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88화 (88/187)

<88화>

공간 이동진을 처음으로 겪는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는 점은 바로 소음이었다.

마력이 공간을 왜곡하면 상상할 수 없는 전이 고주파가 발생한다.

그 고주파가 공기와 마찰하면 귀를 찢을 듯한 소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삐이이이이-

시야가 일그러질 정도의 두통.

시론은 창백해진 얼굴로 사력을 다해 귀를 막고 있었지만 아무리 막아 봐도 소용이 없었다.

얼마나 강력한 고주파였는지 피부까지 쩍쩍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지이이잉-

나직한 공명음과 함께 고주파가 잦아들었을 때 시론이 바닥에 엎드리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우욱!”

단 몇 초에 불과했지만 마치 지옥에 다녀온 것만 같은 심정.

고통을 다스리며 힘겹게 고개를 들던 시론이 루인의 얼굴을 보며 멍해졌다.

“끄으으…… 왜 넌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루인의 표정엔 그 어떤 고통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저 반쯤 눈을 뜬 채로 담담히 서 있을 뿐.

“고주파를 상쇄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술식으로 반대위상(反對位相)의 파동을 발현하는 거지.”

“뭐……?”

“지금 겪은 고주파의 파동을 잘 기억해 둬라. 공간이 왜곡될 때 발생하는 고주파의 파동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반대위상의 파동을 구현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세베론도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루인에게 물었다.

“끄으으…… 도대체 위상이란 게 뭐야?”

“진동이나 파동의 일주기(一週期)를 뜻한다. 그 일주기 내에 발견되는 모든 특징과 변수를 총칭하지.”

“아…….”

그제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시론과 세베론.

짝을 이루는 파동들이 서로 톱날처럼 맞물리게 되면 고유의 특성이 제로가 되는 회귀 성질.

그것은 디스펠의 술식에서 활용되는 ‘회로 상쇄’의 개념 같았는데, 좀 더 생각을 해 보니 그보다는 좀 더 고차원적인 이론인 듯했다.

하지만 세베론은 금방 의문이 생겼다.

“그럼 넌 공간 이동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거야?”

“당연하다.”

“응?”

마도명가의 시론이나 마법 교실에서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란 자신도 공간 이동진 같은 고위 아티펙트는 처음 경험하는 것.

“너희들도 얼마 전에 메스 텔레포트를 경험한 적이 있다.”

세베론은 베스키아 산의 봉화대로 수업을 나갔을 때 게리엘도스 교수가 펼쳐 보였던 메스 텔레포트를 기억해 냈다.

“아, 그렇지…….”

공간 이동진의 하위 술식 메스 텔레포트.

하지만 그때는 이런 소음 같은 건 전혀 없었잖아?

세베론의 표정에서 그런 의문을 읽은 루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당연히 게리엘도스 교수의 메스 텔레포트에는 반대위상을 발휘하는 술식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시론이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교수님도 할 수 있는 건데 왜 여기엔 없는 거냐!”

“게리엘도스 교수는 마법사고 이건 아티펙트다. 게다가 이동 거리와 수용 인원 자체도 다르고.”

그렇게 루인과 생도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덜컥 하고 열렸다.

“악!”

그제야 자신이 알몸이라는 걸 인지한 시론이 재빨리 중요 부위를 가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중년의 남자가 묘한 눈으로 내부를 살피더니 퉁명하게 말했다.

“그만 나오시죠. 운행에 차질이 있습니다.”

“아, 도착하면 우리가 나가야 하는 거였습니까?”

그렇게 묻던 시론이 금방 억울한 표정을 했다.

아니 이런 몰골로?

“초행이시군요. 금방 적응되실 겁니다. 그럼.”

중년의 남자가 문을 닫고 나가자 루인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중요 부위를 가리지도 않고 오히려 더 당당하게.

시론은 왠지 부러움과 설움이 함께 밀려왔다.

저 녀석, 분명 스스로 아는 거다.

남자로서 위대하다는 걸.

덜컥.

그렇게 루인 일행이 문을 열고 공간 이동진을 벗어났다.

“어…….”

시론이 더욱 멍해졌다.

열쇠가 꽂혀 있는 수많은 락커장 앞, 알몸으로 태연하게 걸어 다니는 남자들.

세베론도 문화 충격을 느꼈는지 그저 입만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한데.

삐―

뾰족한 알람음과 함께,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 서너 명이 루인 일행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루인은 그들 중 한 명이 들고 있는 원통형 아티펙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원통형 아티펙트에서 흘러나오는 고유의 마력 파장을 살핀 루인은 감지 마법이 작동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에어라인의 방문 등록을 담당하고 있는 퍼스트 아레아(First Area)의 경비대 소속, 피요르입니다.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어 경비대원 피요르는 루인 일행의 손등에 차례대로 원통형 아티펙트를 갖다 댔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다시 피요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첫 방문이십니까?”

일견 친절하고 정중해 보였지만 정작 말투는 차갑기가 짝이 없다.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고 관찰해야 하는 경비원들의 직업병.

“네. 첫 방문입니다.”

대답하는 루인의 위아래를 살피던 우두머리 경비원이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 이유를 왠지 시론은 알 것 같았다.

“흠흠, 신분 증명의 절차가 있겠습니다. 첫 방문자에게는 왕국에서 의복 일체를 제공해 드리고 있습니다.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루인 일행이 경비원들에게 지급받은 옷을 입고 길을 나섰다.

퍼스트 아레아를 살펴본 루인의 첫 느낌은 구조물들이 너무 빽빽하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공간을 극한까지 활용하는 느낌.

그러니 얽히고설킨 길들이 오히려 르마델 나이트 캐슬 성보다 더 복잡하게 느껴졌다.

“와아…….”

“주, 죽인다!”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

퍼스트 아레아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드디어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눈앞에 환하게 드러난 르마델 에어라인의 진면목.

그야말로 시야가 닿는 끝까지 직선의 구조물이 이어져 있다.

이 공중 도시에 왜곡장이 없다면 지상에서는 기다란 막대기처럼 보일 것이다.

루인은 공중 도시를 이렇게 구축한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이 공중 도시를 하늘에 부유할 수 있게 만드는 마정석은 일정한 범위 안에 너무 많이 설치하면 불안정한 성질을 띠게 된다.

그렇다고 마정석의 간격을 지나치게 벌릴 수도 없는 것이, 부유 술식을 품은 마정석의 수가 부족해 구조물을 공중에 띄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긴 막대기 같은 이런 기형적인 구조만이 최선이었을 터.

“…….”

인간 진영 전체를 이끌며 재물이라면 지긋지긋하게 다뤄 온 루인.

그런 루인조차도 이만한 공중 도시를 띄우는 데 필요한 재원이 얼마나 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천 년 이상 축적한 르마델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이건 인간이 지닌 마도, 아니 첨단 마공학의 승리.

주변의 왕국들, 더욱이 알칸 제국의 집요한 침략에 시달려 온 르마델 왕실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이 공중 도시만 파괴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왕국을 재건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을 터.

하지만…….

루인은 보았다.

베스키아 산자락 전체를 덮어 버린 그 거대한 에어라인의 잔해를.

‘군단장’들의 마력 포격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파괴되어 버린 그 과거를.

당시의 에어라인은 마력 결계도 대응 포격도 작동하지 않았다.

분명 이 에어라인 내부에 배신자가 암약하고 있었다는 뜻.

지금 이 순간에도 에어라인의 지휘부를 단숨에 점령할 수 있는 적들이 활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끔찍한 재앙을 아는 자는 자신이 유일.

그렇게 루인이 진득한 눈빛을 빛내며 걷고 있을 때, 경비원들이 말한 ‘등록 보안청’ 앞에 다다랐다.

“이곳입니다. 저기 줄을 서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한 줄은 입천(入天)하는 사람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출천(出天)하는 사람들입니다.”

루인은 경비원이 시선으로 가리킨 곳을 응시했다.

과연 사람들이 기다랗게 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상에 갈 때도 일정한 절차가 필요한 듯 보였다.

이 정도로 치밀하게 보안을 유지했는데도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마력 포격을 처맞았단 말인가.

그렇게 씁쓸한 심정으로 걸어간 루인이 줄을 서자.

덜컥-

등록 보안청의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 말도 안 돼! 우린 그냥 지역 상인들이라고!”

“이건 정말 모함입니다! 저희는 그딴 물건을 취급한 적 없어요!”

“사, 살려 줘!”

척척척!

이내 육중한 무장을 한 기사들이 그들을 철저하게 에워싸자.

등록 보안청의 입구에서 말끔하게 정복을 차려입은 행정 요원이 밖으로 나왔다.

곧 행정 요원이 냉랭한 눈빛으로 손에 들고 있던 장부를 그들에게 던졌다.

“누굴 바보로 아는군. 그대들의 장부에는 알칸 제국에서 활동하는 레게일 상단의 비밀 부호가 적혀 있다.”

“저,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여기 있는 놈들 대부분이 까막눈이라고!”

“마, 맞습니다! 전 글을 모릅니다! 그런 비밀 부호 따윈 더더욱 모르고요!”

행정 요원은 더 이상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형을 집행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척척척.

기사들이 에워싸며 기다란 창으로 위협하자 상인들은 점점 한곳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들의 의복이 미친 듯이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밑에서 매서운 바람이 솟구치고 있는 것이다.

휘우우우!

그곳은 다름 아닌 철창살로 겨우 유지되고 있는 허공이나 다름없는 곳.

불순분자들이 모두 철창살 위에 올라섰을 때 기사 하나가 기다란 손잡이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철컥-

추르르르르-

거대한 톱니바퀴가 작동하며 철창살의 틈이 점점 벌어졌고.

“으아아아아!”

“살려 줘어-!”

상인들이 미친 듯이 철창살의 구석으로 달려갔지만.

으아아아아아-

기다란 메아리만 남기고서 그들은 남김없이 추락해 버렸다.

덜덜덜.

그 처참한 현장에 시론이 어깨를 떨고 있었다.

살면서 이런 무시무시한 광경을 처음 보는 것은 세베론도 마찬가지.

“루인 님!”

아무것도 모르는 다프네가 활짝 웃으며 뛰어온다.

반대로 그녀와 함께 도착한 리리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감각을 곤두세우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모, 모르는 게 좋아.”

“흐음.”

하지만 그런 시론의 배려가 무색하게 곧이어 또 다른 불순분자들이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슈리에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처참한 현장을 바라봤다.

“이런 비윤리적인…….”

다프네가 대답했다.

“에어라인에선 흔한 일이죠. 이 정도는 앞으로 일상처럼 겪게 되실 거예요.”

“어떻게 정식 재판도 없이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거죠?”

싱긋 웃는 다프네.

“에어라인이니까요.”

다시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는 슈리에.

다프네의 말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다른 반응 없이 묵묵히 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로 이게 일상이라는 건가?

“왕성과 분위기가 많이 다를 거예요. 지상에서의 합리가 이곳에서는 불합리인 경우가 많거든요.”

“…….”

“‘진짜 아카데미’도 마찬가지겠죠. 빨리빨리 적응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지상의 아카데미와 어떤 면에서 다르다는 거지?”

루인의 질문에 다프네가 배시시 웃었다.

“길드와 귀족가의 후원을 받는 강자들로 즐비하니까요. 그들은 생도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들?”

“이명(異名)을 지닌 진짜 강자들 말이에요. 이미 고위 기사급 이상의 명성을 지닌 자들로 수두룩하죠.”

루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귀족가와 길드의 후원을 왜 아카데미는 통제하지 않는 거지? 많은 갈등과 암묵적인 계급이 생길 텐데?”

“왜 안 하겠어요? 당연히 아카데미는 갈등을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고 있죠.”

“뭐?”

다프네가 더욱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아찔할 정도로.

“결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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