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짧은 설명이었지만 대마도사의 직관은 많은 상황을 유추해 내고 있었다.
결투.
신성한 대결이니 아카데미의 규율이니 예쁜 포장지를 덧씌워 놨겠지만, 결국 힘없는 생도들의 입장에선 그냥 ‘야만’일 것이다.
통념적으로 결투가 성사되면 생사(生死)나 부상을 서로에게 묻지 않기 때문.
당연히 힘없는 생도들의 입장에서 결투란 ‘죽음’ 혹은 ‘사고’와 동일시되는 단어일 터.
왕족과 귀족, 기사, 평민, 농노 등.
왕국에서의 삶처럼, 이곳 에어라인의 등급 생도들 역시 적당한 위치에서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사실상 작은 왕국처럼 굴러가는 셈.
하지만 루인의 의문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마법 생도들의 입장에선 불합리군.”
대인전이 갖는 특성상 결투는 마법사에게 지극히 불리하다.
더욱이 기사 생도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마법 생도들의 난처한 상황이 눈앞에 그려질 정도.
“뭐 그건 지상도 다르지 않죠. 르마델은 애초에 기사들의 나라니까요. 사실 우리 마법 생도들끼리야 경쟁입네 하지만 아카데미 전체로 볼 땐 비주류인 게 현실이죠.”
듣고 있던 시론이 짜증이 난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아카데미는 그런 야만적인 결투를 허용하는 거지?”
곰곰이 생각하던 다프네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에어라인을 살아가는 시민권자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있어요. 땅, 식량, 물 등 모든 자원이 지상보단 한정되어 있거든요. 이 도시가 수많은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단 뜻이죠.”
“공간 이동진이 있는데 왜?”
루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동량에 한계가 있겠지. 우리가 경험한 공간 이동진은 아무리 많아도 몇 군데 정도일 거다. 공간 이동진을 구동할 정도의 마력 촉매제는 매우 희귀해서 단순히 돈만으로는 구할 수가 없다.”
“그것도 그렇고, 이제 경험해서 잘 아시잖아요? 에어라인의 철저한 절차를.”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공간 이동진으로만 물자를 확보해야 하는 물리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런 행정적인 한계가 더욱 장애물로 작동할 것이다.
반입되는 물자들을 모두 철저하게 검수해야만 하니 유동량이 굼뜰 수밖에 없는 것.
그렇게 루인 일행이 복잡한 심경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행정 요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립 아카데미에서 오신 생도분들은 입장하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저 행정 요원의 잔혹한 일 처리를 빠짐없이 지켜본 세베론은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다프네가 말했었지만 위장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는 루인 역시 긴장하기는 매한가지.
등록 보안청의 내부에 들어서자 서너 명의 보안청 간부들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루인 일행은 행정 요원의 안내대로 가지런히 늘어져 있는 의자에 한 명씩 차례대로 앉았다.
“시론 마엔티 메데니아.”
안경을 매만지며 서류를 확인하던 보안청 간부가 무심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메데니아가(家)의 가보는 총 몇 개이며 각각의 쓰임새는 무엇입니까.”
“총 3개. 유시엘라의 반지, 서천(西天)의 망토, 광염의 열좌(熱座)다. 한데 우리 가문의 보구들은 현자가의 비전인데 감히 그런 걸 묻는다고?”
그런 시론의 태도를 확인하며 보안청 간부가 희미하게 웃었다.
“메데니아가의 성물 창고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미친, 무슨 수작이지?”
벌떡 일어난 시론이 불같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보안청 간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보안청 간부는 그가 메데니아가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에다크. 저 생도에게 허가증을 부여하게.”
“알겠습니다.”
이번엔 등록 보안청의 다른 여간부가 리리아를 호명했다.
“리리아 드리미트 어브렐.”
리리아의 무심한 눈빛이 그녀를 향했을 때.
“어브렐가의 가언을 말씀해 주세요.”
“기쁨 없이 도약하라. 고통 속을 나아가라. 멸화(滅禍) 앞에서도 진리를 궁구하라.”
가문의 하인들조차도 외우고 있는 어브렐가의 가언이다.
리리아는 고작 이 정도 질문으로 첩자를 솎아 내려는 보안청의 여간부가 얼간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의 다음 질문에서 리리아는 굳어지고 말았다.
“가언 속의 멸화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말씀해 주세요.”
“…….”
그건 가문이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이자 오랜 약점이었다.
한데 가언의 ‘멸화(滅禍)’에 다른 뜻이 있다는 걸 아는 것 자체가 저 여자 역시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리리아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심장 쪽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제야 여간부가 행정 요원을 응시했다.
“통과. 리리아 생도에게 허가증을 지급하세요.”
이어 차례대로 생도들에게 심문이 이어졌다.
다프네의 말대로 허가증을 발급받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다만 생도들은 등록 보안청의 정보력에 감탄을 거듭해야만 했다.
가문의 비밀 같은 환경적인 요소부터 당사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인적 요소들까지 그들은 치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다프네와 루인, 그리고 루이즈.
“한 분은 이미 시민권자시고…….”
그때 손에 든 마법봉으로 다프네의 주변을 이리저리 휘두르던 행정 요원이 간부들을 응시했다.
“아공간이 있습니다.”
이어 간부들이 다프네에게 아공간을 열어 달라고 주문했고.
내부를 살핀 행정 요원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간부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럼 다음, 루인 라이언…… 흡!”
보안청 여간부가 경악한 얼굴로 안경을 고쳐 썼다.
서류를 들고 있는 그녀의 두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동료가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이 드물었기에 다른 간부들이 모두 그에게 모였다.
함께 서류를 살피던 간부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려고 하자.
“그만.”
차갑고 음산한 루인의 목소리에 간부들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저 서류에 무엇이 쓰여 있을지 루인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노인네 같으니.’
위장 신분 같은 허술한 수법으로는 이 등록 보안청의 날카로운 눈을 피할 수 없을 터.
결국 현자 에기오스는 자신의 진정한 정체,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는 신분을 저들에게 통보했을 것이다.
“……새어 나가지는 않겠지?”
죽일 듯이 노려보는 루인의 눈빛에 간부들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입니다! 등록 ‘보안’청은 시민권자들의 개인 신상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무려 루인의 신원 보증인으로 현자의 직인(職印)이 찍혀 있었다.
만약 일이 생긴다 해도 책임은 마탑의 현자가 모두 지게 되니 더 이상 일을 크게 벌일 필요도 없는 것.
하지만 서류의 내용은 루인의 예측과는 달랐다.
유희 중인 위대한 일족.
현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의 눈앞에 서 있는 존재는 걸어 다니는 재앙, 그 자체.
“그럼 끝났군. 짐은 언제 돌려받을 수 있지?”
“최, 최대한 빨리 검수를 끝내겠습니다! 이틀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디서?”
“묵으실 여관의 위치를 통보해 주시면 직접 짐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알았다.”
이어 여간부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넘겼다.
그녀는 그렇게 루이즈의 서류를 살피다 또 한 번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 헤데이안 학부장의 신원 보증?’
르마델의 또 다른 현자 헤데이안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대체 이 녀석들이 누구길래 왕국의 이름 높은 양대 현자들이 동시에 보증인으로 나선단 말인가?
결국 생도들은 손등에 마법룬을 새기고 등록 보안청을 나올 수 있었고.
당연히 모두의 시선은 루인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세베론이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설마 왕족인 거야……?”
마도명가인 어브렐가와 메데니아가의 직계들 앞에서도 꿈쩍도 하지 않던 등록 보안청의 간부들이다.
그것은 분명 왕족,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명문 기사 가문에게나 보일 법한 태도.
이 르마델 왕국에서 검술명가와 마도명가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시론이 세베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까 루인의 말을 듣지 못했냐? 스스로 말하기 전까진 기다려 주는 게 친구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조급해하지 마라.”
시론답지 않은 어른스러움에 루인이 의외라는 듯 쳐다봤다.
“그런 흐뭇한 눈으로 보지 마라. 넌 참 이상하게 가끔 할아버지 같은 눈빛을 할 때가 있다.”
그때, 다프네의 표정이 초초하게 변했다.
“잠깐! 여관을 잡으려면…… 우린 돈이 없잖아요?”
“돈? 문제 될 게 있나? 짐을 찾고 나서 지불하면 될 텐데?”
다프네는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얼마나들 있죠? 다들 말해 봐요!”
“200리랑?”
“난 150리랑 정도?”
“250리랑.”
“2리랑쯤 남았나.”
모두의 고개가 루인을 향해 홱 하니 돌아갔다.
아니 심상치 않은 신분을 숨기고 있는 주제에 꼴랑 2리랑이라고?
“터, 턱없이 모자라요! 최소한 방을 두 개는 잡아야 될 텐데, 그 방값만 해도 최소 400리랑은 할 거란 말이에요! 게다가 이틀 동안의 식대와 목욕물값, 침구 대여비 등을 다 합치면―”
“아니 뭐가 그렇게 비싸지?”
수도 왕성 르마델 나이트 캐슬의 평균 물가로 고려했을 때, 방이 두 개라고 해도 보름 정도는 거뜬히 지낼 수 있는 돈이었다.
한데 하루 숙박에 무려 200리랑이라니?
“아무리 물가가 비싸다고 해도 열 배 넘게 차이 나는 건 좀 심한데?”
“물값은 그렇다 쳐도 침구 대여비는 또 뭐죠?”
생도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물가와 에어라인의 부박한 인심에 혀를 내둘렀다.
“청소비도 지불해야 되고 정해진 팁도 따로 있어요.”
“와 씨? 거의 날강도 수준이잖아?”
리리아가 말했다.
“그럼 학부장님께 지금의 상황을 전달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되지 않나.”
다프네가 고개를 저었다.
“마법 통신을 하려고 해도 전달 촉매가 없잖아요! 죄다 짐 속에 있는데!”
“마법 통신소―”
“지금 당장 돈이 없잖아요 돈이! 마법 통신소가 외상을 받아 주는 거 봤어요?”
시론이 끼어든다.
“아니 그럼 신분을 증명하고…….”
그렇게 말하던 시론이 금방 미간을 찌푸렸다.
가만 생각하니 지금 자신의 몸엔 가문의 위상을 증명할 만한 어떤 증표도 없는 것이다.
짐을 되찾지 못하는 이상 지금 자신들은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어쩌지?”
무력한 평민의 삶을 여기서 이렇게 체감하게 될 줄이야.
생도들의 불안한 눈빛에 루인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에어라인에 귀금속이나 마력 물질을 팔 만한 곳이 있나?”
“네……?”
다프네의 황당한 표정
“장물을 다루는 곳이면 더더욱 좋다.”
“있긴 하죠? 그런데 그건 왜요?”
“안내나 해.”
멍한 표정의 생도들이 루인과 다프네를 따라나섰다.
* * *
리네오 길드의 장물 거래 담당 구스타스는 실망한 듯 쯧 하며 혀를 차고 있었다.
오랜만의 손님이라 제법 기대를 했건만.
앳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 소녀들이 왕국에서 지급하는 기본 의복을 입고서 주르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보나 마나 갓 에어라인의 시민권자가 된 애송이들.
당연히 기대감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래도 손님으로 방문한 이상 예의는 갖춰야 했다.
“그래, 우리 어린 친구들께서는 무엇을 팔고 싶은 건지?”
세베론이 루인을 쳐다본다.
사실 루인이 평소에 보여 준 무게감이 없었다면 이런 위험함 곳을 따라오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루인이 구스타스의 맞은편 의자를 드르륵 당기며 차갑게 물었다.
“먼저 몇 가지 묻지.”
“음……?”
귀족가의 애송이인가?
앉자마자 반말 짓거리라니.
구스타스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말씀하시지요.”
루인이 구스타스의 뒤편에 걸려 있는 길드 마크를 시선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대들이 감당할 수 있는 장물의 한계는 어느 정도지?”
“푸핫!”
구스타스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터져 나왔다.
이 무시무시한 보안을 자랑하는 에어라인에서 대놓고 장물을 거래하는 길드다.
고위 귀족가는 물론 왕실과도 끈이 닿아 있는 이 리네오 길드를 감히 동네 점포로 취급하는 소년이라니.
“뭐 드래곤 하트라도 꺼내 놓을 거요?”
그 순간.
지이이이잉-
루인의 아공간 헬라게아가 공간을 찢으며 입구를 벌린다.
루인이 손을 집어넣었고.
곧 그가 헬라게아에 들어 있는 것들 중 가장 하찮게 굴러다니는 물건 하나를 꺼냈다.
“하? 꼴에 마법사였나? 뭐 얼마나 대단한 물건을…… 헙!”
루인이 꺼낸 것은 사람의 머리만 한 보석.
탁-
“다시 묻지.”
온몸을 벌벌 떨고 있는 구스타스를 향해 루인이 새하얗게 웃었다.
“지불할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