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84화 (84/187)

<84화>

한 인간, 한 가문의 자유 의지를 구속하거나 희생을 강요할 땐 국가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가 신하에게 작위와 봉토를 내어 주고 권력을 부여하는 이유.

에기오스가 한 명의 마법사가 아니라 왕국의 대리자로서 이 자리에 왔다면 그 점을 확실하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정말 드래곤이라는 건가……!’

왕국의 쟁쟁한 공신들과 대귀족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온 에기오스는 기세에 민감했다.

저 물빛처럼 투명한 루인의 두 눈에선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니고 있어야 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담담한 눈빛.

지극히 차분한, 일체의 흐트러짐 없이 직시해 오는 녀석의 눈빛에 전율이 치밀 정도다.

마치 사자왕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

에기오스는 찻잔을 쥔 자신의 손이 떨리는 이유가 마나번 때문인지 저 눈빛 때문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 나라 무력의 정점에 서 있는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거기에 백룡 비셰리스마일 가능성까지.

그런 압도적인 기세에 결국 에기오스는 두려움에 두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자네의 오해라네. 이 르마델 왕국이 아카데미 생도의 힘을 빌릴 만큼 몰염치한 나라는 아닐세.”

그제야 루인은 천천히 기세를 지웠다.

흑암마도안(黑暗魔道眼)은 전생에서도 즐겨 썼던 것으로, 협상의 우위에 많은 도움이 되는 수법이었다.

진마력이 아닌 융합 마력으로 펼친 것이었지만 다행히 반응을 보니 오히려 효과가 더 좋아진 모양.

“그럼 이 하찮은 생도의 마법을 왕국의 운명에 결부시킨 이유는 무엇입니까.”

에기오스는 숨이 턱 하고 막히는 심정이었다.

욕심은 사실이었다.

만약 루인이 현자급의 마력을 보유한 절대적인 천재, 혹은 백룡 비셰리스마가 확실하다면 보다 명백히 왕국의 영향력 아래 귀속시키려 했으니까.

<눈치 하나는 빠른 사람이로군.>

자신이 펼친 마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묘한 루인의 어감.

하지만 확실하게 선을 그어 오는 루인의 태도에 압도되어 버렸다.

에기오스는 차마 다시 입을 열지 못했다.

“하실 말씀이 없어 보이시는군요.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루인이 망설임 없이 일어나 연구실의 문을 열려고 들자.

“자, 잠깐! 기다리게!”

루인이 무심한 눈으로 에기오스를 돌아보았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더 이상 속내를 감추지 마십시오.”

“알겠네. 앉게.”

루인이 다시 앉자 에기오스는 참았던 속내를 겨우 드러냈다.

“왕국의 기대가 부담스럽다면 마탑으로 하지. 우리 마탑의 일원이 되어 줄 수 있겠는가?”

루인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럼 처음부터 그럴 것이지, 언제는 이 바보 같은 아카데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더니 이제 와서?

뒤늦게 입탑 마법사를 제안하는 에기오스가 못마땅했는지 루인은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글쎄요.”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오히려 이제는 마법학부의 생활이 더 익숙하고 편했다.

특히나 아무런 커리큘럼도 없는 ‘목소리’ 그룹은 자신의 기량을 회복하기에 그야말로 최적의 공간.

원한다면 언제든지 지혜의 라이브러리에서 백마법의 지혜를 열람할 수 있었다.

원하는 수업만 골라서 청강할 수 있기에 몸을 단련할 수 있는 시간도 더 많아졌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교수와 생도들의 시선에서 더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학점만 재빠르게 쌓는다면 남는 시간을 오로지 실험실과 운동장, 도서관에서 보낼 수 있는 최고의 환경.

이런 좋은 환경을 버리고 이제 와서 온갖 간섭과 시선으로 머리가 복잡할 마탑을 선택한다?

보나 마나 헤데이안 학부장이나 이 에기오스 같은 노인네들로 득실득실할 마탑이다.

그런 노인네들의 끈질긴 호기심을 견딜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전 졸업을 할 겁니다.”

그래도 일단은 르마델 왕국의 현자이자 마탑주.

굳이 에기오스와 척을 지거나 거리를 느끼게 할 필요는 없었다.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수 있다면 차라리 적당한 기대감과 희망을 주는 편이 옳았다.

“무, 물론일세. 생도로서 무사히 아카데미를 마쳐야지. 당연히 입탑(入塔)은 그 이후일세.”

모든 생도들이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 입탑의 기회.

그런 입탑의 기회를 협상의 조건으로 삼을 수 있다니.

루인은 새삼 자신이 창안한 융합 마법의 위력을 실감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루인은 최대한 이기적으로 굴 생각이었다.

과연 그런 불합리를 마탑주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마탑주님의 권위로 무투대회의 일정을 조금 조정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투대회……?”

“네. 저와 함께 목소리 그룹에 속한 생도들이 무투대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업과 훈련을 한꺼번에 소화하기엔 일정이 너무 촉박합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무투대회를 준비해 온 등급 생도들과의 격차가 너무 심했다.

이제 워메이지의 기본 소양을 닦아 가고 있는 목소리 생도들.

그런 생도들의 실력 문제도 있었지만 협력 전투의 경험이 전무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대로 몇 달 뒤에 벌어질 무투대회에 참가한다면 결국 자신의 원맨쇼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단체전을 포기하고 개인전에만 집중하는 편이 옳은 것이다.

루인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자신을 어느 정도까지 마탑에 붙잡아 두고 싶은지, 그런 현자의 마음을 가늠하면서.

“마탑주가 학부의 행사까지 개입할 순 없네. 하지만…….”

에기오스가 희미하게 웃기 시작한다.

“장담하지. 이 내가 헤데이안을 반드시 움직여 보겠네.”

에기오스는 헤데이안 학부장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루인이 무투대회에 참가하겠다는 사실을 듣는 순간 눈을 뒤집으며 기대와 열망에 빠져들 위인.

그런 헤데이안을 설득하는 일이란 빵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 않은가?

“일정 변경이 가능하단 얘깁니까?”

가볍게 던져 본 말을 단번에 수락해 오니 루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대한 건 아니었다.

왕립 아카데미의 무투대회.

상징성, 의미, 후원 규모 등 충분히 왕국의 중추적인 행사에 속했다.

그런 거대한 규모의 행사가 한낱 생도의 말에 일정이 변경될 수가 있다니.

-저 현자 놈은 그 다프네란 아이를 네놈에게 붙인 당사자가 아니냐? 너를 드래곤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루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자신을 드래곤이라고 철석같이 믿어 버렸다면 이 정도의 반응이 무리는 아닌 것이다.

“다만 일정의 변동 폭이 크진 않을 걸세.”

“저희가 1등위에 오른 이후면 족합니다.”

“그 정도라면 한두 달이 아닌가?”

“초봄 이후면 좋겠습니다.”

에기오스가 수염을 쓸며 말했다.

“좋네. 변경된 일정은 추후 통보해 주겠네.”

“그럴 필요까지 없습니다. 어차피 무투대회의 일정이 변경되면 학부에 공지할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허허.”

이제야 여유를 되찾았는지 에기오스의 표정이 한결 보기 좋게 변해 있었다.

“다른 용무가 없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알겠네.”

루인이 연구실을 나가자 에기오스의 얼굴에도 짙은 기대감이 서렸다.

녀석의 무투대회라니.

에기오스는 벌써 그날이 기다려졌다.

*  *   *

덜컥-

실험실의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오는 슈리에.

“소, 소식 들었어요?”

시론이 심상에서 깨어나며 인상을 썼다.

“이미지 중인 거 안 보이나?”

“아, 죄송해요! 하지만 급한 일이라!”

슈리에에게 아직 듣지 않았지만 루인은 그녀의 말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무투대회의 일정 변경이 공지된 모양이군.”

“어? 어떻게?”

슈리에가 의문으로 굳어졌을 때 시론이 벌떡 일어났다.

“뭐? 변경? 그게 언제지?”

“내년 3월. 봄 방학 이후로 변경되었어요.”

“갑자기?”

처음엔 놀랐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학점 채우기와 등급 시험의 대비로 바쁜 와중에, 무투대회 준비까지 병행하려니 몸과 마음이 함께 병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시론이 환하게 웃었다.

“차라리 잘됐다! 시간을 번 셈이야!”

루인도 자신의 요구를 정확하게 들어준 에기오스가 가상했다. 하지만 생도들에게 티를 내진 않았다.

“고작 조금 늦춰졌을 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린 하던 대로 한다.”

리리아가 루인을 쳐다봤다.

“그래도 시간을 번 이상 학점을 채우는 일에 더 중점을 두었으면 한다. 특히 다프네가 많이 급하다.”

인상을 찡그리는 루인.

1학기 수업이 전무한 다프네 때문에 항상 계획이 어그러졌다.

결국 루인은 다프네의 역량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너와 겹치는 수업이 없다. 단독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알아서 학점을 채울 수 있겠나?”

“물론이죠. 두 달이면 충분할 거예요.”

“훈련까지 불참하라는 뜻은 아니야.”

“…….”

다프네가 축 처진 어깨로 다시 이미지를 시작하자 시론이 창가 쪽을 흘깃 쳐다봤다.

“저 녀석들은 어떡할 거지?”

시론의 시선이 가리키고 있는 창가엔 낙제생 커플이 앉아 있었다.

자꾸만 눈에 밟히니 시론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던 모양.

“어차피 도태될 애들이다. 우리가 뭘 한다고 어떻게 될 일이 아니야.”

냉정한 리리아의 대답.

시론이 의외라는 듯 리리아를 바라봤다.

“너 저 루이즈의 동조 감응을 직접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그래서? 그게 다다. 아무리 특별한 재능을 지녔어도 언령 자체가 봉쇄된 아이다. 그런 상태로 마법학부의 수업을 따라가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너, 어브렐가의 후예가 맞는 거냐?”

“무슨 소리지?”

시론이 더욱 황당한 표정을 했다.

“‘그분’의 이름을 미들네임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소리를 한다고?”

“그, 그건…….”

침묵의 마법사 드리미트.

벙어리로 태어났지만 절대언령(絶對言靈)을 깨우치며 대마법사로 거듭난 희대의 천재 마법사.

리리아가 그의 이름을 미들네임으로 갖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그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절대언령은…… 재능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언어적 한계를 초월해야…….”

그러다 루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리리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북극성처럼 시리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루인은 리리아의 어그러진 단면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누군가의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험담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리리아가 선조와 닮은 모습의 루이즈를 함부로 말한다는 건 하나뿐이었다.

“너. 가문을 증오하고 있나?”

“뭐……?”

정상적인 드리미트의 후예였다면 루이즈를 오히려 축복하고 응원해 줘야 마땅하다.

선조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결코 저런 한심한 말들을 내뱉을 수 없을 테니까.

“가문의 마도(魔道)를 부정하고 남부의 학파를 따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

“너! 함부로……!”

순간 루인의 눈이 따뜻한 빛을 머금었다.

“너를 좀 더 알게 되었군.”

의지가 강한 눈빛, 드높은 열정을 지닌 소녀다.

그런 리리아가 저토록 힘겹게 견디고 있다면 그 상처는 무척이나 깊고 아릴 것이다.

하지만 상처를 극복하고 일어서는 건 스스로의 문제.

특히 혈족과 가족의 문제는 타인이 함부로 간섭할 일이 아니다.

“친하게 지내.”

“누구……?”

루인이 루이즈를 응시했다.

“루이즈는 네가 마음에 드는 것 같은데.”

루이즈가 환하게 웃으며 리리아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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