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82화 (82/187)

<82화>

대낮임에도 왕립 대전투장 제16관은 을씨년스러웠다.

부서진 벽돌 더미.

앙상하게 드러난 기둥.

먼지로 새하얗게 변해 버린 관중석.

작은 돌조각 따위의 잔해들로 가득한 경기장까지.

푸시시식-

부서진 천장에서 부스러기가 흘러내릴 때 헤데이안 학부장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작하게.”

“예. 학부장님.”

학부장과 함께 도착한 네레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마탑의 수석 마도학자가 시약병에 붓을 담그더니 허공에 흩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리엘도스 교수의 두 눈이 그의 움직임을 바삐 쫓고 있었다.

수석 마도학자의 마력 추적법은 쉽게 볼 수 없는 희귀한 장면.

헬렌 교수의 눈동자에도 묘한 이채가 서렸다.

“약물이 촉매로 작용하나요?”

“평범한 약물이 아니겠죠. 적어도 보름 이상 마력으로 활성증류(活性蒸溜)를 거친 특수 시약일 겁니다.”

“보름 이상 마력 방출을 지속할 수 있다라…….”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인 이상 그 정도로 오랫동안 마력 방출을 지속할 수는 없다.

분명 장기간의 마력 방출을 가능하게 하는 특수한 아티펙트를 활용했을 것이다.

“마도학자가 귀한 이유죠.”

마도학자.

마법사로서의 경지도 일정 수준에 올라야 했지만, 다양한 마법 지식을 갖추는 것이 기본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직업이었다.

마도 연금술에 대한 이해, 룬 조합법의 시의적절한 활용, 폭넓은 마법진 응용력, 아티펙트 제작 능력, 그 밖에 소환술이나 천문학, 심지어 점성술까지…….

모든 마도 분야를 한 발씩은 걸치고 있어야 마도학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실생활에 쓰이는 아티펙트들은 대부분 마도학자의 손에서 창조된 물건들.

그들은 마법 세계의 대장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스스스스스-

공기에 닿은 시약이 반응을 하기 시작했을 때 마도학자 네레스의 마력이 흩뿌려졌다.

마력에 의해 기화된 시약 구름이 천천히 사방으로 뻗어 나가자 네레스가 신중하게 수인을 맺었다.

화아아아악!

이내 시약 구름이 잦아들었고.

새파랗게 맺힐 마력의 흔적을 기대한 네레스.

하지만 그는 미묘한 표정으로 헤데이안 학부장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학부장님. 이건 누군가가 먼저 손을 쓴 흔적입니다.”

“손을 썼다?”

“여기를 보십시오.”

네레스가 가리킨 방향에는 새파란 빛무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미처 지우지 못한 마력의 잔재입니다. 아마도 이 자리에 ‘방해 인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방해 인자라면?”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네레스의 수인이 다시 맺혔을 때, 그의 마력 스캔 마법에 의해 드러났던 빛무리가 붉은색으로 변했다.

한데 그런 붉은 흔적이 점점 확장되고 있었다.

스스스스스-

네레스의 술식이 끝났을 땐 거의 경기장 전체가 붉은 빛무리에 휩싸인 상태.

오직 방금까지 파랗게 빛나고 있던 자리만이 텅하니 비어 있었다.

헬렌 교수가 환상처럼 허공에 아른거리는 붉은 기운을 손으로 쓸며 물었다.

“이게 무슨 흔적이죠?”

마도학자 네레스의 얼굴이 무서운 것을 마주한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이 정도로 광활할 줄이야…… 이건 틀림없는 광역 디스펠의 흔적입니다. 단 한 번의 술식으로 이 경기장에 남아 있던 모든 마법의 흔적들을 한꺼번에 지워 버린 겁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불가능하진 않지만 아마도…….”

네레스의 눈이 헤데이장 학부장을 향해 힐끗거렸다.

“일단 한 번에 방출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이 어마어마해야 합니다. 그렇게 장시간 동안의 마력 방출을 견딜 수 있고, 또 방출한 마력을 한꺼번에 염동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마법사. 그런 현자급의 대마법사라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현자!”

이 르마델 왕국의 현자라면 마탑주 에기오스와 헤데이안 학부장 단 두 명뿐이었다.

이 경기장에 남아 있는 마법의 흔적을 추적하기 위해 몸소 나선 헤데이안 학부장은 당연히 아니겠고, 그럼 마탑주 에기오스가?

그런 의문의 시선들이 모두 헤데이안 학부장에게 모였을 때 그는 나직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이건 에기오스의 흔적이 아니야.”

평생을 에기오스와 라이벌로 얽히며 살아온 헤데이안 학부장이었다.

에기오스의 마력 구현법이라면 어쩌면 그 본인보다 헤데이안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에기오스는 의미 없이 마력을 낭비하지 않아. 오히려 효율적으로 술식을 쪼개어 구역마다 완벽을 기했겠지.”

“그럼 대체 누가……?”

이어진 게리엘도스 교수의 의문.

그러나 헤데이안 학부장은 붉은 빛무리가 사라진 곳, 마치 사람이 서 있는 형상처럼 이지러져 있는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가 말한 방해 인자가 동조 감응이었군. 누군가가 저곳에서 마력을 감응했네.”

“예 학부장님. 저 흔적이 아니었다면 아마 저는 이 디스펠의 술식흔(術式痕)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겁니다.”

“허허.”

현자급의 마력으로 펼친 광역 디스펠, 게다가 타인의 마력에 간섭할 수 있는 동조 감응의 보유자라…….

“과연 이게 무등위 생도들의 흔적이 맞을까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서 있는 헬렌 교수.

아무리 천재들이라지만 이건 그런 천재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흔적이었다.

“녀석들일 수밖에 없지.”

“네……?”

“허가받지 않은 장소를 함부로 출입하는 건 심각한 교칙 위반이 아닌가. 그런 흔적을 숨기고 싶어 하는 건 생도들의 당연한 심리일세.”

“하, 하지만 이건!”

“자네는 루인 생도를 잘 아나?”

“제 수업을 한 번…….”

빙그레 웃고 있는 헤데이안 학부장.

“잘 모르는군.”

곧 그가 아드레나를 바라본다.

“목격자는 없다고 했는가?”

아드레나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넵! 하지만 학부 관리실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대전투장 16관의 열쇠가 사라졌던 건 틀림없어요! 그 시간대의 출입 기록은 시론 생도밖에 없었구요! 또 사라졌던 열쇠가 다시 등장한 건 이튿날 시론의 출입이 있었던 후였습니다!”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네.”

열쇠를 가져갔던 것이 교칙 위반의 증거가 될 순 없다.

다른 열쇠로 착각했다고 둘러댄다면 더 이상 몰아세울 수 없을 테니까.

분명 이곳에서 마법 전투의 흔적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대규모 광역 디스펠이라니.

“역시 보통이 아닌 녀석이구나.”

루인 라이언.

도저히 생도로 치부할 수 없는 녀석.

“허허……!”

헤데이안 학부장의 입매가 비릿하게 비틀린다.

그의 두 눈이 어느덧 광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  *  *

이미지를 끝낸 생도들이 몰아세우듯이 루인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넌 마법을 익히기 시작한 때부터 체술도 함께 익힌 건가?”

“그래.”

생도들은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우리 르마델 왕국엔 워메이지(War mage) 학파나 가문이 없을 텐데?”

“우리 왕국뿐만 아니라 다른 왕국도 마찬가지지 않아요?”

“알칸 제국에서도 워메이지들이 활동한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머나먼 과거, 천년 전쟁의 시대에는 제법 많은 워메이지들이 활동했었다.

그들은 마법과 체술을 동시에 활용하며 화려하게 전장을 누볐다.

평범한 마법사를 압도하는 민첩성을 지닌 그들의 장점은 생존력.

대인전으로도 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었던 워메이지,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의 집단전이었다.

기사에 준하는 민첩한 전술적 움직임, 거기에 마법사의 화력이 시너지를 일으키자 기사단은 더 이상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전장을 지배하는 워메이지 군단은 천년 전쟁이 탄생시킨 가장 화려한 경이(驚異).

하지만 천년 전쟁이 종식되자 그런 워메이지의 전설은 금방 잊혀져 갔다.

사람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 법.

전장에서만큼은 엄청난 효율을 발휘했지만, 마법과 체술 어느 하나 궁극에 도달할 수 없었던 그들은 결국 도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서 워메이지의 수련법은 거의 사장되어 버린 분야.

당연히 생도들은 루인이 머나먼 과거의 유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러면 더 말이 안 되는데?”

“뭐가요?”

“아니 그렇잖아. 나와 다프네는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고 쳐. 워메이지의 수법에 당한 거니까. 그럼 리리아와의 대결은 도대체 뭐지?”

루인은 리리아를 상대하면서 단 한 번도 체술을 발휘하지 않았다.

녀석은 오직 마법으로만 리리아를 상대했다.

그것도 고도로 집중력을 발휘해도 모자랄 순간에, 저벅저벅 걸어가며 수인을 맺는 여유까지 보이면서.

시론에게 루인이란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세기의 미스터리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날 때부터 마법만을 익혔다. 그건 어브렐가도 마찬가지일 거다. 이런 우리의 마법이 워메이지의 마법을 당해 낼 수 없다는 게 말이나 돼?”

“아, 그건 루인 님이…….”

다프네는 ‘바보! 그는 드래곤이라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랬다간 저 드래곤에게 잡아먹힐지도 몰랐다.

지금도 저 눈빛.

정말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눈이다.

다프네가 어색하게 목소리를 집어삼키자 루인이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체술을 익히면 마법의 역량이 떨어질 거라는 건 착각이다.”

조각나듯이 뚝뚝 떨어지는 루인의 목소리에 슈리에는 순간적으로 오한이 치밀었다.

“그, 그건 착각이 아니죠. 엄연히 시간은 제한적인 자원이에요. 육체를 단련할 시간에 마법을 익힌다면 궁극에 다가갈 확률은 더욱 높아지죠. 그건 상식이에요.”

“상식?”

루인이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넌 하루 중 얼마나 마법에 매진하지?”

“수업 시간을 합해서요?”

“그래.”

곰곰이 생각하던 슈리에가 이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덟 시간 정도요. 수업 시간, 개인 이미지 시간, 라이브러리에서 보내는 시간을 모두 합했어요. 아, 물론 식사 시간과 휴식 시간은 제외했죠.”

“나보다 여섯 시간이 적군.”

“네……?”

생도들이 하나같이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루인이 이 마법학부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수면 시간은 고작 3시간.

식사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모조리 체력 단련, 학부 수업, 지혜의 라이브러리, 혹은 이미지였다.

휴식?

가뭄에 콩 나듯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장미 정원 산책’은 과연 진정한 의미의 휴식일까?

아니.

아마도 그는 그 짧은 순간조차도 심상에 빠져 있을 것이다.

가만 따져 보니 녀석은 고작 수면 시간 3시간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모조리 체술과 마법 수련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워메이지의 마법은 궁극에 다가갈 수 없다? 또 뭐? 시간은 한정된 자원이다?”

루인이 비릿하게 웃었다.

“바보 같은 놈들. 깨어 있는 시간을 늘리면 된다.”

“…….”

“…….”

“…….”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충격으로 굳어진 생도들.

기이한 각도로 비틀리는 시론의 고개.

“그렇네?”

“자, 잠을 줄이고 체력 단련을 하면 되는 거였어!”

워메이지가 이렇게 별것도 아닐 줄이야!

“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게…… 과연 맞나? 그게 맞아?”

“후후, 먼저 나아간 선배가 그렇다는데 맞겠지?”

“팍! 씨!”

시론의 위협에 세베론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아, 아니 왜! 언제는 반말하라며!”

그때, 루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시간이 한정된 자원? 그래. 엄밀히 따지면 맞는 말이다.”

실험실을 나서던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시간을 보내진 않아.”

덜컥-

루인이 밖으로 나가자 소름이 돋는다는 듯 시론이 몸을 떨었다.

그런데.

“어?”

분명 창문틀, 사람의 키만 한 높이에서 새하얀 뭔가가 휙 하며 사라졌다.

백발? 노인?

“혹시 너희들도 봤나?”

“뭘요?”

“……아니다.”

시론은 왠지 불길한 느낌으로 온몸이 오슬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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