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한 인간의 선입견은 공고하다.
하지만 그런 선입견이 붕괴되기 시작하면 어떤 믿음보다 더 쉽게 무너진다.
“하아…… 하아…….”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심장.
의식을 무너뜨릴 지경까지 차오른 숨.
리리아는 믿을 수 없었다.
고작 달리는 것뿐이었다.
한데 그런 달리기 따위가, 고절한 마도로 단련해 온 마법사의 의식을 무너뜨릴 정도로 힘겹다고?
평소 바보 같은 기사들의 수련을 비웃고 살아온 리리아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한 충격은 없었다.
육체의 고통이 인간의 정신을 이토록 좀먹을 줄이야!
“하윽…….”
마치 폐부가 찢어지는 것만 같다.
식도로부터 비릿한 맛이 올라왔으나 뱉어 닦아 보니 피는 아니었다.
척척-
또다시 루인이 앞서 뛰어갔다.
몇 바퀴를 따라잡혔는지 더 세는 건 이제 의미가 없었다.
처음엔 따라잡히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뛰었다.
그러나 그런 강렬한 의지도 나약한 육체에 의해 얼마나 무기력해질 수 있는지를 처절하게 깨달았다.
“아…….”
비틀.
리리아가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아 버렸다.
평소대로라면 악착같이 눈을 빛내며 일어나야 했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포기하면 편하다고 했던가.
그런 나약한 마음은 찰나에 불과했으나 그 순간 온몸의 모든 힘이 풀려 버렸다.
리리아의 뒤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다프네와 슈리에도 주저앉았다.
그녀들 역시 창백해진 얼굴로 연신 숨을 몰아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저도… 더 이상은…….”
“아…… 진짜 죽을 거 같아요.”
달리기 선배(?)였던 시론과 세베론은 그 후로도 몇 바퀴를 더 뛰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루인과 끝까지 함께 뛰지 못한 건 마찬가지.
새벽녘의 어스름이 물러가고 붉은 태양이 떠올랐을 때 루인의 달리기는 끝이 났다.
루인 일행은 곧바로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했고.
평소의 두 배가 넘는 양으로 배를 채운 뒤에야 다 함께 실험실에 모일 수 있었다.
생도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루인은 이미지 자세를 취한 채 심상에 빠져든 상태였다.
시론이 질린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잠시 쉴 만한데도 루인에겐 그런 작은 여유조차 없었다.
루인의 일과와 함께한 지 이제 고작 1일 차.
앞으로의 고난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지자 세베론이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에라이 모르겠다.”
세베론이 이미지 자세를 취하자 다프네와 리리아도 함께 앉았다.
시론도 심상에 빠져들었다.
당연히 그의 이미지는 어제 있었던 대결의 복기.
그것은 다프네와 리리아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금방 심상에서 깨어나며 불만을 터뜨렸다.
“아니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처참하게 얼굴을 구기고 있는 시론.
리리아 역시 씁쓸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복기해 봐도 이건 상식적이지가 않아.”
다프네라고 다를까.
“그 무식한 움직임과 아티펙트는 그렇다 쳐요. 마법사답게, 그냥 마법만 살펴보자구요.”
다프네는 다른 건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천 개의 마력 칼날.
이 하나만큼은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건 가능과 불가능을 가늠하기 이전에 마법이라는 학문이 지닌 한계의 문제였다.
“일정 수준의 연산력과 염동력을 갖추면 더블 캐스팅, 뛰어나면 트리플 캐스팅도 가능하죠. 심지어 쿼드 캐스팅을 활용하는 고위 마법사를 본 적도 있어요.”
“쿼드(Quad)? 정말이야?”
시론의 질문에 리리아도 의문을 보탰다.
“이론상으론 가능하다지만 그걸 직접 구현해 낸 마법사는 없을 텐데?”
다프네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즈락 님. 제가 마지막으로 마법학회에 참가했을 때, 그분의 쿼드 캐스팅을 분명 똑똑히 보았어요.”
“에즈락?”
“알칸의 지혜!”
알칸 제국이 보유한 최강의 현자.
현시대의 가장 위대한 대마법사, ‘알칸의 지혜’ 에즈락이 다프네의 입에서 언급되고 있었다.
세베론이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분이라면 가능할지도.”
생도들은 하나같이 경외의 눈빛을 했다.
그만큼 마법의 세계에서 에즈락이라는 이름이 갖는 파괴력은 엄청났다.
하지만 분위기는 금방 어색해졌다.
마도(魔道)의 한계라는 쿼드 캐스팅.
그런데 생도들이 어제 본 것은…….
3위계로 짐작되는 마력 칼날 수천 개였다.
루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우우우웅-
또다시 루인의 잿빛 마나볼이 허공에 떠올랐다.
“심상과 염동으로 마력회로를 맺은 후.”
츠츠츠츠-
그 순간 마나볼이 두 개로, 네 개로, 여덟 개로 분화되고 있었다.
“파동입자의 이중성과 다변성을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개체는 분화할 수 있지.”
“뭐……?”
여덟 개의 마나볼이 열여섯 개로, 서른두 개로 쪼개어진다.
“자, 잠깐! 마, 말도 안 돼!”
시론이 벌떡 일어나며 몸을 떨고 있었다.
그로서는 이런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순간 경악하는 다프네.
“이것은 설마…… 헤이로도스……?”
이제 마나볼은 수백 개로 쪼개어져 실험실을 부유하고 있었다.
“그래. 이건 고대의 마법사 헤이로도스가 구사했던 ‘술식 변환’의 변형이다.”
본디 복잡한 술식으로 한번 맺은 마법은 절대 다른 마법으로 치환될 수 없었다.
한번 캐스팅한 ‘파이어볼’이 순식간에 ‘라이트닝 쇼크’로 변할 수 있다?
마력을 치환하는 방식, 술식의 구성, 회로 구현법이 완벽하게 다른데 어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래서 술식 변환(術式變換)은, 헤이로도스기의 백마법 총론에서 분명 다루고 있지만 전설 혹은 이론상의 마법 경지였다.
“그럼 지금 이 무수한 마나볼들이 단 한 번의 캐스팅으로 일궈 낸 마법이라는, 그러니까 단지 개체를 분화한 것이라구요?”
다프네의 질문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아…….”
헤이로도스의 마법, 그것도 술식 변환까지 구현해 낸 마법사는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마법사로 칭송받아 왔다.
그들이 남긴 위대한 족적에 조금이라도 다가서기 위해 지금도 전 세계의 마탑들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 위대하고 전설적인 마법사의 역량을 지금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술식 변환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단어를 잘못 골랐어. 실제로는 파동 변환에 가깝다.”
“파, 파동?”
“술식 변환을 확정 짓는 근사법을 살펴보면 그 중심엔 언제나 마력 파동이 있다. 파동의 특정 상수들, 확률론적 성질, 초과 왜곡, 외력 궤도 등 이 모든 것들이 마력 파동과 직간접적으로 엮여 있다. 그래서 마력 파동을 보다 깊이 이해하면―”
그 순간, 수백 개로 분화되어 있던 마나볼이 순식간에 한 점으로 모이더니 이내 타오르기 시작한다.
화르르르르-
그러다가 얼음창으로 변한다.
츠츠츠츠츠-
그리곤 뇌전으로.
지지지지직-
다시 화염으로 변했을 때 루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런 것들이 가능하지.”
한참 동안 멍하게 굳어 있던 시론이 억울한 표정으로 역정을 냈다.
“너, 너무하잖아 이건!”
루인은 무슨 간단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헤이로도스라는 전설적인 마법사의 단면이란 생도들 수준에서는 너무 복잡다단하고 형이상학적인 것이었다.
“그럼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구유(九幽)의 불’인가?”
리리아가 묘한 눈으로 루인의 화염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헤이로도스의 대표적인 마법 구유의 불.
한데 마도서가 묘사하고 있는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왜 아무런 색이 없는 거지?”
분명 타오르고 있다.
열기도 확연하게 느껴진다.
한데 으레 화염이 갖춰야 할 색(色)이 없었다.
이 정도로 강한 열기라면 지독히 푸르거나, 하다못해 붉은 기운이라도 머금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루인의 마법은 마나볼이 지닌 잿빛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마법에 아무런 색이 없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다.”
루인의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흑마법과의 융합 마력이 그 이유라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루인은 확신할 순 없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어요.”
루인이 다프네를 바라본다.
“말해.”
“그 수천 개의 마력 칼날이 각각 캐스팅된 마법이 아니라 단순한 분화(分化)였다면 말이 안 되는 게 하나 있어요.”
루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위력을 말하는 건가?”
“네.”
3위계의 마력 칼날 하나가 수천 개로 불어난 거라면 각각의 위력은 현저하게 떨어져야 했다.
하지만 루인의 마력 칼날은 5위계 배리어 마법, 비탄의 수호벽을 무참하게 깨뜨렸다. 이론상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이건 그냥 나중에 직접 보여 주는 게 맞겠군.”
“나중에요?”
“난 리퀴르 측정기가 없다.”
루인의 그 말에 다프네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 입탑 마법사예요.”
지이이이잉-
다프네가 술식을 맺자 그녀의 아공간이 또 한 번 현신했다.
아공간을 빠져나온 작은 상자.
이내 그녀가 특정 버튼을 누르자 기묘한 빛깔의 수정구가 상자 위로 불쑥 튀어 올라왔다.
마력을 가늠하는 마도구, 리퀴르 측정기였다.
“지금 그 구유의 불로 하시겠어요?”
“상관없다.”
다프네가 리퀴르 측정기의 수정구로 구유의 불을 가늠하자.
순간 상자의 중심에 있던 게이지가 미친 듯이 치솟았다.
“3만……?”
“뭐, 뭐라고?”
“미친!”
생도들 모두가 입을 떠억하니 벌리고 있었다.
리리아는 리퀴르 게이지가 실제로 만 단위로 치솟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 정도라면 고위 마법사 수준을 상회하는 수준.
다프네가 눈을 씻고 다시 구유의 불을 자세히 바라본다.
느껴지는 술식의 결은 분명한 3위계.
한데 가리키고 있는 게이지는 3만.
이 미친 괴리를 그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죠?”
마신의 핵(核), 오드로 완성한 루인의 마나홀.
지금에 이르러 루인의 융합 마력은 마계의 진마력과 거의 흡사한, 아니 어쩌면 더한 위력을 내뿜고 있었다.
“가진 마력을 해석하라고 말한다면 어떤 마법사가 할 수 있지? 넌 네가 품고 있는 마력을 설명할 수가 있나?”
“아,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역시, 드래곤이라는 건가.
그렇게 다프네가 가득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 리리아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여느 때보다 차가운 리리아의 눈빛.
“네 마법들, 너의 그 마력…… 다시는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마.”
루인은 리리아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묻고 싶었다.
“왜지?”
“너, 누가 봐도 비정상이다. 우리 나이에 너 같은 마법사는 들어 본 적도 없어.”
“그래서?”
리리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인재? 천재?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니야. 마탑에서 널 연구하려 들 거다. 마탑의 마도학자들이 이런 희귀 사례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어브렐가의 일원으로 살았기에, 새로운 것을 탐구하려는 마도학자들의 갈망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리리아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루인의 진면목을 마주한 마탑이 저지를 짓은 너무나 뻔했다.
“게다가 귀족들도 문제다. 고작 무등위 생도 따위가 지닌 힘이 이 정도라면 그 미래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서로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겠지.”
“…….”
“차지할 수 없다면 부숴 버리는 것이 귀족의 논리. 넌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그만. 됐다.”
어느덧 루인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가 리리아의 머리를 헝클었다.
“괜찮다. 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