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마나를 느끼는 감각, 회로 구현력, 술식 연산력, 고유 염동력…… 이렇듯 마법사의 재능을 가늠하는 기준은 한 가지로 특정할 수가 없어요. 어느 한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인다고 해도 나머지가 불안정하면 상승의 단계로 나아갈 수 없죠.”
헬렌 교수의 눈빛이 따뜻한 빛을 머금었다.
무등위 마법 생도들.
닳을 대로 닳아 버린 등급 생도들을 가르칠 때와는 확실히 다른 수업 태도를 보여 준다.
지루한 마도학 개론 수업을 이렇게 생동감 있는 표정으로 들을 수 있는 생도들은 역시 무등위 생도들뿐일 것이다.
“사람에겐 한계가 있어요. 어느 한 분야는 반드시 모자라기 마련이죠. 여러분들도 출신 마을에서는 엄청난 재능으로 칭송받다가 아카데미만 오면 낙제생이 되는 친구들을 많이 보셨을 거예요. 지금 여기에도 성적이 간당간당한 생도들이 많겠죠?”
헬렌 교수의 그 말에 몇몇 무등위 생도들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왕립 아카데미, 그것도 마법학부에 입학한다는 건 그야말로 꿈같은 일.
온갖 칭찬을 받으며 마법학부에 입학했지만 확인한 건 자기 자신의 한계.
이 르마델 왕국에 천재는 너무나 많았고 이번 기수는 특히나 더 심했다.
등급 생도로 진급할 수 있는 정원은 칼같이 정해져 있는 상황.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2학기에도 학점을 채우지 못한다면 낙제 유급, 심하면 낙제 퇴교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급으로 버텨도 문제인 것이, 유급 생도가 되면 더 이상 왕국이 지원하는 학비를 받을 수 없게 된다.
대부분이 평민인 생도들로서는 그 천문학적인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결국에는 퇴교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제 수업을 청강하는 이유는 아마도 제가 생도들에게 학점을 후하게 주는 편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현실은 소문과 많이 다를 거랍니다.”
그 순간 교실 내부에 차가운 정적이 휘몰아쳤다.
그녀의 말대로 의자가 모자라 선 채로 청강하고 있는 생도들로 바글바글할 만큼, 마도학 개론의 수업은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학점에 대한 절박함 때문.
분명 선배들로부터 전해 들었던 정보에 의하면 헬렌 교수는 점수가 후한 편에 속하는 관대한 교수였다.
한데 갑작스런 헬렌 교수의 선언 때문에 생도들은 하나같이 멍해지고 말았다.
“이제 한층 보기 더 좋아졌네요. 긴장감으로 가득한 그런 눈빛들. 역시 무등위 생도는 무등위다워야죠. 다만―”
헬렌 교수가 칠판에 커다랗게 글씨를 썼다.
『자유.』
“전 자유로운 토론을 좋아해요. 여러분들이 의견을 개진하고 싶을 땐 언제든지 자유롭게 발언해도 좋아요. 손을 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에요. 제가 질문하는 생도를 참 좋아하거든요.”
무등위 생도들은 헬렌 교수의 성향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였다.
흥미로운 질문을 하는 생도들을 눈여겨볼 확률이 높을 것이다.
후한 점수는 따라오는 덤일 테고.
헬렌 교수가 다시 찬찬히 생도들의 눈빛을 훑어보았다.
적당한 긴장감.
간절한 눈빛들.
그녀는 이제야 좀 교단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자, 그럼 시작해 봅시다. 마도학 개론. 거창하죠? 하지만 마도란 명확하거나 구체적인 개념을 덧씌울 수 없는 단어예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단 뜻이죠. 그럼에도 이 교수는 여러분들께 묻고 싶네요. 마법사의 마도(魔道)란 무엇일까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교실의 뒤편에 서 있던 무등위 생도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마법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주관론적 관념, 혹은 냉철하게 마법을 바라보는 분석적 태도, 그런 모든 과정의 체험을 말합니다.”
헬렌 교수의 두 눈에 작은 이채가 일었다.
마도를 저렇게 단정적으로, 자기 확신에 가깝게 주창하는 생도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그건 마법을 오로지 내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이군요. 이름이 뭐죠?”
“세베론입니다.”
웅성웅성.
무등위 생도들은 모두 세베론을 알고 있었다.
시론의 측근이었으나 결코 단순한 측근으로 치부할 수 없는 천재적인 생도.
“데뮬란 학파의 ‘지성론’에 의하면 마법사의 자기 확신이나 성찰, 분석, 체험 등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을 마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식론적 경험이 풍부해질수록 지혜를 초월하는 마법사의 자아가 올곧게 형성되죠. 저는 이 지성론에 동의하는 마법사입니다.”
몇몇 생도들이 감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의견에 동조하기에 앞서, 저렇게 당당한 태도로 확신에 가까운 마도론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기 때문.
한데 그런 세베론의 확고한 신념을 곧바로 부정하는 생도가 있었다.
“데뮬란 학파의 지성론은 반드시 사장되어야 하는 이론입니다.”
“뭣!?”
세베론의 고개가 부서지듯 꺾어졌다.
헬렌 교수가 교실 구석에 앉아 있던 은빛 머리칼의 여생도를 바라보았다.
그 여생도는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생도였다.
이미 전반기에 자신의 수업을 최고 학점으로 이수한 리리아.
그런 리리아가 왜 다시 자신의 수업을 찾았는지 궁금했으나 단번에 데뮬란 학파의 지성론을 공격하는 그녀의 주장에 더욱 흥미가 일었다.
“리리아 생도, 그게 무슨 말이죠?”
리리아가 차가운 눈빛을 빛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마법사의 주관론적 인식은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데뮬란 학파의 지성론에는 이런 마법사의 비틀린 자기 확신이나 어그러진 신념을 제어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방법론이 없습니다. 한 마법사가 자신의 경험을 맹신한다면 최악의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세베론의 맹렬한 눈빛이 리리아에게 쏘아졌다.
“최악의 상황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마법사의 나약해진 영혼에 군침을 삼키는 존재들이라면 너도 모르진 않을 텐데.”
“뭐……?”
다시 리리아가 헬렌 교수를 응시했다.
“데뮬란 학파의 몇몇 마법사들이 사악한 마계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흑마법사로 재탄생된 예는 실제로 역사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그, 그건! 흔하지 않는 일이다! 어떻게 넌 그런 극소수의 사례로……!”
“넌 마법사가 아닌가? 위험한 사례가 있었다면 이를 경계하는 건 당연한 태도인 것 같은데.”
그때, 불쑥 끼어드는 시론.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다른 학파의 마법사들도 흑마법사가 된 예는 얼마든지 있다. 그럼 그 학파들도 모두 배척해야 하나?”
“당연하다. 가능성이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널 다시 보게 되는군. 그건 편협이자 또 다른 성역이다. 그런 식으로 칼같이 배척하기엔 지성론의 가르침은 결코 얕지 않아.”
시론이 헬렌 교수를 응시했다.
“지성론이 주장하는 건 단지 주관적인 자기 성찰이나 인식론적 체화가 끝이 아닙니다. 지성론이 말하고 있는 건 끊임없는 자기 인식에서 오는 경험의 풍성함입니다. 이 과정에서 마법사는 자신의 특성과 자질을 저절로 생득(生得)하듯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마법사로서의 단면을 보다 쉽게 구분하고 직시할 수 있는 겁니다.”
리리아의 눈빛도 맹렬해졌다.
“너의 그 주장에도 역시 어그러진 마도를 제어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방법론은 없다.”
논쟁이 격화되자 헬렌 교수가 중재하고 나섰다.
“가치의 격돌이 저로선 보기 좋군요. 하지만 더 이상의 거친 논쟁은 허락하지 않겠어요. 이제 그만 진정들 하세요.”
“잠깐, 잠깐만요. 교수님.”
다프네가 생도들 사이에서 불쑥 나타나자 교실 전체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눈부신 다프네의 미모에 몇몇 생도들이 얼굴을 붉히며 몽롱해졌다.
“어? 그대는……?”
헬렌 교수는 그런 다프네가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었다.
“학회 이후에 처음 뵙는군요 교수님.”
그제야 다프네의 정체를 알아본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뜨는 헬렌 교수.
“현자님의 제자! 그대가 어찌 내 수업에?”
“그렇게 됐어요. 얼마 전에 보결로 편입했어요. 저도 이제 마법 생도란 거죠. 잘 부탁드려요.”
멍해진 헬렌 교수.
입탑 마법사이자 현자의 수제자.
마탑 최상층의 일원인 그녀가 왜 무등위 견장을 어깨에 달고 있는지 헬렌 교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혀, 현자님의 제자?”
“입탑 마법사라고?”
웅성웅성.
무등위 생도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입탑 마법사가 무등위 생도로 편입을 했다니?
같은 경쟁자라기엔 너무 까마득한 위치의 마법사였다.
“리리아,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요.”
“뭐지?”
다프네가 고아하게 눈을 뜨며 리리아를 응시했다.
“마도를 이해할 때, 저 시론과 세베론처럼 이미 많은 마법사들이 데뮬란 학파의 지성론을 따르고 있어요. 저 역시 그중 하나죠.”
눈살을 찡그리는 리리아와 달리, 시론과 세베론은 어깨로 우쭐거리고 있었다.
“마법을 수련함에 있어 그대의 말대로 지성론을 배척한다면 무엇으로 마법사의 마도를 갈고닦을 수 있죠? 아무리 주관적인 체화가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갈 확률이 있다고 해도, 자기 인식이나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사상(思想)이다. 자신의 의지와 염원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먼저 관념적으로 정의한다. 그렇게 확립된 사상을 통해 마도(魔道)가 발현되는 것이다.”
다프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한 인간의 사상이란 경험을 통해 완성하는 것.
한데 그런 경험도 없이 사상을 완성하고, 그 사상으로 마법사의 마도를 투영한다고?
이건 선후가 바뀌었다.
다프네는 묻고 싶었다.
“그럼 그대는 이미 어떤 사상을 지닌 ‘현자’란 말인가요? 뭐죠? 그 사상이란 게?”
목숨까지 걸 수 있는 목표가 있었으나 리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결코 밝힐 수 없는 처절함이었다.
“역시 말하지 못하는군요. 그럼 궤변이라고 평가해도 되겠죠?”
“뭐? 궤변?”
헬렌 교수는 두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아니 내 수업에서 이게 대체 뭐 하는 짓들이지?’
칼만 안 들었을 뿐이지 무슨 전쟁터를 보는 것 같다.
마치 학파끼리의 대논쟁(大論爭)을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기분.
그런데 그때.
“전부 틀렸어.”
턱을 괸 채로 무료하게 리리아와 다프네를 번갈아 쳐다보는 생도, 루인이었다.
자신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루인의 눈빛에 리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도 이마가 화끈거리는 기분.
건방지게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녀석에게 화를 내야 했지만 리리아는 어제 그러지 못했다.
다만 멍해졌을 뿐.
지금도 리리아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프네가 고아한 눈빛을 빛냈다.
“뭐가 우습다는 거죠?”
“젖비린내 풍기는 경험으로 감히 사상을 말하는 것도 우습고, 주관적 경험에 갇혀 자기 확신을 일삼는 마도 역시 바보 같다.”
헬렌 교수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리리아처럼 한 학파의 이론에 대해 학술적인 거부감을 드러내는 생도는 많았다.
그러나 저토록 무료한 얼굴로, 저리도 권태에 찌든 눈으로 학술의 무가치를 ‘판정’하는 생도는 처음 본다.
다시 다프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당신의 마도는 뭔가요?”
“그렇게 거창할 것도 없지.”
“거창한 게 아니면요?”
더없이 차갑고 투명한 눈.
루인의 확고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강하다는 확증. 그런 의심 없는 확신이 바로 나의 마도(魔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