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86화 (86/187)

<86화>

밤의 어스름이 가득 차오를 무렵.

루인과 생도들은 ‘지혜의 사원’이라 불리는 왕립 아카데미의 성지로 향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어둠 속을 파고드는 기다란 가로수 길.

그런 나무에 매달린 마법 조명들이 밤바람에 의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 가로수 길을 벗어나자 저 멀리 거대한 석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안개에 휩싸인 초대 학장의 석상.

시론은 왠지 모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몸을 떨었다.

“아니 하필 왜 이 시간대지?”

이제 곧 자정.

모든 생도가 잠자고 있을 이 늦은 시간에 굳이 목소리의 생도들만 따로 부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비밀스러운 야외 수업이 있다는 건 들어 보지 못했어요. 좀 수상한데요?”

슈리에의 불안한 목소리에 다프네가 대답했다.

“헬렌 교수님께 직접 전해 들은 장소예요.”

“확실하지?”

생도들의 대화를 들으며 묵묵하게 걸어가던 루인은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있음에도 제법 매서운 한기가 느껴졌다.

북부 대륙에 속한 르마델의 겨울은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이제 곧 겨울.

다른 왕국에 비해 지극히 짧은 르마델의 가을은 그렇게 끝나 가고 있었다.

“……헬렌 교수님? 응?”

왕립 아카데미의 초대 학장, 마도사 슈레이터의 석상 아래 헬렌 교수가 서 있었다.

한데 그녀뿐만 아니라 게리엘도스 교수를 비롯한 여러 교수들이 함께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저 짙은 밤갈색 로브의 노인.

비록 후드를 쓰고 있어 제대로 얼굴을 살필 수 없었지만, 어깨까지 기다랗게 흘러내린 백발로 인해 그의 정체를 단숨에 유추할 수 있었다.

“어?”

“헤데이안 학부장님은 또 왜……?”

생도들의 당황한 반응.

그를 보자마자 루인은 이 야외 수업이 헬렌 교수의 의지로 비롯된 수업이 아니라는 걸 즉각적으로 알아차렸다.

틀림없이 학부장.

그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일 것이다.

“어서들 와요.”

어둠 속에서 헬렌 교수의 고르고 새하얀 치아가 밝게 빛났다.

그렇게 목소리 생도들이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굳어져 있을 때, 헤데이안 학부장의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도들은 초대 학장님께 예를 올리게.”

어색하게 서 있던 목소리 생도들이 하나둘 마법사의 예법을 취하자.

“시론 생도.”

학부장의 부름에 시론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예?”

“이 지혜의 성토(聖土) 위에서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을 이 학부장에게 약속해 줄 수 있겠는가.”

시론이 침을 꿀꺽 삼키며 거대한 석상을 마주 바라본다.

마도사 슈레이터.

르마델 왕국을 설계한 장본인이자 왕립 아카데미를 창립한 초대 학장.

그는 초대 국왕에 근접하는 명예와 위상을 지닌 위대한 르마델의 현자였다.

이 기사들의 왕국에서 마법학부의 명맥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의 공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는 터.

신성시되는 이름, 그 위대한 현자의 석상 앞에서 시론은 감히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예, 약속하겠습니다.”

“그럼 믿고 묻겠네. 학부 관리실에서 대전투장 16관의 열쇠를 가져간 적이 있는가?”

“예……?”

순간 루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학부장의 선명한 의도를 드디어 알아낸 것이다.

자신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은 이유는 명확했다.

아직 때가 덜 탄 생도들.

르마델을 향한 애국심, 또한 마법사로서의 자긍심이 들끓는 시기.

그런 생도들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기 위해 이 성소에 모이게 한 것.

어린 생도들의 성향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학부장의 노련함에 루인은 순간적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였나.’

유독 어두웠던 가로수 길.

으슬거렸던 바람.

사방에 짙게 내리깔린 안개.

술식의 흔적을 지우긴 했지만 분명 루인은 인위적인 느낌을 받았었다.

만약 그 모든 게 학부장이 의도한 연출이었다면 정말이지 소름이 돋는 노인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그건…….”

당황하며 루인을 쳐다보고 있는 시론.

하지만 루인은 침잠한 눈빛으로 학부장을 직시할 뿐이었다.

생도들의 심리를 위축시키기 위해 이 정도로 치밀한 무대를 준비했다?

고작 질책이나 징계를 위해?

그런 단순한 의도였다면 치밀한 연출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단 학부장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제가 시킨 일입니다.”

사실이기도 했고 시론에게 피해를 끼칠 필요는 없었다.

지금까지 학부장의 태도를 미뤄 봤을 때 이 무대는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수작일 확률이 높았다.

루인에게서 흡족한 대답이 흘러나오자 학부장은 금방 이를 드러냈다.

“혹시 전투장에 출입한 것이 무투대회의 준비를 위함이었던가?”

루인은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그렇습니다.”

“호오!”

웅성웅성.

교수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등위 생도 단계에서 무투대회를 참가하겠다고 나선 것은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 있는 일.

“우리 교수님들을 괴롭혀 온 것 역시 무투대회 때문이겠지?”

여전히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루인.

괴롭혔다는 어감이 묘하게 거슬렸지만 교수들의 입장에선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교수의 성향에 따라 일부러 논쟁을 벌이거나 발표회의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기까지 했으니.

또한 고대의 이론으로 범벅이 된 과제를 제출하기도, 마탑과 경쟁 관계에 있는 학파의 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몇몇 교수들은 목소리 생도들의 과제를 반박하기 위해 연구실에 틀어박혀 마도서만 읽는다는 소문까지 들려왔었다.

“교수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일수록 좋은 학점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판단이겠죠.”

여전히 은은하게 웃고 있는 헬렌 교수.

패를 읽힌 것이 불쾌했는지 루인의 얼굴이 어두워져 있었다.

“자네들의 의도는 반쯤 성공했네. 이렇게 교수들과 이 학부장까지 나서게 만들었으니 말일세.”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계속 뜸을 들이는 걸까.

전투장에 출입한 것을 확인했다면 교칙에 따라 처벌하면 될 일.

계속 변죽만 울려 대는 학부장의 태도를 루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처벌을 원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루인의 말에 헤데이안 학부장이 크게 웃었다.

“허허허! 처벌이라니 그 무슨 황당한 소린가? 벌을 내리고자 했다면 교율청의 사람을 보내면 될 일. 굳이 야외 수업이라는 형식을 빌려 자네들을 보자고 했겠는가?”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순간 헤데이안 학부장이 허공에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맺힌 마력의 빛살이 복잡한 도형과 회로로 술식을 그려 냈을 때.

커다란 마법구(魔法球) 하나가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소환되고 있었다.

화르르르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

학부장이 펼쳐 낸 독특한 마력의 결을 읽어 낸 루인의 두 눈에 기이한 이채가 감돌았다.

‘구유의 불?’

그것은 다름 아닌 헤이로도스의 마법인 구유의 불.

하지만 완벽히 이해하고 펼친 수준은 아니었다.

술식의 겉면만 흉내 내는 정도.

“자네도 이 화염을 일으킬 수 있겠지?”

루인은 참을 수 없는 의문을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자네가 헤이로도스의 술식 변환을 펼치고 있는 광경을 내 직접 보았네.”

시론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학부장의 백발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실험실의 창문 밖에서 아른거렸던 그 백발의 정체가 학부장이었다는 것을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또한 대전투장의 조사를 끝마쳤네. 자네의 디스펠 술식이 미치지 못한 공간에서 잔존 마력을 읽어 낼 수 있었지.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네.”

“…….”

루인이 침묵하자 헤데이안 학부장의 희열에 찬 눈빛이 쏘아졌다.

“루인 라이언 생도. 자네는 역시 위대한 헤이로도스의 마법을 완벽하게 전승한 것인가?”

완벽(完璧)?

마도에 몸담고 있는 마법사가 함부로 언급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그럼에도 학부장은 루인의 마법에 대해 서슴없이 완벽이라 칭하고 있었다.

“학부장님처럼 그저 흉내나 겨우 내는 수준입니다.”

“프하하하핫!”

루인의 기똥찬 대답에 헤데이안 학부장이 허리가 꺾어질 정도로 웃고 있었다.

감히 르마델 왕국의 현자가 펼쳐 낸 마법더러 어설픈 수준이라 평가하다니!

하나 그 말은 분명 자신이 펼쳐 낸 마법의 수준을 읽어 냈다는 뜻.

한데 그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구유의 불을 바라보고 있던 루이즈가 천천히 걸어가 화염과 어울렸다.

“아으……!”

스스스스스-

구유의 불이 기다랗게 찢어지더니 루이즈의 작은 손바닥 위로 모여든다.

술식의 영향을 벗어난 마력이 제멋대로 움직이자 학부장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래! 이 아이였군! 이 아이였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법을 시전한 당사자의 술식을 아무런 저항 없이 헤집을 수 있다니!

이런 강력한 동조 감응의 능력자는 살아생전 처음이었다.

헤데이안 학부장은 찬찬히 목소리 생도들을 훑어보았다.

루인, 시론, 세베론, 다프네, 리리아, 슈리에.

풍겨 오는 마력의 결을 살펴봐도 대부분 3위계 이상의 경지가 느껴지는 천재적인 생도들.

게다가 저 동조 감응의 생도에겐 마법의 위계를 평가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교수님들은 이리 모여 주시게.”

“예! 학부장님!”

“네.”

교수들이 모이자 헤데이안 학부장이 참았던 속내를 드러냈다.

“나는 저 생도들의 등급 시험을 생략할 작정이네.”

게리엘도스 교수가 멍한 얼굴로 굳어졌다.

“하, 학부장님?”

경악한 표정의 헬렌 교수가 금방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 그런 일은 전례가 없어요! 아카데미의 전통, 교칙을 부정하는 행위예요!”

“학부장의 직권, 거기에 교수들의 전원 동의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아니 그런 일에 어떻게 저희가 동의를……?”

헤데이안 학부장의 시선이 머나먼 창공을 향했다.

“더 이상 지상(地上)에 있을 필요가 없는 녀석들이라는 걸 자네들도 느끼고 있지 않은가? 감히 자네가 헤이로도스의 전승자를 평가할 수 있겠는가? 저 동조 감응의 생도는?”

“그래도…….”

“저런 녀석들에게 무등위 생도 시절의 학점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자네들은 궁금하지도 않은가? 헤이로도스의 마법을 이은 녀석의 무투대회 말일세.”

학부장과 교수들의 실랑이를 바라보던 생도들은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학부장이 직접 나서서 교수들에게 부정 청탁을 하다니?

루인이 학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선이 모이는 건 싫습니다.”

자신들에게 이런 어마어마한 특혜가 주어진다면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질 것이다.

“이 학부장이 직접 나서는 일일세. 더욱이 학점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건 자네들의 염원이 아닌가? 더욱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을 텐데?”

“…….”

“그냥 내 호의를 받게. 다 좋은 게 좋은 거야.”

충분히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루인은 불안했다.

이런 먹음직한 제안을 내밀고 그가 무엇을 얻으려고 할지 너무 뻔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학부장의 작은 요구 사항이 있네.”

드디어 올 것이 온 건가.

하지만 이어진 학부장의 말은 루인이 예상한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이 헤데이안이 목소리 그룹의 지도 교수를 맡겠네.”

“…….”

단순히 헤이로도스의 마법 시연 요구나 전투 연습의 참관을 예상했었다.

한데 지도 교수라면 말이 달랐다.

루인이 단칼에 거절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무런 커리큘럼 없이 자유로운 수련을 위해 선택한 그룹이었다.

한데 누군가의 간섭, 더구나 그 주체가 헤데이안 학부장이라면 루인은 이 그룹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내일 당장 ‘허가권’을 발급해 준다 해도?”

“허가권이라니요?”

헤데이안 학부장이 왕국의 하늘, 머나먼 허공을 응시했다.

“등급 생도들의 진짜 아카데미. 위장용이 아닌, 저 하늘에 있는 진짜 아카데미의 출입 허가권 말일세.”

이어진 헬렌 교수의 날카로운 비명.

“학부장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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