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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83화 (83/187)

<83화>

루인 일행은 전략적으로 수업을 청강하며 착실하게 모자란 학점을 채워 갔다.

물론 그 와중에도 생도들은 루인의 체력 단련 스케줄을 치열하게 소화해 냈다.

루인이 보여 준 대마법 전투의 충격.

그만큼 워메이지의 전설을 경험한 것만 같은 그때의 일들은 생도들에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장면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치열한 수련도 보름이 넘어가자 그들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근력도 붙어 가는 것 같았고 점차 호흡도 편해졌지만, 이 달리기가 과연 워메이지의 능력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던 것.

그들이 아는 체술은 이런 달리기 따위가 아니었다.

좀 더 체계적인 움직임과 절묘한 동작 등.

구체적인 뭔가를 기대했던 생도들로서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허억! 허억! 루인! 잠깐 거기 서!”

달리기를 멈춘 루인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시론을 흘깃 쳐다봤다.

“견디기 힘들면 그만해도 좋다.”

“아, 그게 아니라!”

바닥에 주저앉은 시론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 달리기가 대체 워메이지 수련법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하악…… 하악……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시론과 다프네를 번갈아 쳐다보는 루인의 무심한 두 눈.

루인은 간단한 연계 동작을 금방 머릿속에 그렸다.

“날 잘 봐라.”

파팟!

날카로운 정권, 그리고 이어지는 두 차례의 훅.

땅으로 꺼지듯이 뒤로 물러나다 그라운드를 파고드는 묵직한 진각.

쿵!

보폭 이상으로 넓게 롤링하며 솟구치는 어퍼.

슉!

거칠게 어깨를 흔들며 부딪치는 몸통 박치기.

매서운 풋워크로 전진한 후 바람 소리가 들려올 정도의 강력한 파워 블로우.

팍!

마지막으로 곧게 선 채로 양팔을 교차하는 가딩까지.

그렇게 루인은 최대한 천천히 간단한 연계기를 생도들에게 보여 주었다.

“후…….”

깊게 호흡을 내뱉던 루인이 시론을 응시했다.

“모두 기억했나?”

“뭐, 그 정도는.”

시론이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럼 해 봐라. 단, 그 모든 걸 한 호흡으로 끝내.”

“뭐? 한 호흡?”

난감하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시론.

분명 단조롭긴 했지만 제법 큰 동작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연계기였다.

그런 큰 동작들을 무호흡으로 연계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던 것.

“알았다.”

슈슉!

아니나 다를까.

몸통 박치기를 끝낸 후 풋워크로 이어지는 시점에서 시론은 참았던 호흡을 내쉬고 말았다.

“푸핫!”

당황한 듯 흔들리고 있는 시론의 두 눈.

하지만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후우…… 왜 굳이 한 호흡으로만 움직여야 하지?”

루인은 그렇게 묻는 시론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넌 마법사가 아닌가?”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지켜보고 있던 다프네가 가장 먼저 루인의 의도를 읽었다.

“아! 모든 동작을 한 호흡으로 통제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뭔데?”

다프네가 시론을 바라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호흡을 통제하지 못하면 마법사의 가장 중요한 무기 중 하나인 언령(言靈)이 봉쇄되잖아요?”

“뭐?”

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일반적인 무투가나 기사가 아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호흡을 조절할 수 있지만 마법사는 전투 중에도 마법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는 시론.

과연 호흡을 통제하지 못하면 언령을 발휘할 수 없고, 이는 언령이 필요한 모든 술식을 염동력으로 치환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마법사의 염동력은 무한한 자원이 아니다.

오히려 마력보다 더욱 빠르게 고갈되는 것이 염동력.

염동력의 소비가 지나치게 과도하면 정신 붕괴나 정신 폭주의 위험성이 더욱 커지게 된다.

“워메이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폐활량이다. 언령을 봉쇄한 채로 전투에 임할 것이 아니라면 기사들을 압도하는 폐활량을 지녀야 하지.”

언령은 마법사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직관적인 무기.

그런 강력한 무기를 접고 전투에 임한다는 건 오히려 마법사의 장점이 상쇄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쉼 없이 달리는 이유다.”

저 무시무시한 염동력을 보유하고 있는 루인조차 언령의 발휘를 위해 이렇게 매일매일 달리고 있었다.

수십 바퀴를 달려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녀석의 호흡.

시론은 새삼 루인의 무서운 근성에 감탄했다.

그것은 마법사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순수한 경외심이었다.

“넌 정말…… 그냥 미쳤군.”

이 가벼운 달리기가 그런 엄청난 의미였다니.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시론의 반응에 함께 주눅이라도 든 듯 세베론이 허탈하게 자조했다.

“하…… 그럼 도대체 언제까지 달려야 해?”

루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당연히 일평생이다. 폐활량은 인간의 수명과 함께 감소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지. 여건이 허락한다면, 아니 시간을 쪼개서라도 계속해야만 하는 수련이다.”

“아…….”

“하아…….”

생도들은 루인의 냉담한 목소리가 마치 지옥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이 힘든 달리기를 평생 동안 하라니.

시론은 그 아득한 심정에 벌써 폐가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저녁에는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

드디어 수련이 끝났다는 안도도 잠시, 따로 할 일이 생겼다는 루인의 말에 생도들이 더욱 긴장하기 시작했다.

“또 무슨 수작이지?”

“아드레나가 다녀갔다.”

“응? 아드레나?”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시론이 이내 루인을 졸졸 따라다니던 빨간 머리의 여생도를 생각해 냈다.

“그 애가 왜? 뭐 또 고백이라도 당한 건가?”

가늘게 미간을 좁히는 루인.

“게리엘도스 교수가 면담을 요구해 왔다.”

게리엘도스 교수는 목소리 그룹에 우호적인 태도를 지닌 몇 안 되는 교수.

“교수님이? 갑자기 왜?”

“모르지. 모두 식사와 개인 정비를 마친 후 심상 수련을 하고 있어라. 일단 나는 다녀오겠다.”

“알았다.”

*          *                 *

똑똑.

“루인입니다.”

-들어오게.

루인이 게리엘도스 교수의 연구실의 문을 열자 의외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기오스?’

기다란 흰 수염을 젖히며 차를 마시고 있던 현자 에기오스가 루인을 발견하고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루인이 연구실에 들어오자 게리엘도스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수업 준비 때문에 나가 보겠습니다 마탑주님.”

“고생하시게.”

덜컥-

게리엘도스 교수가 나가자 에기오스가 루인에게 눈짓했다.

“앉게. 루인 생도.”

무심한 눈으로 서 있던 루인이 에기오스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마탑주는 시간적으로 그리 여유로운 자리가 아니다.

이렇게 직접 찾아올 정도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신지.”

“그래, 학부 생활은 어떤가? 지낼 만한가?”

“이미 빠짐없이 보고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게리엘도스 교수의 노골적인 간섭도 아드레나의 끈질긴 관찰도 모두 이 현자 에기오스 때문이라는 걸 루인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철저하게 감시해 왔으면서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빛을 하고 있으니 화가 치밀 수밖에.

“서면으로 보고받는 것과 당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은 명백히 다를 테지. 그 정도쯤은 자네도 알지 않는가.”

가문에서도 느꼈지만 에기오스의 화법은 묘하게 사람의 감정을 긁는 재주가 있었다.

현자라기보단 책략가, 혹은 산전수전을 겪어 온 귀족에 가까운 느낌.

말을 길게 섞어 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에 루인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용건이 있으시다면 터놓고 말씀해 주시죠.”

“터놓고라. 좋지.”

에기오스는 다시 차를 한 모금을 들이켰다. 한데 지나치게 손을 떨고 있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숨기더니 특유의 담담한 화법으로 말했다.

“미리 말해 두네만 자네를 책잡으려는 것이 아니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네를 교칙으로 구속하거나 그 일을 빌미로 불합리한 요구를 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네. 그러니 솔직하게 대답해 주게.”

힘겹게 찻잔을 내려놓은 에기오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왕립 대전투장 16관에서 자네의 마법이 발휘된 적이 있는가?”

그 일을 에기오스에게 들을 줄은 몰랐는지 루인은 순간 당황한 티를 낼 뻔했다.

한데 어감이 묘했다.

생도들과 대마법 전투를 벌였던 것을 묻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마법이 발휘된 적이 있느냐니?

이건 어느 정도 확신이 섰다는 말인데, 분명 모든 술식흔을 깔끔하게 지웠던 루인으로서는 충분히 당황할 만한 일이었다.

일단 루인은 부정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석 마도학자의 세심한 조사가 이미 끝났네. 대마법 전투가 일어난 흔적은 사라졌지만 대규모 디스펠 마법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네.”

“…….”

루인이 차가운 눈빛만 빛낼 뿐 아무런 대답이 없자 에기오스는 더욱 조급한 속내를 드러냈다.

“우리 왕국의 운명과 직결된 사안이네. 정말 솔직히 대답해 줄 수 없겠는가?”

왕국?

생도들의 대마법 전투를 왕국의 행사와 연결 짓는다?

그런 에기오스의 의도를 루인은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가 힘듭니다.”

“후우…….”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던 에기오스가 더욱 깊은 눈빛을 빛냈다.

“루인 생도.”

“말씀하십시오.”

“이 현자 에기오스가 다른 경기장에서 실험을 해 봤다네. 그토록 광활한 범위에 마력을 흩뿌려 내고 그 전역을 디스펠 술식으로 직접 덮어 봤단 말일세.”

그때 에기오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 결과가 이걸세.”

덜덜.

힘겹게 떨려 오는 에기오스의 손.

“마나번에 이은 정신 착란이네. 이 마탑주가 마력과 염동력을 몽땅 소진해 버렸단 말일세.”

그러나 루인의 두 눈은 여전히 물빛처럼 투명할 뿐이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정말로 자네의 마력이 이 에기오스의 것보다 더 깊고 너른 건가?”

“…….”

“제발 대답해 주게.”

-클클. 이 현자 놈. 그때보다 훨씬 더 달아올라 있구나.

쟈이로벨이 한껏 비웃고 있었다.

인간의 상식으로 루인의 마력을 이해하려 들면 곤란하다.

진마력에 근접, 아니 이미 능가하기 시작한 루인의 융합 마력은 서클과 같은 경지의 구분이 무의미한 지경에 다다랐다.

마력의 효율성과 순수성, 또한 절대적인 위력의 차이가 너무나 벌어진 것이다.

그 모든 게 자신의 핵(核) 오드로 루인이 이룩한 결과이니 쟈이로벨은 일종의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현자님이 그 정도로 타격을 입으셨다니 제가 묻겠습니다. 지금 제게 그런 걸 묻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루인이 자신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에기오스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미거하나마 이 왕국에서 현자라 불리는 몸이네.”

점점 진해지는 에기오스의 미소.

“자네의 마나 서클을 직접 살펴본 이 현자의 안목을 무시하지 말게 루인 생도.”

담담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침묵하던 루인.

그가 이내 비릿하게 마주 웃었다.

“눈치 하나는 빠른 사람이로군.”

왕국의 운명이니 뭐니 떠들어 댔으니 자신의 역량이 확실하다면 탐을 내고 있다는 뜻.

순수한 마법적 호기심이 아니라 이 흑암의 공포의 힘을 나눠 갖고 싶다면 결국 정치적인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하이베른가의 기사 전력이 아닌, 또 다른 힘을 왕국에 귀속시키고 싶다면 그대의 앞에 서 있는 이는 생도가 아니라 대공자요. 예의를 갖추는 걸 추천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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