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생도들은 하나같이 루인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마정을 팔아 어마어마한 돈을 거머쥐고도 자신들을 데려온 장소가 허름한 싸구려 여관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여관의 질은 그렇다 쳐도 굳이 3인실, 4인실을 고집할 필요는 없잖아요?”
“맞다! 너무 불편하다!”
시론과 리리아, 슈리에는 귀족이다. 세베론과 다프네 역시 만만치 않은 집안의 자제들.
이 어린 나이에 마법사의 길을 걷고 있다는 건, 기본적으로 가문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듬뿍 받아 왔다는 뜻이었다.
그런 생도들에게 이런 허름한 여관, 게다가 다인실은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도 방값이 하루에 100리랑이 넘는다. 어차피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같이 자는 데 불편할 게 있나? 불필요한 지출을 왜 해야 하지?”
“아니 80만 리랑이 있잖아?”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땡전 한 푼 없어 생존을 걱정하던 녀석들이 갑자기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있다.
루인은 피식 웃고 말았다.
“내 돈이다.”
“…….”
“…….”
지극히 맞는 말이었기에 시론은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돈 가진 놈이 제 맘대로 돈을 쓰겠다는 데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발 이 옷만큼은 어떻게 좀 해 줘요. 죄다 우리만 쳐다보는 것 같다구요.”
왕실에서 보급받는 기본 의복은 눈에 띄기 딱 좋았다.
에어라인의 닳고 닳은 상인들의 눈에는 시민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전형적인 호구로 비치고 있는 것이다.
방금만 해도 간단한 간식을 사려고 상점에 들렀었는데 호구 잡으려는 태가 역력했다.
“음.”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였기에 루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
“그러지.”
루인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생도들이 재빨리 근처의 옷가게로 뛰어갔다.
들뜬 표정으로 몇 가지 옷을 고른 다프네가 곧장 피팅룸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생도들도 저마다의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다프네가 가장 먼저 새로운 옷을 입고 나왔다.
“여, 역시…….”
“호…….”
시론과 세베론의 짧은 감탄이 이어졌다.
붉은색 안감이 내비치는 트렌치코트.
질 좋은 사슴 가죽 바지.
곱게 올린 머리와 짧은 끈의 숄더백.
분명 평범한 복식이었지만 전체적인 핏이 너무나 보기에 좋았다.
‘역시 옷보단 얼굴이지.’
‘정말 말도 안 되게 예쁘다.’
역시 뭘 걸쳐도 다프네가 걸치면 다른 것이다.
뒤이어 피팅룸에서 나온 생도는 리리아.
과연 그녀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복장이었다.
달랑 흰 셔츠에 검정색 팬츠.
무채색으로 깔끔하게 완성한 그녀의 패션은 마치 단정한 소년처럼 보일 지경.
시론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곧 겨울인데 외투라도 한 벌 고르지 그러냐?”
“어차피 이틀 뒤면 짐이 도착한다.”
시론은 그녀의 의도를 명확히 이해했다.
루인에게 최소한의 신세만 지고 싶다는 뜻.
이어 다른 생도들 모두 저마다의 옷을 입고 나왔고.
간단한 여행자의 복식을 선택한 루인은 루이즈를 바라보며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우……?”
생긋 웃으며 한 바퀴 휙 돌고 있는 루이즈.
상체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정색으로 칠해진 기다란 로브.
그것은 적요(寂寥)하는 마법사, 침묵의 심판관 루이즈가 가장 즐겨 입던 옷.
마치 그 옛날의 루이즈를 다시 보는 것만 같아 루인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울린다.”
루이즈의 등을 쓰다듬으며 희미하게 웃던 루인이 계산대의 옷가게 주인을 응시했다.
“모두 얼마입니까.”
주인은 생도들이 걸친 옷을 면밀하게 살피더니 예의 살갑게 웃었다.
“에, 전부 6,490리랑입니다.”
“뭐?”
“네에?”
생도들 모두가 입을 떡 하니 벌리고 있었다.
수도 왕성의 물가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수준.
아무리 생각해도 에어라인의 높은 물가는 심해도 너무 심했다.
한데 그때.
“음…… 너무하군요. 아무리 그래도 시세의 세 배나 튕기시다니.”
생도들의 시선이 싱긋 웃고 있는 소녀에게로 향했다.
분명 어딘가 낯이 익은 사람.
루인은 금방 그녀를 기억해 냈다.
홍염(紅焰)의 파수꾼.
다름 아닌 그녀는 ‘꿈꾸는 불새의 둥지’의 리더이자 4등위 마법 생도 에덴티아였다.
“설마 했는데 그 녀석들이 맞았네. 너희들 그때 목소리 그룹을 선택했던…… 맞지?”
“안녕하십니까, 에덴티아 선배님!”
세베론이 꾸벅 인사하자 그제야 다들 기억해 낸 듯 예를 갖췄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슈리에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에덴티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어떻게 벌써 에어라인에 올라왔지? 아직 학기는 한참 남았을 텐데?”
“그게…….”
슈리에의 짧은 설명이 이어지자 에덴티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학부장님께서? 말도 안 돼…….”
등급 패스라니!
목소리를 선택한 무등위 생도들을?
무엇보다 헤데이안 학부장의 주도로?
이명을 지닌 최상위권의 생도들에게도 관심조차 갖지 않던 학부장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무등위 생도들에게 이 정도 특혜를 베풀 분이 아닌데.”
까마득한 선배님의 등장, 그것도 이명을 지닌 4등위 마법 생도 에덴티아.
그런 그녀는 세베론에게 있어서 가장 닿고 싶은 목표나 마찬가지였다.
“아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시죠?”
“날씨가 쌀쌀해져서 외투 한 벌 사려고 왔다가…… 흠.”
에덴티아는 어쨌든 저 몰염치한 옷가게의 주인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대충 보니 아무리 비싸게 받아도 2천 리랑 정도인데 대강하시죠? 계속 강짜 부리실 거면 지금 바로 상인 조합에 제보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그럼 2천 리랑만 받겠습니다!”
지폐를 세던 루인이 계산을 끝마쳤을 때 에덴티아의 시선이 다시 생도들을 훑었다.
“호기심이 생기네. 보아하니 짐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인데 어디서 지내고 있지?”
세베론이 손가락으로 여관을 가리켰다.
“저기! 저 여관입니다!”
에덴티아가 먼저 길을 나섰다.
“가자. 너희들도 선배의 조언이 절실하잖아?”
“그, 그럼요!”
루인 역시 에어라인 아카데미의 정보를 미리 알려 준다는 에덴티아를 굳이 막지 않았다.
여관에 도착한 후 에덴티아와 루인 일행은 둥근 테이블에 차례로 앉았다.
여관의 분위기를 살피던 에덴티아가 루인을 바라보았다.
“돈은 나보다 그쪽이 더 많아 보이던데 신세를 져도 괜찮겠지? 이 많은 후배님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건 나도 좀 무리라서.”
매달 가문에서 보내 주는 돈이 있다고 해도 에어라인의 살인적인 물가를 견디기엔 생도 신분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어차피 손님은 에덴티아 쪽이라 루인도 굳이 선배의 체면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루인이 주문한 음식의 계산을 끝마치자 세베론의 조심스러운 질문이 이어졌다.
“선배님. 1등위의 학기가 시작되기까지 4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기숙사를 제외하면 그 사이에 저희가 수련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특히 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뛸 수 있는 공간? 운동장을 말하는 거니?”
“예!”
“왜? 체력 단련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지금까지 쭉 그래 오고 있었습니다.”
미간을 찌푸리며 미심쩍은 눈빛으로 후배들을 훑던 에덴티아가 나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 그런 곳이라면 이미 기사학부가 모두 점령하고 있지. 알다시피 에어라인의 구조상 공간의 제약이 많아.”
온갖 상점들로 빽빽한 거리, 그 미로와 같은 에어라인의 환경을 경험하면서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던 부분.
그런 예상이 현실이 되자 생도들은 하나같이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기사학부가 하루 종일 쓰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기사 생도들이 활용하지 않은 시간대라면…….”
“당연히 온갖 시비를 걸어오겠지. 너희들이 그 위험한 놈들을 감당할 수 있겠어?”
루인의 워메이지 수련법을 꼭 익히고 싶은 생도들 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
그렇다고 무시무시한 고등위 기사 생도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리리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칙에 의하면 아카데미의 생도들은 모든 시설을 향유함에 있어 동등한 권리를 지니죠. 그건 불합리입니다.”
씁쓸하게 웃는 에덴티아.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다른 법.
“에어라인에서 교칙은 작동하지 않아요, 차가운 후배님. 그건 전장에서 도덕을 찾는 것과 똑같은 거야.”
“이해할 수 없군요. 왕립 아카데미의 기강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에덴티아가 혼란스러운 표정의 시론을 바라보았다.
“렌시아가가 직접 생도들을 후원하는 마당에 아카데미의 기강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하이렌시아…….”
이 르마델의 귀족가라면 왕국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하이렌시아가의 권력을 지독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그들은 왕국의 인재들을 빠짐없이 흡수하고 있었고 아카데미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인재 영입 수단.
물론 하이렌시아가의 선택을 받는다는 건 출세가 보장된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기사 생도들도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럼 렌시아가의 후원을 받는 생도들이 아카데미의 권력을 거머쥐고 있겠군요. 당연히 교수들도 렌시아가의 위상이 두려워 통제하기 힘들 테고요.”
세베론의 예상에 에덴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렌시아가의 후원은 주로 기사 생도들에게 향하고, 반면 왕실은 마법 생도들을 후원하는 편이야. 하지만 알지? 마법 생도들의 위상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약해.”
시론이 버럭 화를 냈다.
“제길 도대체 하이베른가는 뭐 하고 있는 거야? 렌시아가를 견제할 수 있는 건 같은 대공가인 베른가밖에 없는데! 그런 자들이 죄다 가문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루인은 흡사 자신이 욕을 먹는 것만 같아 기분이 묘했다.
역시 틀린 말이 없으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르마델의 초기부터 사자의 가문은 단 한 번도 권력의 놀음에 끼지 않았어. 왕국의 깃발만 손에 쥐면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지. 그냥 이 왕국에 존재하지 않는 가문이라 생각하는 게 편할 거야.”
선배 생도인 에덴티아에게 물어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기에 생도들은 모두 루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계획을 이끌어 온 자, 사실상의 대장이나 마찬가지.
“결투가 허용된다고 들었다.”
루인의 담담한 목소리에 예상했다는 듯 생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겠지?”
“달리 뾰족한 수가 없잖아. 알박고 있다면 비집고 들어가는 수밖에.”
“……불필요한 이목이 집중될 텐데.”
후배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에덴티아는 어이가 없었다.
마치 결투의 승리가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
그렇게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에덴티아에게로 루인의 질문이 이어졌다.
“운동장을 쓰려면 누구를 쓰러뜨려야 하지?”
“뭐……?”
기사 생도와 대인전을 벌인다고?
그것도 이명(異名)을 지닌, 무늬만 생도인 녀석들과?
“너희들 지금 무슨 착각을 하고 있나 본데…….”
“누구를 쓰러뜨려야 하냐고 묻고 있다. 선배.”
모든 불합리와 기득권을 끌어내리는 것.
역시 하이베른가가 나서야 할 때다.
하지만 기사가 아닌.
대마도사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