었다.

“우리 목소리 그룹의 유적은 어디서 찾지?”

“에덴티아 선배님의 말씀대로라면 아카데미의 지하 어딘가에 있겠지.”

졸업을 앞둔 에덴티아였지만 그런 그녀도 목소리 그룹의 유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 목소리 그룹이 마도사 슈레이터 님의 유파라니…….”

에덴티아로부터 ‘열망하며 은둔하는 목소리’ 그룹의 진정한 연원을 들었을 때.

루인과 생도들은 하나같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마도사 슈레이터의 숨결이 이어지고 있는 유일한 그룹이었던 것.

하지만 슈레이터의 가르침은 심상과 언령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마법이었다.

당연히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슈레이터의 마법은 천 년 동안 점점 전승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지금에 이르러서 슈레이터의 유파는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문제아들의 대피소처럼 변해 버린 것이었다.

마법학부의 교수들에게조차 슈레이터의 마법은 전설, 혹은 잊혀진 고대의 유적.

“지하로 가면 알 수 있겠죠. 이 브로치를 차고 있다면 틀림없이 행정 요원들의 안내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생도들은 서로의 가슴께를 흘깃거렸다.

입술 모양의 브로치.

그런 우스꽝스러운 표식들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인상을 찡그리는 생도들.

가만 생각하니 이 브로치도 거슬렸다.

기사 생도들의 텃새를 견뎌 내기 이전에 선배 마법 생도들의 편견도 문제인 것이다.

루인이 저 멀리 아카데미의 새카만 지하로 향하고 있는 부유 계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지.”

다프네가 환풍구 앞의 마법 생도들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저 선배들은 내버려 둘 건가요?”

루인 일행은 모두가 마법 생도.

당연히 자신이 당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우리 일이 아니다.”

루인의 성향을 생각하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반응.

그래도 내심 기대했었는지 다프네는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런 다프네를 응시하며 은은하게 웃고 있는 루인.

그 역시 생도들이 느끼고 있는 무력감과 열패감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조리라는 건 현상 하나하나를 뜯어 고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부조리를 단숨에 집어삼킬 만한 거대한 힘.

그런 혁명을 일구어 내려면 단순한 대응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걸어간 루인 일행이 하나둘 부유 계단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모두 올라탔을 때 그들이 딛고 있는 계단의 하단이 붉은빛으로 타올랐다.

곧 마정석이 내뿜고 있는 마력의 파장, 고유의 소음이 울려 퍼졌다.

지이이이잉-

곧장 아카데미의 시커먼 지하를 향해 천천히 파고드는 부유 계단들.

이런 첨단 마공학을 처음 겪는 세베론이 감탄하며 소리쳤다.

“시, 신기해!”

세베론은 자신의 발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마법회로를 빠르게 눈에 담았다.

몇몇 마법적 법칙을 발견하긴 했지만 어떤 기전으로 회로가 구동되는지 완벽하게 이해되진 않았다.

쏴아아아아-

이내 나타난 거대한 하수도.

고약한 물내음이 코끝으로 번지자 시론이 더욱 얼굴을 구겼다.

“제길, 왜 우리 그룹의 유적만 지하에 있는 거지?”

“공간의 문제겠죠. 쓸모없는 유적이 지상의 공간을 차지하게 둘 순 없었을 테니까.”

“그렇군. 아카데미 입장에선 별 필요도 없는 그룹이니까.”

시론이 루인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런 찬밥 대우는 모두 저 녀석의 객기 때문.

“아직도 불만인가.”

“시끄럽다!”

그때, 부유 계단의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도착할 때가 되었다는 뜻.

쿠웅-

나직한 공명음이 지하의 공간을 울리자 보안 요원이 생도들을 반기고 있었다.

“이곳은 생도 신분으로 살필 수 있는 마지막 지하 영역입니다. 방문 목적과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다프네가 대답했다.

“저희는 ‘열망하며 은둔하는 목소리’ 그룹에 속한 마법 생도들이에요. 이 지하에 저희의 유적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보안 요원이 루인 일행의 가슴께에 매달린 브로치를 살피며 놀라는 눈치였다.

그로서는 유적을 방문하겠다고 나서는 목소리 그룹의 마법 생도들이 처음이었던 것.

보안 요원이 반대 방향을 시선으로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길을 좌측으로 돌아 나가면 복도 끝에 행정 요원이 한 명 앉아 있을 겁니다. 그에게 안내를 받으시면 됩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오른쪽 길은 절대로 안 됩니다.”

세베론이 침을 꿀꺽 삼켰다.

블록의 하부 기관에 함부로 출입하면 사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에덴티아의 경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루인을 시작으로 부유 계단에서 모두 내려온 생도들은 보안 요원의 안내에 따라 우중충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복도를 따라 기다랗게 이어진 마력등이 간헐적으로 껌뻑거리자 다프네가 루인에게 더욱 밀착했다.

“무서워…….”

6위계의 입탑 마법사가 고작 어둠 때문에 공포를 느낀다니.

“흥.”

다프네의 얄팍한 수작질에 금방 콧방귀를 뀌는 리리아.

“저기군.”

복도의 맨 끝, 껌뻑거리고 있는 마력등 아래 행정 요원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곧 루인이 그의 책상을 우악스럽게 내려쳤다.

쾅-

“시발 깜짝이야! 누구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생도의 무심한 눈빛.

간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행정 요원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일곱 개의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길게 드리워지자 행정 요원의 목울대가 꿀꺽거렸다.

“마, 마법 생도분들께서 이곳까지 어쩐 일로……?”

“‘열망하며 은둔하는 목소리’의 그룹 유적을 방문하고 싶다.”

“예?”

행정 요원이 눈을 비비며 다시 생도들을 자세히 바라본다.

그들의 브로치를 확인한 행정 요원이 눈치를 살피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로서도 목소리 그룹의 유적을 방문하기 위해 찾아온 마법 생도들은 처음.

“이, 이쪽으로. 안쪽은 더욱 어두우니 서로 손이나 어깨를 잡으시죠.”

그 즉시 생도들이 루인의 뒤로 길게 늘어섰다.

그렇게 서로의 어깨를 붙잡으며 구불구불한 복도를 한참 동안 걸었을 때.

어느덧 행정 요원이 걸음을 멈춘 자리.

생도들은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어?”

“여기네요!”

복잡한 시설이 사라진 곳에 제법 커다란 천연 동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산속의 동굴을 통째로 옮겨 놓은 듯한 장소.

시론이 혀를 내둘렀다.

“와, 이런 걸 대체 어떻게 공중 도시로 옮겼지?”

“정말 미쳤네요.”

“경이롭다 정말.”

생도들은 새삼 이 공중 도시를 설계하고 구현해 낸 마탑과 왕국의 위대함에 절로 마음이 숙연해졌다.

대체 얼마나 많은 마도학자와 건축가, 기술자, 노동자들이 갈려 나갔을까?

“음…….”

루인의 깊어진 두 눈이 끈질기게 동굴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저 흔한 동굴이었다.

마도사 슈레이터의 유적이라면 술식과 마법진, 마법기관 같은 마도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 했는데 그런 특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느낌은 생도들도 마찬가지.

“그냥 평범한 동굴 같은데요?”

“맞아. 이건 그냥 동굴이야.”

“너무 대놓고 평범해서 당황스러운데요.”

그때 행정 요원이 뒤로 물러나며 인사를 했다.

“그럼 저는 이만…….”

행정 요원이 사라지자 루인이 동굴을 향해 성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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