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다프네의 정신을 깨운 것은 얼굴이 짖이겨지는 듯한 고통도 패배의 쓰라림도 아니었다. 오직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의문이었다.
‘…….’
차분하게 생각을 확장한다.
질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한 상태.
상대는 루인, 아니 그저 인간을 흉내 내고 있는 세계 최강의 지성체였으니까.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들을 나타내는 가장 근원적인 단어는 격(格).
절대적인 용언(龍言).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마법 술식.
인간이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곳, 격을 달리하는 초월자의 기품, 그런 고아한 권능을 철저하게 느끼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자신이 아는 드래곤, 마도서가 기록해 온 위대한 존재들의 특성이었다.
하지만 저 존재는…….
지극히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루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다프네.
후, 다시 차분하게 복기해 보자.
첫 번째는 시론과의 대결.
맹렬한 몸놀림으로 상대의 배에 주먹을 꽂아 버린다.
마도(魔道)를 상대하는 단 일격.
마법사라기보단 기사에 가까운 행동이다.
두 번째, 리리아.
고작 ‘마력 필드’라 주장하는 절대봉쇄주문, 이어진 ‘정신주박주문’에 가까운 슬립 마법.
그런 압도적인 드래곤의 초고위 마법을 고작 3위계 마법사 리리아를 상대하는 데 활용한다.
세 번째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그가 아공간에서 꺼낸 관모부터가 터무니없었다.
‘대마력 흡수 필드’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권능.
‘서리의 입김’으로 인해 4배가량이나 증폭된 자신의 마력을 순식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정신 나간 아티펙트였다.
그런 초고위 대규모 필드 마법을 상시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아티펙트란 들어 보지도 못했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믿지 못했을 지경.
더욱이 그 후에 보인 루인의 행동은 더 충격적이다.
느껴졌던 마력의 결은 분명 3위계, 그것도 뇌격계로 보이는 원소 마법이었다.
문제는 그 양.
루인의 투명했던 마력 칼날은 그야말로 셀 수조차 없었다.
아무리 3위계 마법이라고 해도 무슨 수천 개 단위로 펼친다는 게 말이나 되나?
도대체 마력이 얼마나 많길래, 아니 그보다 수천 개의 술식에 필요한 터무니없는 연산력부터가 상식적이지 않았다.
설령 드래곤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터무니없는 수준이 아닌가?
게다가 더 황당했던 건…….
결정적인 순간에 바닥에 떨어졌던 그의 관모다.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그런 초월적인 아티펙트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에 던져 버리다니?
그것은 수천 개의 마력 칼날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사람은, 아니 마법사는 아티펙트를 경원하며 소중하게 여긴다.
마법사가 지닌 관념상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
이렇듯 그의 대마법 전투를 자세히 복기하면 할수록 그의 전투는 너무 극단적이었다.
최적의 움직임으로 한 방에 상대를 무력화시키거나, 압도적인 마법으로 단숨에 제압해 버린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초월급 아티펙트를 던져 버리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으며.
레이디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버리는, 인간 세계의 규범이나 상식 따위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저런 존재가 드래곤, 마법의 조종(祖宗)이라고?
“앗!”
축 늘어진 채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 다프네를 드디어 시론이 발견했다.
“모, 몸은 괜찮나?”
“괜찮아요.”
다프네가 일어났다.
푸스스스스-
벽의 잔해가 흘러내릴 만큼 강력한 충격.
다프네가 비틀거리며 루인에게 다가갔다.
루인이 특유의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마력 실드를 펼쳐 어느 정도는 몸을 보호한 모양이군. 훌륭하다.”
사람을 이렇게 병신으로 만들어 놓은 주제에 칭찬이라니.
다프네는 마치 플라스크 안의 실험물이 된 기분이었다.
“앞으로는 그렇게 메모라이징을 과도하게 활용하진 말도록. 위기 상황에서 활용하는 것까진 어쩔 수 없다지만, 그게 버릇이 된다면 실질적인 실력 향상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아.”
누가 그걸 모르나?
메모라이징 마법은 상황을 가정하여 펼치는 것이기 때문에 전투의 복잡한 변수에는 대응할 수가 없다.
전투 환경에서의 임기응변 능력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프네가 무리하게 메모라이징을 활용했던 건 상대가 드래곤이었기 때문.
그때, 시론이 홀린 듯한 눈빛으로 다시 루인을 쳐다봤다.
“넌 도대체 뭐지……?”
입탑 마법사, 현자의 수제자 다프네를 이렇게까지 손쉽게 상대하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결코 믿지 못했을 상황이다.
갓 핸드급 아공간의 주인.
정신 마법에 필적하는 슬립 마법.
게다가 뭐 절대봉쇄주문?
더 황당한 것은 경지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그의 강력한 체술.
그 하나만으로도 그는 마법사의 모든 상식이 부서지는 전투를 구현해 내고 있었다.
이런 건 생도 수준이 아니다.
지금 그가 지니고 있는 능력들 중 하나만 제대로 드러난다고 해도 아카데미가 발칵 뒤집어질 일.
루인은 그런 시론을 향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
자신의 전투 방식은 마법사의 고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료들과 적의 피로 얼룩진 전장.
그런 곳에서 수도 없이 죽고 되살아나며 쌓아 올린,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해 구축된 대인 살상용 전투 방식이다.
아무리 상대가 약해도 얕보지 않는다.
적어도 전투에서만큼은 만약을 위해 힘을 대비하거나 전략을 위해 뒷걸음치지 않는다.
최선의 선택, 최적의 동선, 최고의 방식으로 적과 마주한다.
생각하고 망설인 결과는 언제나 참혹했으니까.
이런 자신의 방식은 생도들의 짧은 경험으로는 쉽게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
일부러 충격을 받으라고 보여 주었다.
정말로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면 흑암의 공포가 살아온 흔적에 고개를 돌리지 말아야 한다.
고작 이 작은 감흥조차 감당하지 못할 거라면 여기까지가 인연의 끝이라는 마음으로 루인은 그렇게 서 있었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될 수 있지?”
끝없이 투명한 눈빛을 빛내고 있는 리리아.
단순한 호기심 정도가 아니다.
욕망과 열망을 넘어선, 그야말로 초월적인 의지가 엿보인다.
이제 그녀에게는 아카데미나 무투대회 따윈 아무런 의미도 될 수 없었다.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지금처럼?”
루인이 달빛 아래 자신의 마력을 흩뿌렸다.
“닿고 싶은 곳이 생겼다면 멀어지지 않는 건 언제나 좋은 선택이지.”
루인의 마력이 신비로운 물결을 그리며 천천히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넌 귀족인가?”
시론에겐 이것이 중요한 듯 보였다.
신분에 신경 쓰지 않는 척, 구애받지 않는 척하면서도 그는 내심 루인이 귀족이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것이 너의 관계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인가?”
루인이 세베론을 쳐다봤다.
“역시 그래서였군. 저 녀석의 존댓말을 굳이 내버려 둔 이유가. 같은 귀족이 아니라면 나와 동등할 수 없다는, 그런 치기를 나는 용납하지 않아.”
“그, 그런 게 아니다!”
루인이 피식 웃었다.
“너의 측근들 말이지. 마치 군사 조직 같은 행동 양식을 보이더군. 주인을 향한 충성. 너의 관계란 것이 아카데미의 졸업 이후를 바라보고 있다는 증명이지.”
“아니! 난…….”
대마법 전투장을 가득 메운 루인의 마력이 천천히 술식으로 맺히기 시작했다.
“조급하군. 무엇이 널 급하게 만들지? 현자의 손자, 마도명가의 촉망받는 마법사. 거기에 아카데미의 인재들을 얹는다면 뭔가 더 달라질 거라 믿고 있는 건가?”
츠츠츠츠츠츠-
루인의 술식으로 맺어진 미지의 마법이 대마법 전투장의 모든 마법의 흔적들을 지우고 있었다.
이제 어떤 고위 마도 추적자가 살핀다 해도, 마력의 잔재를 통해 이곳에서 벌어졌던 전투를 유추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네가 구축하고 싶은 인재의 테두리에 리리아를 넣고 이 나마저 넣는다고 해도 스스로 달라지지 않는 이상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지녀 왔던 마음을 들키자 시론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너는 내가 ‘시론의 측근 루인’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 순간 시론은 벼락에 관통당한 듯한 심정이었다.
“저 리리아는?”
그렇게 시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인과 리리아는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측근 생도들처럼 마도명가의 후광을 바라지도 출세를 염원하지도 않았다.
“너와 나의 관계가 시론의 루인, 루인의 시론이라면 흔쾌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그럴 생각이 아니라면…….”
루인의 마력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은은한 달빛만이 전투장을 드리우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을 잊고 여기서 꺼져라.”
시론은 선 채로 굳어 버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루인의 눈빛.
살을 에는 듯한 그의 무감한 감정이 자신의 온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마치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생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그의 두 눈엔 마땅히 있어야 할 인간의 인격이 말살되어 있었다.
어떻게 사람에게 저런 눈빛이 가능한 거지?
루인이 리리아를 다시 응시했다.
“물론 너희들에게 모두 보여 준 건 아니다. 너는 이런 내 곁에서 정말 끝까지 멀어지지 않을 생각인가?”
리리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
희미하게 웃던 루인이 다프네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 역시 내 뒤나 캐고 싶은 얄팍한 마음이라면…….”
“당신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어요. 얄팍한 마음 같은 것도 이미 모두 버렸죠.”
루인이 눈빛에 기이함이 물들 무렵.
“다프네 알렌시아나. 그대의 곁에 언제나 서 있겠어요.”
달빛 아래 서 있던 다프네는, 서리의 입김을 높이 들어 자신의 마도를 허공에 그렸다.
그것은 마법사의 맹약(盟約).
마법사로서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의 의식이었다.
“전…….”
루인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며 슈리에는 리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가 1년간의 보결 생도를 자처했던 건 모두가 저 리리아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저 리리아가 루인과 함께하기로 한 이상, 이제 1년간의 마법 생도 생활은 진즉에 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슈리에 역시 마법사.
루인이 보유한 미지의 마법, 무시무시한 그의 마도를 향해 매료되어 버렸다.
슈리에가 리리아를 보며 웃었다.
“네. 저 역시 리리아와 같아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루인에게 세베론의 질문이 이어졌다.
“너의 체술. 배우길 원한다면 가르쳐 줄 순 있는 거야?”
혈주투계는 진마력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인간의 모든 원념과 증오, 공포를 초월하는 혈주신(血珠身)이 전제되어야 했다.
“나의 체술은 가르칠 수 없다.”
다소 실망한 듯한 세베론의 표정.
“하지만 비슷한 건 가르칠 수 있지.”
“비슷한?”
“적어도 그 허약한 몸뚱이를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들 정도는 될 거다.”
루인의 머릿속에 있는 체술은 수도 없이 많았다.
특히 오백 년 전의 권왕 테셀의 수련법은 이미 많은 무투가들이 따라 익히고 있었다.
바람의 대행자 시르하 역시 권왕 테셀의 수련법에 많은 영감을 받아 초인의 경지를 이룩해 낸 동료였다.
“나도 가르쳐 다오.”
무투가나 기사의 몸놀림 앞에 마법사가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 처절하게 깨달은 시론.
시론이 세베론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세베론. 이제 그 바보 같은 경어(敬語)는 집어치워라.”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시론과 그의 측근들은 함께 완성해야 할 목표가 있었다.
어쩐지 시론은 지금까지의 모든 목표를 정리하고 새로운 꿈을 받아들인 듯했다.
“내게도 가르쳐 줄 수 있나?”
루인이 웃었다.
“물론이다. 시론.”
그때.
“아으…… 아우우……!”
교교한 달빛 아래.
벙어리 낙제생 루이즈가 환하게 웃으며 흩날리는 마력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생도들은 그것이 방금 전 루인이 떨쳐 냈던 마력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어? 술식은 사라졌는데?”
“도, 동조감응?”
과거, 루인의 마력에 ‘동조감응’을 하려고 했던 현자 에기오스마저 강력한 반발력에 의해 튕겨 나갔었다.
그만큼 루인의 마력은 독특하기 그지없었다.
적요(寂寥)하는 마법사.
침묵의 심판관 루이즈.
그런 루이즈를 바라보는 루인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너희들이 배워야 할 대상은 나뿐만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