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81화 (81/187)

<81화>

루인 일행이 논쟁에 가까운 토론을 계속 이어 나가자.

<그, 그만두지 못하겠어요? 당장 내 수업에서 나가세요!>

결국 루인 일행은 수업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실험실, 임시 그룹방에 다시 모인 ‘목소리’의 생도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세베론이 시론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것이었다.

“통했겠죠…… 아니 통했겠지?”

“물론이다. 헬렌 교수의 성향 분석은 이미 끝났다.”

다프네의 입가에도 미소가 아른거렸다.

“학파 대논쟁을 흉내 낸 이상 분명 우리들의 첫인상이 남달랐을 거예요. 당장은 화를 내고 계시지만 결국 다음 수업부턴 저희에게 온갖 질문이 이어지겠죠. 거기서 헬렌 교수에게 더한 만족감을 줘야 해요.”

헬렌 교수는 과제의 성과보다 능동적인 수업 태도에 더욱 후하게 점수를 주는 교수.

루인 일행은 전략적으로 치밀하게 헬렌 교수를 맞대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론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손쉬운 교수들의 과목부터 최대한 빨리 만점을 채워 간다. 무투대회에 참가하려면 등급 심사 따위는 단숨에 통과해야 해. 학점 따위가 무투대회의 걸림돌이 될 순 없다.”

고개를 끄덕이던 다프네가 리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방금 전……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나요 리리아?”

서로 논쟁하는 그림만 그린 상태로 수업에 참여했다.

헬렌 교수가 던질 수업의 화두를 미리 알지 못하는 이상, 세세한 논쟁거리에 대해서는 입을 맞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데뮬란 학파의 지성론은 나와 맞지 않다.”

다프네의 눈빛이 묘해졌다.

대부분의 마법 생도들, 아니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조차 데뮬란 학파의 마도론(魔道論), 즉 지성론을 따르고 있었다.

데뮬란 학파의 가르침이 정석적인 것도 있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대세이자 유행이었다.

반세기 전만 해도 네렐에우스 학파의 ‘근본주의론’이 주를 이루었지만, 데뮬란 학파의 지성론이 마법학회에 대두된 이후로는 한 번도 이 대세가 꺾인 적이 없었다.

“저는 이해할 수 없군요. 지성론을 경계하는 의유가 고작 흑마법이란 건 논리에 맞지 않아요. 당신의 말은 학파의 절반이 학회에서 사장되어야 한다는 뜻과 다르지 않아요.”

흑마법사의 출현을 문제 삼을 거라면 쟁쟁한 학파들도 모조리 검열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경지를 갈망하던 마법사들이 마계의 유혹에 빠져 흑마법사가 된 예는, 너무 많아 세는 것이 무의미했기 때문.

“어브렐가라면 마도 가문 중에서도 정통적인 가르침으로 유명한데…… 혹시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요?”

리리아는 입을 닫아 버렸다.

다만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루인을 직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리리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루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젖비린내. 넌 나의 마도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래서?”

몸을 움찔하던 리리아가 가득 입술을 깨문다.

“납득할 수 없다. 내 마도를 평가절하하는 근거와 이유를 말해라.”

루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마법사들은 아무나 마도사라 부르지 않더군.”

마도(魔道)는 기사의 기사도와 마찬가지로 마법사에게 일종의 신성시되는 단어였다.

그래서 웬만큼의 업적과 명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결코 마도사의 칭호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럼 내가 묻지. 마법의 역사에 ‘마도사’의 칭호를 획득한 흑마법사가 단 한 명도 없었나?”

리리아가 더없이 단호하게 대답한다.

“없다.”

인간계에 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 못지않은 위업을 남긴 헤이로도스.

루인은 그가 대마신 므드라의 계약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백마법사라고?

그야말로 웃기는 소리다.

그리고 무엇보다 흑암의 공포, 이 루인이야말로 대마도사로 불려 온 몸이었다.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혹시 선대가 기록한 역사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믿고 있나? 아니 무엇보다.”

루인이 희게 웃었다.

“역사를 맹신하는 태도 이전에 너는 흑마법의 위험성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나?”

“……뭐?”

“마법은 실체를 확증하는 학문.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채로 함부로 확증을 일삼는다면 그건 편협이거나 오만이다.”

순간, 생도들의 분위기가 어둡게 변했다.

루인의 주장이 마치 흑마법을 옹호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법학도, 아니 인간 마법사가 흑마법을 칭송하는 건 일종의 반역에 해당하는 행위.

다프네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 말은 조금, 아니 많이 위험하군요. 흑마법은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의 시기부터 인간의 인간성과 영혼을 타락시켜 왔어요.”

“타락……?”

루인은 다른 차원의 생명력을 갈취함으로 얻은 가공된 마나, 마계의 진마력까지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동료들을 구하고 싶은 이 마음이, 세계의 멸망을 막고자 하는 이 간절한 염원이, 한 인간의 타락이라는 건 모멸이었다.

“사악한 마계의 존재들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순간, 모든 마법의 지식을 주인으로부터 부여받죠. 그래서 흑마법사는 주체성을 지닌 마법사가 아니라 마계의 의지를 대리하는 도구에 불과해요. 그런 저열한 삶을…….”

루인은 더 이상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타락.

저열.

다프네의 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은 타락한 대리자가 되어 인간의 생명을 갈취하는 도구로 전락하니까.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끈질긴 유혹을 이겨 냈다.

소스라치는 악의(惡意)를 견뎌 냈다.

오히려 쟈이로벨을 도구로 삼아 인간들을 살리고자 했다.

그런 처절한 삶을 살아온 노쇠한 흑마법사가 여기에 있었다.

명예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칭송받고자 하는 마도(魔道)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생도들의 직설적인 힐난이 겹쳐 오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굳은 결심을 깨고 함께하기로 한 생도들.

이런 어린아이들의 선입견에도 섭섭함을 느낄 만큼 나약해진 거란 말인가.

‘하하…….’

이 흑암의 공포가 이따위 감상에 휩싸일 줄이야.

루인이 소스라친 눈빛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죽어 간 모든 동료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잠시나마 생도 신분에 취해 나약해진 마음을 경멸했으며, 이 거짓 평화에 익숙해지려는 자신 역시 저주했다.

그렇게 루인은 세상을 격리하며 길고 긴 심상에 빠져들었다.

“…….”

리리아는 그동안 루인의 곁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동질감.

차갑고 오만해 보이는 루인이었지만 그 눈빛은 언제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견디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얼마나 모질게 견디고 있기에 사람이 저런 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말로 표현조차 할 수 없는 그의 처절한 눈빛은 가문과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것.

그렇게 리리아는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묘한 열기를 느끼며 루인의 곁에 함께 앉아 눈을 감았다.

오늘도 심상이 답을 줄 것이기에.

무거운 분위기를 느낀 생도들도 하나둘 자리에 앉아 이미지를 시작했다.

*  *  *

왕립 아카데미의 장미 정원에 나른한 햇살이 내려앉았다.

둥근 테이블에 앉아 다과를 즐기고 있는 마법학부의 교수들.

일종의 대책 회의였다.

“한 기수의 천재적인 마법 생도들이 동시에 목소리(Voice) 그룹을 선택한 전례가 있었나요?”

“그럴 리가. 당연히 없습니다.”

“목소리라면 생도들의 성장을 도울 만한 그 어떤 커리큘럼도 없잖아요?”

“유급과 퇴교를 기다리는 생도들이 모이는 그룹입니다. 커리큘럼이 있을 수가, 아니 있어서도 안 되는 곳이죠.”

“그럼 그 아이들을 그렇게 계속 방치할 거예요?”

헬렌 교수는 답답했다.

자신의 수업을 망친 무등위 생도들을 조사해 본 결과, 하나같이 1학기 때 쟁쟁한 실력을 뽐냈던 녀석들이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생도들을 마법학부가 품어 내지 못한다면 왕국으로서도 불행한 일.

하지만 문제는 대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게리엘도스 교수가 미간을 구겼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다시 교수님들의 배정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거야 원…….”

예상되는 정원을 배려해서 철저하게 담당 교수와 지도 교수의 배치를 마친 상태.

그러므로 이제 와서 그 녀석들에게 담당 교수를 배정한다는 건 다른 생도들의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합리의 성지, 마법학부에서 그런 부조리적인 행정을 펼칠 수는 없었다.

‘도대체 그 녀석은 무슨 생각인 거지?’

루인이 보결 생도로 입학한 그 시점부터 게리엘도스 교수의 평화는 완벽히 깨어져 버렸다.

마탑의 간섭, 무등위 생도들의 지속적인 동요, 특히 시시때때로 루인에 대한 보고를 요구하는 헤데이안 학부장까지.

“하, 학부장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장미 정원의 분수대 그늘 아래 헤데이안 학부장이 뒷짐을 진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들이 일어나며 공손히 예를 표했다.

“허허, 이 내가 환담을 방해했군. 그만들 앉으시게.”

게리엘도스 교수는 지금도 겨우 화를 삭이고 있었다.

난데없이 교수들을 유급 휴가 처리하며 무등위 생도들의 지도 교수를 자처했던 학부장이었다.

한데 또 무슨 심사가 뒤틀렸는지 사흘 만에 명령을 철회해 버렸다.

고향으로 휴가를 갔던 교수들이 되돌아오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교수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 냈던 게리엘도스 교수.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나누고 계셨는가?”

“아, 목소리 그룹의 운영 방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목소리(Voice)? 그 그룹에 따로 운영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는가?”

헤데이안 학부장의 질문에 헬렌 교수가 대답했다.

“이번 기수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던 무등위 생도들이 모두 목소리 그룹을 선택해 버렸어요.”

“뛰어난 성과?”

“현자님의 손자인 시론 생도, 현자님의 수제자 다프네 생도, 어브렐가의 리리아 생도, 그리고 슈리에 생도와 세베론 생도…… 마지막은 루인 생도? 맞나요?”

“뭐라?”

아 저 눈치 없는!

일부러 학부장에게 보고를 피해 왔는데 하필 여기서 주절주절 다 말해 버릴 줄이야!

게리엘도스 교수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습니다.”

“허허허허!”

학부장이 묘한 눈으로 게리엘도스 교수를 응시한다.

이 정도의 일이라면 분명 보고를 했어야 정상.

하면 지금 이 학부장에게 개기고 있는 건가?

“게리엘도스 교수. 이미 두 달 전에 자네의 연구가 끝났다고 들었네만.”

순간 게리엘도스 교수의 두뇌가 맹렬히 회전했다.

설마 지금 뻔히 정해져 있는 교수의 연간 실적을 무시하고 또 다른 연구 업적을 요구하려는 건가?

“자, 자, 잘못했습니다 학부장님. 그동안 저 진짜 힘들었습니다.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허허, 그래. 옛날 생각이 나는군.”

“아…….”

지금이야 호호백발에 허허로운 웃음을 짓고 있는 헤데이안 학부장이었지만, 그의 과거란 전설적인 ‘악마 교수’였다.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

그의 밑에서 마법을 수학했던 과거가 떠오르자 게리엘도스 교수는 지금도 온몸이 떨려 왔다.

그런데 그때.

“허억! 허억! 교수니이임!”

빨간 머리를 휘날리며 부리나케 달려오는 여생도, 아드레나였다.

게리엘도스 교수가 짐짓 권위를 다잡으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품행을 단정히 하게 아드레나 생도. 학부장님이 계시지 않은가.”

“에? 아 넵.”

옷에 먼지를 털며 한참이나 부산을 떨던 아드레나가 게리엘도스 교수에게 귓속말을 건넬 찰나.

눈치 빠른 게리엘도스 교수가 아드레나를 밀어내며 엄히 꾸짖는다.

“어허, 학부장님 앞에서 이 무슨 무례인가. 학부장님께 직접 보고하게.”

“에? 그래도 돼요?”

갑자기 게리엘도스 교수가 자신의 발을 꾸욱 밟자 그제야 아드레나는 돌아가는 분위기를 이해했다.

“에, 알겠습니다! 그럼…….”

또렷이 학부장을 바라보는 아드레나.

“그…… 목소리 녀석들이 복구 중인 대마법 전투장에서 허가 없이 마법 전투를 벌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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