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85화 (85/187)

<85화>

늘 그랬던 것처럼 루인은 심상에서 깨달은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장미 정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한데 기이한 작열감을 동반한 두통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실험실에서부터 조금씩 통증이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야가 어지러울 정도로 고통이 심해진 상태.

결국 루인이 비틀거리자 쟈이로벨의 걱정 어린 영언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음…….”

루인은 흑암의 공포로 군림해 온 대마도사.

웬만한 고통으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녀석이 신음까지 흘리며 비틀거리고 있으니 쟈이로벨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잠시 벤치에 앉은 루인이 천천히 자신의 육체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융합 마력을 끌어올리며 혈주신의 권능으로 치환, 그렇게 끌어올린 마력을 이내 온몸으로 흘려 보냈다.

체내의 모든 장기와 근육들은 정상, 혈류 역시 정상이었다.

심장은 차분히 뛰고 있었고 육신 전체가 활기로 가득했다.

너무 완벽하게 건강해서 다소 당황스러울 정도.

그렇다는 건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데 그건 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루도 심상 수련을 빼먹지 않고 있는 루인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누구보다 객관화하고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서 루인은 회귀 초기보다 훨씬 심적으로 안정된 상태.

심상 수련을 하는 내내 조급한 목표를 버리고 마음을 다스려 온 것이다.

루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를 통째로 달궈 오는 이 미칠 듯한 두통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가 갑자기 이런 두통이 밀려온다는 것은 오늘의 심상 수련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건데…….’

그때, 쟈이로벨의 영언이 다시 들려왔다.

-아까의 심상을 더 이어 가 봐라. 뭔가 집히는 게 있다.

이렇게까지 쟈이로벨이 진지하게 말한다면 가벼운 감은 아닐 것이다.

루인이 산책을 뒤로하고 다시 실험실을 향했다.

* * *

모두 기숙사로 되돌아갔는지 실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루인이 자리를 잡고 앉으며 곧장 심상에 빠져들었다.

순간적으로 육체의 감각이 둔해지며 점차 정신이 확장된다.

금방 가상의 공간, 이미지의 세계를 구축한 루인이 담담하게 읊조렸다.

<말해 봐. 이제 뭘 하면 되지?>

-아까 전에 했던 마력 칼날 수련을 계속 이어 가 봐라.

최근 들어 루인이 가장 파고들고 있는 마법은 헤이로도스의 술식 변환.

루인은 그런 술식 변환으로 분열된 마력 칼날들을 단순히 쏘아 보내는 데 그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장점인 염동력을 활용해 좀 더 통제하고 싶어진 것이다.

물론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연산력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완성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차원의 마법을 개척하는 셈.

수천 개의 마력 칼날을 의지대로 부릴 수 있다면 전장에서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츠츠츠츠츠-

술식 변환으로 분열되기 시작한 마력 칼날이 순식간에 백 개, 천 개로 불어났고.

흑암의 공포가 갈고닦아 온 회로 연산력과 만 년 이상 축적된 그의 염동력이 그대로 복잡한 술식에 스며들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강렬한 언령.

<천변(千變)의 칼!>

대마도사의 절대적인 의지가 입으로 흘러나와 심상의 세계로 퍼져 나간다.

루인의 융합마도식(融合魔道式)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갖게 된 술식, 천변의 칼이었다.

우우우우웅-

모든 마력 칼날이 미세한 떨림을 머금기 시작했다.

마력과 염동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정신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탈력감이 몰아쳤지만 루인은 이를 악다물었다.

아까 전처럼 여기서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면 또다시 술식의 완성은 물 건너가게 된다.

마침내 마력 칼날들의 떨림이 멈추자.

휙휙휙-

마치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검처럼 매서운 위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엄청난 연산으로 인해 뇌가 통째로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

아득해진 정신, 그렇게 혼절 직전까지 내몰린 루인에게서 광기의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만 멈춰라! 죽고 싶은 것이냐?

자칫 정신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저렇게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 인간이라니!

이윽고 루인이 연산과 염동을 멈추었다.

술식이 잦아들어 마력 칼날들이 천천히 허공에서 분해되고 있을 때 루인의 입에서 아쉬움이 흘러나왔다.

<지금으로선 고작 이 정도란 말인가.>

자신의 모든 역량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얻은 지속 시간은 불과 4초.

아예 수확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마음에 차는 결과까지는 아니었다.

마력과 염동력, 회로 연산력, 술식의 구성력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역량을 지닌 루인이었지만 4위계라는 마법의 경지가 발목을 잡고 있었다.

-미친놈! 애초에 고작 네 개의 고리로 이런 지고의 술식을 구성하는 시도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네놈에게 만 년 이상 축적한 염동력이 없었다면 술식을 맺는 즉시 피를 토하고 죽었어야 정상이다!

<신소리 그만하고. 그래, 뭐가 문제인 거지?>

다시 작열하는 두통 때문에 심상의 세계가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비록 위험한 도박을 벌이긴 했지만 아직도 루인은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쟈이로벨이 다시 영언으로 말했다.

-네 연산력과 염동력의 이상으로 일어난 현상은 아닌 것 같다. 확실히 마법 자체는 이상이 없다는 뜻이지.

감상은 짧았지만 내심 쟈이로벨은 놀라고 있었다.

놀라운 술식 구성력과 융합 마력의 치환 과정, 염동으로 마력를 통제하는 방식, 순간적으로 술식을 장악하는 언령 등.

그야말로 모든 면이 원작자인 헤이로도스의 지혜 이상이었다.

완성도만 따진다면 마신인 자신의 흑마법과도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

하지만 단 한 가지 걸리는 것.

방금 루인이 펼친 술식은 역설적이게도 ‘마법사의 마법’이 아니었다.

-특이할 만한 건 네놈이 통제하는 마력 칼날의 움직임, 그 자체다.

<무슨 뜻이지?>

-마력 칼날들의 움직임에서 네놈의 역량과 성향이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혈주투계를 익히고 있는 너라면 분명 지극한 효율을 추구할 텐데 그런 효율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이건 혈주투계도 뭣도 아니지 않느냐?

순간 루인은 소름이 돋았다.

마력 칼날들을 통제하는 것에만 집중했지, 놀랍게도 마력 칼날들을 어떤 움직임으로 유도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

궤도, 관성, 가속 등에 따라 연산하는 방식이 모두 달라진다.

그런 움직임을 유도했다면 그에 알맞은 연산과 염동이 뒤따랐을 것인데, 직접 펼치고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정도까지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구사한다는 건 틀림없는 네놈의 잠재의식이다. 한데 마치 어떤 검술을 펼치는 듯한 느낌이었지. 혹시 혈주투계 외에 다른 검술을 익히고 있느냐?

익히고 있는 검술은 없었다.

과거, 검성을 비롯한 동료들의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직접 몸으로 익힌 건 혈주투계뿐.

-네놈의 치밀한 감각을 무시하고 구현되는 마법이라면 의식의 발현 외에는 설명되지 않아. 그리고 그런 마력 칼날의 움직임들은 명백한 검술(劒術)이었다.

그때.

루인이 크게 놀랐다.

<설마 그분…… 사홀 님의 검술이란 말인가?>

사홀 르마델 비셰리스마 베른.

그의 사념에 의해 강제로 의식에 새겨져 버린 절대적인 검술.

아무리 다시 떠올리려 해 봐도 도저히 심상으로 맺히지 않아 방치하듯 내버려 둔 심득이었다.

이제는 한없이 아득하고 희미해져 간헐적인 파편조차 떠오르지 않건만.

당연히 루인은 너무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썩을!

뒤틀린 심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쟈이로벨의 영언.

어쩐지 묘하게 거슬린다 했더니 역시 사홀 놈이 루인의 의식에 새겨 넣은 검술의 파편이었던 것이다.

-…….

루인이 서클을 늘리며 더욱 드높은 경지에 다다른다면?

결국엔 그 찢어 죽일 놈의 검술이 다시 세상에 구현되는 꼴이었다. 그것도 검술이 아닌 마법으로.

게다가 자신의 계약자나 마찬가지인 루인의 능력을 빌려 구현된다니!

<그런데 이 지독한 두통과 그 일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거지?>

-흥! 네놈이 이해하고 발휘한 능력이 아니지 않느냐? 잠재된 의식을 함부로 꺼내 썼으니 당연히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다.

<거지 같군.>

화아아악-

심상 세계를 빠져나오며 이미지를 끝낸 루인이 거칠게 얼굴을 구겼다.

이번 일로 자신의 마법이 어떻게 얼마나 변질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또다시 통제할 수 없는 변수를 안고 살아가야 하다니.

-마력 칼날의 통제는 당분간 자제하는 것이 좋을 거다. 지금의 경지로는 감당할 수 있는 술식이 아니야.

강대한 융합 마력에 어울리지 않는 네 개의 고리.

고리를 일곱 개 정도까지 늘리는 건 지금이라도 당장 가능한 일이었지만 루인은 끈질긴 인내력으로 참아 냈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불안정한 고리가 얼마나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는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

대마도사의 의식과 지혜를 지녔다지만 엄연히 과거의 육체였다.

단계를 밟아 나가지 않고 단숨에 극복하려 든다면 그릇이 부서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 네놈의 가문에는 좋은 일이 아니냐?

쟈이로벨의 말대로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미지의 검술은 가문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시조의 유산.

더욱이 초인을 아득히 능가하는 초월자의 검술이었다.

만약 자신의 마법으로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이 일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역시 문제는 직관적으로 받아들인 지혜가 아니라 잠재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지혜라는 것.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는 더 복잡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통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실험실의 문이 열렸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온 시론.

그가 루인을 보자마자 소름이 돋는다는 듯 야릇한 표정을 했다.

“와 씨. 벌써 준비하고 있었던 거냐?”

기숙사에서 간단한 정비를 마친 후 식사도 대충 끝내고 곧장 실험실로 뛰어왔다. 그럼에도 루인을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루인이 창밖의 시계탑을 바라보더니 묵묵하게 일어났다.

“식당에 다녀오겠다.”

“응? 아직 안 먹은 거였냐?”

시론이 마치 승리자라도 된 듯이 기이하게 웃고 있었다.

“금방 먹고 오겠다.”

“하하! 천천히 와도 돼.”

시론이 여유롭게 자리에 앉으며 이미지 자세를 취했을 때.

드르륵-

시론에 이어 실험실에 도착한 생도는 다프네였다.

“안녕하세요?”

“어? 벌써 수업을 다 들었다고?”

최근 목소리 생도들 중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다프네.

아무리 그녀가 입탑 마법사라지만 마법학부의 학점을 채우는 건 단순히 실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엔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마탑에서는 겪을 수 없었던 두근거림이 이 마법학부에는 있었다.

“혹시 헬렌 교수님을 만나 보셨나요?”

다프네의 질문에 시론이 고개를 저었다.

“마도학 개론 수업은 아직 멀었잖아? 왜?”

“아, 복도를 지나다가 우연히 헬렌 교수님을 만났는데…….”

“만났는데?”

다프네가 루인을 쳐다봤다.

“조만간 우리 목소리 생도들만 따로 수업을 진행할 거라고 하더군요.”

“우리들만 따로? 왜지?”

“모르죠. 야외 수업이라던데.”

“야외 수업?”

온갖 마법 이론을 머릿속에 욱여넣는 것만으로도 벅찬 무등위 생도들에게 한가로운 야외 수업이라니?

분명 야외 수업은 등급 생도들의 전유물이다.

게다가 목소리 생도만 따로 수업을 하는 저의는 또 뭐지?

“우리 대응 계획에 없던 일인데 낭패로군. 루인, 뭐 집히는 거라도 있나?”

실험실을 나서던 루인이 뒤를 돌아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호기심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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