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지지지직-
루인이 꺼낸 커다란 보석.
미세하지만 강렬한 뇌전이 스파크처럼 튀며 보석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전형적인 마력 얽힘 현상.
그 말은 이 커다란 보석 전체가…….
“지, 진짜로 이것이……?”
“마정이다.”
“헐!”
마정(魔精).
마정석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기초 물질.
에어라인을 부유하도록 만드는 위대한 힘이자, 이 르마델 왕국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근원 촉매.
“지불할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루인의 표정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이런 값비싼 물건으로 생도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헬라게아 안의 보물들은 죄다 이런 것들뿐이었다.
마정조차도 헬라게아 안에서 흔한 물건.
진마력으로 가득한 마계에서는 마정의 출현 빈도가 인간계보다 훨씬 높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땅만 파면 나오는 수준.
실험이나 마도구를 제작할 때 필요할 정도만 확보하고 있었을 뿐, 만약 쟈이로벨이 마음만 먹었다면 헬라게아 안을 마정으로 가득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구스타스에게는 마정의 순도를 가늠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
잠시 후 그는 흰수염을 기다랗게 늘어뜨린 노인과 함께 나타났다.
금방 다프네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마도학자?’
노인에게서 풍겨 오는 독특한 마력의 파장을 읽은 다프네는 확신하는 눈치였다.
마탑의 지독한 마도학자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
문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마도학자라는 것인데.
‘우리 왕국의 마도학자가 아니야.’
마도학자의 칭호를 부여받은 마법사는 르마델 왕국 전체를 통틀어도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철저한 보안을 자랑하는 에어라인에서 타국의 마도학자를 초빙할 수 있다라.
본능적으로 다프네는 위험을 감지했다.
왕국의 은밀한 정보를 다루는 마탑의 일원이었기에 리네오 길드의 위상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건 그 이상이었다.
“허허, 정말로 마정(魔精)이군. 게다가 이런 최상품이 실제로 존재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 아, 난 테모도스라고 하네.”
마도학자 테모도스의 두 눈이 희열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저 커다란 마정을 가공하여 마정석으로 재탄생시킨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마정석(魔精石)이 쏟아져 나올지 그는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내 테모도스는 루인을 지그시 노려봤다.
“얼마를 예상하고 왔는가?”
루인이 예의 씨익 하고 웃었다.
“마정을 두고 흥정을 하겠다고?”
기껏해야 스무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
하지만 테모도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막막함으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마음을 다스리며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바로 저 눈 때문이었다.
감정 한 점 일렁이지 않는 무심한 눈빛.
산전수전을 다 겪어 왔다고 자부하는 편이었지만 저런 눈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종류다.
“80만 리랑. 지금 이 자리에서 전액 현물로 지불하겠네.”
“탐욕이 많은 늙은이군.”
츠츠츠츠츠-
루인은 다시 헬라게아의 공간을 열어 마정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테모도스는 마정을 봤을 때보다 더욱 놀라고 있었다.
허공을 일그러뜨리며 나타난 어떤 거대한 의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맥동하는 전율적인 마력 파장.
이미 아공간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런 마력의 잔재만으로 온몸이 떨려 왔다.
“대, 대체 그게 뭔가?”
마치 추측할 수 없는 위대한 단면을 마주한 기분.
“아공간이지.”
“그게 무슨!”
그것은 분명 마법사의 흔한 아공간 따위가 아니었다.
“거래는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
“잠깐! 이보게! 어떻게 흥정 한 번 없이 거래가 성사될 거라고 생각하나!”
루인이 뒤를 돌아 테모도스를 지그시 응시했다.
“거래하고 싶다면 잘 들어. 내 요구는 한 번뿐이니까.”
“요구?”
“80만 리랑? 좋아. 반값 정도지만 장물이라는 걸 감안해서 그 가격에 주지. 단.”
인간 진영을 이끌던 시절의 루인은 이런 허름한 길드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대륙 단위에서 노는 길드장들과 협상을 해 왔다.
인류의 운명을 걸고 벌이는 참혹한 전쟁 중에도 탐욕으로 이득을 취하던 자들.
그런 상인들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겪어 왔기에 그들을 다루는 방법 또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루인이 구스타스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지금쯤이면 이 방 안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길드장에게 보고됐겠지. 아마 길드장은 정보상을 통해 우리의 신원을 알아보려 할 테고 당연히 추적조 역시 편성될 거야.”
“…….”
“귀족가의 자제들이라면 회유, 최악의 경우 납치까지 각오하겠지. 이 정도 마정의 출처는 그만큼 놓칠 수 없는 정보니까.”
루인이 흰 이를 드러냈다.
“뒤탈 없는 평민이라면 납치는 당연한 거고. 이 중에 몇 명은 죽이거나 불구를 만들어서라도 내 입을 열려고 들겠지. 특히 당신은 내 아공간을 연구하려 할 거야. 마도학자라는 족속이 그렇거든.”
순간.
“이, 이게 무슨 짓……? 아악!”
루인이 회귀한 후 마력을 최대로 개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법사의 위계 따위로 가늠하는 것이 무의미한, 그야말로 광활한 융합 마력.
그런 압도적인 루인의 마력 파장이 극도로 압축되어 테모도스에게 쏘아지고 있었다.
시론이 경악하며 외쳤다.
“마력 제압!”
마법사가 같은 마법사를 굴복시킬 때 활용하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마력 투사법.
한데 이런 마력 제압은 상대의 마력이 자신보다 아래라는 완벽한 확신 없이는 펼칠 수가 없었다.
역으로 제압을 당한다면 마력 폭주, 심하면 마나홀 자체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
“끄아아아아악!”
그러나 고위 마법사로 추정되는 노인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루인의 마력 제압을 견디지 못한 그의 마나 서클이 붕괴되기 일보 직전의 상황.
그 순간 고도로 압축된 루인의 융합 마력이 고요해졌다.
테모도스가 온몸을 벌벌 떨며 루인을 올려다보았을 때.
루인의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다시피 어지간한 추적자들 따윈 내 상대가 될 수 없다. 초인급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그런 유명한 암살자들이 에어라인에서 버젓이 활동할 수는 없을 테고.”
테모도스는 루인의 말이 오히려 겸손처럼 느껴졌다.
마력을 제압당한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 염동력.
전력으로 끌어올린 그런 염동력이 무슨 압착되듯이 단숨에 존재감을 잃었다.
그것도 같은 염동력에 의해.
살면서 이런 압도적인 염동력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현자급의 대마법사에게도 느낄 수 없었던,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수준.
“설사 날 제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길드의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타격을 입고 난 후일 테지. 어때? 각오할 수 있겠나?”
새하얗게 웃고 있는 루인을 향해 테모도스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루인이 다시 헬라게아를 소환했다.
힘으로 찍어 눌렀다면 이제 당근을 내밀 차례.
테모도스의 두 눈이 점점 찢어질 듯이 부릅떠진다.
한 개, 두 개, 세 개…….
방금과 비슷한 크기의 마정(魔精)이 예닐곱 개가 튀어나왔다.
그런 비현실적인 광경에 테모도스는 한마디도 벙끗하지 못했다.
“헛된 욕망과 악의를 멈춘다면 이것들을 모두 독점으로 공급해 주지. 단 그때는 80만 리랑이 아닌 정상적인 가격을 받을 거야.”
마정은 가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물량을 확보해 두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권력으로 작동한다.
특히 이 에어라인에선 왕실조차 움직일 수 있는 힘.
“거, 거래하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하게 웃던 루인은 한 개의 마정만 남겨 두고 모두 헬라게아에 넣었다.
“다시 말해 두는데, 날 추적해서 귀찮게 한다면 그 즉시 이 거래는 취소다. 파는 시기는 전적으로 내 의지에 달려 있단 뜻이지.”
“알겠습니다!”
예절이 주입된 테모도스의 태도에 루인이 흡족한 듯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럼 마저 셈을 하지. 수표는 받지 않아.”
잽싸게 사라진 테모도스는 한참 후에야 길드원들과 낑낑거리며 나타났다.
그가 들고 온 것은 아무런 표식도 찍히지 않은 장물 금괴였다.
100리랑은 1금화와 같은 가치.
100금화는 하나의 금괴와 동일한 가치.
그러므로 루인이 받을 금괴는 총 80개였다.
루인은 금괴 하나를 제외하고는 몽땅 헬라게아에 보관해 두었다.
“이건 리랑으로 바꿔 주고.”
이어 1만 리랑에 해당하는 지폐를 받아 든 루인은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명심해. 귀찮게 하면 끝이야.”
“명심하겠습니다! 분부대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어, 수고하고.”
루인과 생도들이 사라지자.
“정말 추적하지 않으실 겁니까?”
길드원 카르잔의 질문에 테모도스의 두 눈에 기이한 빛이 번뜩였다.
“아직도 모르겠나?”
“예?”
무슨 마정을 동네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취급하는 존재.
의지를 지닌 아공간의 소유자.
인간임이 의심될 정도의 초월적인 마력과 염동력.
무엇보다 무저갱처럼 가라앉은 그의 두 눈.
고작 소년이 저런 불가해의 역량을 지녔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살면서 저 엄청난 존재를 직접 경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테모도스는 아직도 소름이 가시지 않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카르잔.”
* * *
루인의 또 다른 엄청난 단면을 확인한 생도들.
마정을 금괴 80개로 바꾸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생도들은 쥐 죽은 듯이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
시론은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루인의 불가사의한 아공간.
그곳에 뭔가 대단한 물건들이 들어 있을 거라고 어렴풋하게 추측은 하고 있었다.
루인이 선보였던 ‘영관모’만 해도 상식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수준의 아티펙트였기 때문.
한데, 무슨 마정을 굴러다니는 돌처럼 보유하고 있는 건 다른 문제였다.
마정은 한 국가의 국력을 좌우할 정도의 절대적인 자원.
압도적인 양의 마정을 보유하고 있는 알칸 제국이, 마장기(魔裝機)를 통해 대륙을 지배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르마델 왕국은 마장기는커녕 이 공중도시 하나만으로도 모든 마정을 소모했을 것이다.
실제로 르마델은 단 한 기의 마장기만 소유하고 있는 국가였다.
“출처 같은 건 묻지 않겠다. 어차피 알려 주지도 않을 테니까.”
걸음을 멈춘 리리아가 루인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장물이나 거래하는 지하 길드와 마정을 계속 거래할 생각이라면 나는 여기서 너와 헤어지겠다.”
리리아는 르마델의 귀족이었다.
그건 시론도 마찬가지였다.
“맞다. 그 마정으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너무 위험해.”
루인이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봤다.
“일반적인 마정이 아니다.”
“뭐?”
“응? 뭐라고? 다시 말해 봐.”
“너희들이 아는 그 마정이 아니라고.”
마정(魔精)이란 특정한 장소에서 오랜 세월 동안 마나가 쌓여서 만들어진 물질이다.
그러므로 루인이 팔았던 마정이 품고 있는 마나는 바로 진마력.
“다루는 방식이 달라. 그걸 일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마정석으로 가공하려면 아마도 수백 년은 지난 후일 거다.”
사실 진마력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인간들이 마정석으로 가공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최악의 경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마정만 죄다 소모해 버릴 수도 있는 일.
최소 마왕급 이상과 계약한 흑마법사가 끼어든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흑마법사가 흔하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그럼 사, 사기를 친 거란 말이냐?”
경악한 시론.
다프네가 콧방귀를 꼈다.
“루인 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죠. 아까 루인 님이 그 사람들을 다루는 모습을 못 보셨나요?”
“아, 아니! 그래도 이건!”
루인이 다시 걸으며 말했다.
“마정은 맞다. 하지만 다룰 수 없을 거다.”
다프네가 시론을 째려본다.
“돈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됐는데 괜히 분위기 초 치지 마세요.”
무려 드래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해할 필요도 걱정할 이유도 없었다.
“넌 정말 저 녀석을 좋아하는 건가?”
“그건 왜요?”
다프네를 바라보는 시론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측은한 듯, 안쓰럽다는 듯한 그의 눈빛.
“뭐 감당할 수 있겠다면야.”
그의 묘한 시선에 불쾌감을 느꼈는지 다프네가 쌩 하고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