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87화 (87/187)

<87화>

멍해져 버린 시론.

그 무감각한 리리아조차 놀란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과거 대재앙 ‘유성 폭풍’을 겪은 르마델 왕국.

그렇게 왕실은 알칸 제국의 창칼이 아니라 천재지변 한 번에도 왕국의 운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마탑의 전 역량과 천문학적인 비용이 어우러져 탄생한 것이 바로 부유 이동형 공중 도시 르마델 에어라인.

직계 왕족, 고위 귀족가, 왕실 대신, 기사단, 아카데미의 등급 생도 등.

제법 많아 보여도 왕국의 전체적인 인구 비율로 따진다면 공중 도시의 존재는 극히 제한된 정보였다.

그런 공중 도시의 존재를 직접 입으로 언급하는 어른이 생도들에겐 처음이었던 것.

만약 이 자리에 왕국의 배신자나 타국의 첩자가 있다면 헤데이안 학부장의 언사는 즉참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공중 도시라…….’

그래서였나.

루인이 바라본 왕립 아카데미에는 출입이 불가능한 폐건물, 실험실 등의 버려진 장소가 너무 많았다.

절반이 흉물처럼 변해 버린 대전투관들을 복구하지 않은 데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아카데미에서 활동하는 등급 생도들이 너무 극소수였다.

루인은 아카데미에 무등위 생도들로만 득실거렸던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

문득 루인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경지로는 저 거대한 공중 도시를 감싸고 있는 마법의 장막이 느껴지지 않는다.

얼마나 멀리 떠 있는지 또 어떤 형태인지, 융합 마도를 걷고 있는 마법사의 시계(視界)로도 살필 수가 없는 것이다.

놀라운 수준의 마력 결계는 차치하고서라도, 도시 규모의 부유물을 하늘에 띄우는 데 필요한 마정석(魔精石)은 대체 얼마나 될까?

루인에게도 공중 도시를 직접 경험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재앙 초기, 악제의 군단장들이 펼친 마력 포격에 의해 베스키아 산자락에 추락했다는 소식은 전생의 동료들에게 들었었다.

쟈이로벨의 열화판 마법을 익힌 후 세상에 나왔을 땐 지옥처럼 변해 버린 처참한 흔적들뿐이었다.

반드시 추락을 막아야 했다.

그러려면 보다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수락하겠습니다.”

헤데이안 학부장이 환하게 웃었다.

이 노인네의 의도를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그를 철저하게 활용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 테지만, 달리 생각하면 학부장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현자급 마법사다.

백마법에 한정한다면 현자의 이해도를 자신이 능가할 순 없는 터.

“좋은 판단이네. 자네들에게 단숨에 등급 생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내 친히 열어 주겠네.”

“학부장님 저희는 아직……!”

헬렌 교수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하지만 학부장은 완고했다.

“그만.”

“학부장님!”

학부장과 교수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루인과 생도들은 슬며시 지혜의 사원을 빠져나왔다.

계속 있어 봤자 교수들의 따가운 눈총만 받을 것이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  *     *

쌀쌀함이 더해진 왕립 아카데미의 아침.

목소리 생도들은 여느 때처럼 새벽에 일어나 운동장을 뛰고 있었다.

새벽의 괴이한 야외 수업 때문에 평소보다 수면 시간이 더 짧았으나 놀랍게도 불참한 생도는 한 명도 없었다.

며칠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게리엘도스 교수는 역시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항상 생도들과 거리를 두고 운동장을 뛰던 그였지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더 이상 그는 운동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

그렇게 목소리 생도들이 운동과 식사를 끝내고 실험실에 모였을 때.

아드레나가 빨간 머리를 휘날리며 찾아와 학부장의 지시를 전했다.

“에, 짐을 싸세요. 지금 당장.”

“지, 지금 당장?”

시론의 되물음에 아드레나가 싱긋 웃었다.

“에, 어쨌든 축하해요. 이제 당신들도 진정한 시민권의 주인공들이니까.”

결국 교수들이 학부장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 버린 모양.

역시 리리아가 가장 먼저 실험실을 벗어나 기숙사를 향해 걸어갔다.

“쟨 이 정도 사건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건가?”

등급 평가 없이 곧바로 1등위에 오르는 일은 길고 긴 마법학부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사건.

아무리 천재 생도라 해도 등급 체계를 부수는 일은 아카데미의 교칙이 한 번도 허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 정말 괜찮겠냐?”

매사에 자신만만했던 시론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도 후환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뭐, 더 잘된 일이 아닐까요? 시간이 문제일 뿐 어차피 언젠가는 가게 될 곳인데.”

다프네가 창문으로 내리쬐어 오는 햇살에 자신의 손등을 이리저리 비추었다.

알맞은 각도를 찾자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청록색의 룬(Rune)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이를 바라보던 아드레나가 호오- 하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에, 당신은 이미 왕국의 ‘진짜 시민권자’였네요.”

다프네의 손등 위에 마법으로 새겨져 있는 청록빛 룬 문양은 사실 에어라인의 허가증이었다.

그녀는 진즉에 에어라인을 경험한 진짜 시민권자였던 것.

“에, 잘됐네요! 그럼 굳이 제 안내를 받을 필요가 없잖아요? 입천(入天) 절차는 숙지하고 있죠, 다프네 생도?”

“바뀌지 않았다면요.”

“바뀐 것이 뭐가 있겠어요.”

기분이 좋아졌는지 헤실거리며 웃던 아드레나가 힐끔 창밖의 하늘을 쳐다봤다.

“그럼 저기 위에서 다시 뵙죠. 후배님들.”

아드레나가 쫄래쫄래 사라지자 루인이 다프네를 응시했다.

“뭘 준비하면 되지?”

“짐이요. 그리고 알몸으로 오세요.”

“뭐?”

싱긋.

“물론 간단한 잠옷 정도는 걸치구요. 버려도 되는 걸로.”

“왜지?”

“허가받지 않은 물건들을 몸에 지니고는 공간 이동진에 올라탈 수 없어요. 짐 가방 역시 에어라인의 세밀한 검사 후에야 다시 돌려받을 수 있죠.”

“그게 의미가 있나?”

분명 장거리 통신용 아티펙트, 고위계 마법 스크롤, 불법적인 무기 등.

공중 도시에 위협이 될 만한 물건들을 차단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에겐 그런 간단한 수가 통할 리가 없었다.

“걱정 마세요. 아공간도 털릴 테니까.”

루인은 웃고 있었다.

보나 마나 특수한 아티펙트를 통해 마법사의 마력이 이어지고 있는 주변의 왜곡장을 읽어 낼 것이었다.

그러나 루인의 헬라게아는 그런 마법사들의 평범한 아공간이 아니다.

그런 종류라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궤짝을 열어 보는 거라면 좀 찝찝했는데 다행히 헬라게아에 넣고 이동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아무런 짐도 없다면 괜히 의심만 살 테니 생도복과 세면도구, 마도서 몇 권 정도만 짐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루인의 발걸음이 기숙사로 향했다.

*     *     *

리리아가 당황한 눈빛으로 생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새 생도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자신과는 달리, 다른 생도들은 모두 잠옷 바람으로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너, 너희들 지금 무슨 수작이지?”

더러운 것을 본 것마냥 눈을 흘기는 리리아를 향해 시론이 실실 웃기 시작했다.

“아, 넌 듣지 못했군. 공간 이동진을 탈 땐 알몸이 필수다.”

“뭐? 왜 그래야 하지?”

보다 못한 슈리에가 설명을 마쳤을 땐 리리아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져 있었다.

“대체 왜 내가…….”

“리리아…….”

르마델 왕국의 충신 가문, 마도명가 어브렐가의 직계 후손이다.

그런 자신을 첩자 취급하는 왕국의 처사에 그녀는 모멸감으로 치를 떨고 있었다.

다프네가 생긋 웃으며 리리아를 쳐다봤다.

“국왕께서도 공간 이동진에 오르실 땐 알몸으로 오르신다고 들었어요. 당연히 귀족들이나 대신들도 마찬가지겠죠.”

“…….”

비록 잠옷을 걸친다 해도 잠옷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대귀족의 영애로 살아온 리리아에게 이보다 더한 모멸감은 없을 터.

더욱이 공간 이동진에 오르는 순간에는 그 잠옷마저도 벗어야 했다.

아무리 공간 이동진이 남녀 전용으로 각자 분리되어 있다지만 부모님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몸.

그때, 시계탑을 확인하던 루인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다. 리리아.”

모든 시험을 건너뛰고 등급 생도로 나아가는 길에 이런 터무니없는 장애물이라니.

오직 세베론만이 그녀의 고충을 이해하는 듯했다.

“보채지 마, 루인. 우리에겐 쉬운 일이어도 리리아에겐 충분히 어려울 수 있으니까.”

세베론이 턱짓으로 창문 밖, 아카데미의 정문을 가리켰다.

“먼저들 가. 여기서 기다렸다가 리리아와 함께 갈게.”

“그럴 필요 없다.”

그대로 짐을 들고 기숙사로 향했던 리리아가 금방 다시 되돌아왔다.

가늘게 몸을 떨고 있는 리리아.

제법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 수치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루인은 애써 리리아를 외면하며 궤짝을 들었다.

루인이 제법 묵직해 보이는 궤짝을 가볍게 들어 올리더니.

시커먼 공간의 아가리로 쑥 집어넣자 다프네가 묘한 눈빛을 했다.

“아공간에 숨기는 건 소용없을 텐데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불순한 물건이라면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피식 웃던 루인이 먼저 길을 나섰다.

“가지.”

실험동을 빠져나오자마자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창문이 새카맣게 칠해져 밖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는 마차.

추가로 잔잔한 술식의 잔향이 느껴지는 것이, 미지의 마법진이 마차에 새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추적 방지용 술식.

에어라인으로 향하는 공간 이동진의 위치는 왕국의 극비 중의 극비였다.

곧장 마차의 문이 열리며 학부장의 얼굴이 빼꼼히 드러났다.

“어서들 타게. 왜 이리 늦었는가?”

“죄, 죄송합니다.”

시론을 선두로 일곱 생도들이 모두 마차에 올랐다.

불행하게도 루이즈의 단짝 말코이는 이번 등급 패스에 참여하지 못했다.

전반기 수업을 낙제한 말코이의 생도 생활을 모두 조사한 학부장이 결국 녀석의 뇌물 입학을 알아 버린 것이다.

부유한 상인 자제들의 뇌물 입학은 왕왕 있는 일.

루인과 생도들은 별다른 동요가 없었지만, 말코이 녀석의 유일한 친구였던 루이즈는 상심이 제법 큰 듯했다.

루인이 그녀의 등을 쓸었다.

“언젠가 녀석을 다시 보게 될 거야. 루이즈.”

루이즈가 붉어진 눈시울을 닦으며 훌쩍거리고 있을 때 드디어 마차가 출발했다.

덜컥덜컥.

규칙적인 진동, 은은한 마력진의 파장, 눈을 감고 있는 학부장, 거기에 햇빛이 차단된 마차 안의 음침한 분위기까지.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있는 루인과는 달리, 생도들은 긴장감에 몇 번이고 목울대를 꿀꺽거렸다.

루인처럼 여유를 유지하고 있는 생도는 다프네가 유일했다.

“다들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사실 별거 없거든요.”

루인이 그녀에게 물었다.

“이동진을 통과한 그 이후에는?”

“면접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냥 형식이죠. 신원만 확실하다면 특별히 문제 될 건 없어요.”

루인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신원이라면 자신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지금의 신분은 루인 라이언.

마탑주 에기오스가 자신을 어떤 신원으로 꾸몄는지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함부로 면접을 마주했다간 지상으로 추방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루인이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헤데이안 학부장을 바라봤다.

그런 위험한 상황이 닥치기 전에 어떻게든 저 학부장을 움직여야 했다.

덜컥-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충직한 음성이 들려오자 학부장이 눈을 떴다.

“이만 내리지.”

마차에서 내렸지만 여전히 새카만 공간 속.

사방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습기.

거기에 햇빛도 없는 공간이 이토록 따뜻한 것을 보니 꽤 깊숙한 지하임이 틀림없었다.

“저기 붉은 수정구가 보이는가?”

“네!”

“보입니다!”

생도들이 우렁차게 대답하자 학부장이 다프네를 쳐다봤다.

“저곳이 여성용 공간 이동진이네. 다프네 생도가 잘 인솔해 주리라 믿네.”

루인이 그 반대편에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 수정구를 응시했다.

틀림없는 남성용 공간 이동진일 것이다.

“자네들은 나를 따르게.”

학부장이 남생도들을 이끌어 푸른 수정구 앞에 도착했다.

자세히 보니 푸른 수정구는 커다란 원통 모양의 방에 박혀 있는 마력 촉매인 듯 보였다.

끼이이익-

방의 문이 열렸고.

곧 지하의 음산한 분위기와 대비되는 새하얀 내부가 드러났다.

바닥의 공간 이동진이 뿜어내고 있는 빛살이었다.

“옷을 벗고 들어가게.”

“네.”

루인과 시론, 세베론이 차례로 공간 이동진 위에 서자.

쿵.

문이 닫히며 늙수그레한 학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조만간에 다시 만나지.

“……!”

학부장이 함께 가지 않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루인이 당황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면접은 이제 어떡하지?

그때 시론이 경외의 눈으로 루인을 쳐다봤다.

“넌…… 어떻게 다 가진 거지?”

루인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시론의 시선은 더 이상 아래를 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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