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허공을 일그러뜨리며 나타난 거대한 그림자.
근원을 알 수 없는 마력으로 너울거리는 공간 왜곡장의 출현에 시론이 홀린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기운을 마주하자 본능적으로 온몸이 벌벌 떨려 왔다.
“도대체 저게 뭐지……?”
하복부가 관통당한 듯한 지독한 통증 따윈 진즉에 사라져 버렸다.
“……단순한 아공간 주머니는 아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는 리리아.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마법사라면 아공간 주머니를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루인의 전면에 등장한 ‘무언가’는 분명 그런 범용적인 아공간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마력,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기운.
마치 살아 있는 의지를 지닌 듯,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눈동자는 없었지만 마치 거대한 시선을 마주한 기분.
“설마…… 아티팩트 따위가 아닌 건가?”
“새, 생명체의 느낌에 가깝습니다!”
마법 무구에 대한 지식은 세베론이 가장 폭넓고 뛰어났다.
아티펙트에 대한 그의 조예가 남달랐기에 대부분의 생도들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생명체……?”
“가, 갓 핸드(God hand)! 신의 직접적인 개입과 의지가 빚어낸 초월적인 물질! 그런 창조의 속성을 품고 태어난 극소수의 아티펙트들은 사람처럼 의지를 지니죠!”
멍해진 시론의 시선이 다시 루인의 ‘헬라게아’로 향했다.
“그럼 저게…… 저 아공간이…… 그런 갓 핸드의 일종이라는 거냐?”
“확신할 순 없지만!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 미, 미친!”
전설처럼 내려오는 몇몇 초월적인 아티펙트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갓 핸드급의 아티펙트들은 그 실체가 불투명했다.
죄다 전설이나 소문뿐이라서 몇몇 마탑들은 아예 그 존재를 부정하고 있을 정도.
그 즉시 세베론이 수인을 맺으며 마력 감지 마법을 허공에 그렸다.
그의 마법에 의해 열상처럼 붉은 기운이 허공에 나타났다.
“보세요! 맺어진 마력 열상에 일정한 패턴이 없습니다!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평범한 아티펙트라면 결코 이런 마력 동조 현상이 나타나지 않죠!”
“그럼 대체…….”
저놈의 정체가 뭐지?
시론은 사고가 마비되는 듯한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지금까지도 신비한 놈이었지만 갓 핸드급 아티펙트의 주인이 사실이라면 궤를 달리하는 말이었다.
저 무시무시한 갓 핸드 아티펙트를 학회에 보고하고 연구 업적으로 등록만 해도 그 즉시 마도학자급의 위상을 지닐 것이다.
“그런데 루인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글쎄?”
시커먼 공간 속으로 팔을 집어넣은 채 한참 동안 미간만 구기고 있는 루인.
“으음…….”
분명 그의 머릿속에선 마계의 엄청난 보물들이 수도 없이 떠올랐지만 막상 꺼내자니 꺼낼 물건이 별로 없었다.
쟈이로벨이 취한 전리품들의 대부분이 엄청난 진마력이 깃들어 있는 적의 사체나 그 일부다.
일전에 활용했던 혼돈마의 꼬리를 비롯하여 암흑대제의 뇌전뿔, 유황천호의 갈기털, 영혼 갈취자의 암흑날개 등.
헬라게아 속에서 지금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선도를 유지하고 있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모습의 생체 조직인 것이다.
인간계의 몬스터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런 압도적인 그로테스크를 과연 생도들이 견딜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 인간계의 아티펙트라고 여기기나 할까?
그때, 루인의 그런 고민을 쟈이로벨이 덜어 주었다.
-바보 같은 놈. 상위 마왕급 이상의 마족이 다루던 결전 병기라면 세계의 인과율에 제약을 받겠지만 마장 정도면 상관이 없을 것이다.
확실히 마장(魔將)급 이상의 마족부터는 제법 형태를 갖춘 마도 병기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그런 엄청난 마장들이 다루던 마도 병기를 과연 저 다프네가 감당할 수 있느냐였다.
-호오, 그게 네 선택이냐.
지이이이잉.
시커먼 공간의 아가리가 닫히자.
검붉은 관모가 루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정사각형의 검붉은 가죽 아래, 칙칙한 빛깔의 구슬꿰미가 각각의 방위에서 기다랗게 늘어져 있었다.
유령마장(幽靈魔將)의 영관모.
사람이 쓸 수 있게 제작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관모였으나.
루인이 머리에 쓰자 천천히 크기가 줄어들며 깔끔하게 착용되었다.
마치 제왕의 면류관 같은 그 모습에, 모두가 루인을 기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프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아공간은 뭐죠?”
다프네 역시 관모의 정체보단 루인의 아공간에 대한 궁금증이 더 큰 듯했다.
“마찬가지다. 너의 아공간 주머니와 다를 것이 없는, 그저 내 개인적인 아공간이지.”
“술식을 맺은 흔적조차 없이 튀어나왔는데, 그런 게 마법사의 아공간일 리가 없잖아요!”
“내가 보유하고 있는 아티펙트 중 하나라고 해 두지.”
“그런 건 들어 보지도……!”
“지금 그런 게 중요한가?”
우우우우웅-
루인의 관모, 꿰어진 무수한 구슬들이 각자의 빛을 뿌리며 가늘게 떨어 댄다.
“어……?”
그 순간, 다프네의 시야가 물결처럼 파동했다.
비틀.
거의 마나번에 준하는 탈력감.
맺고 있던 마력이 물먹은 솜처럼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게걸스럽게 마력을 먹어 치운 루인의 관모가 더욱 붉은빛을 내며 재밌다는 듯이 빙그르르 돌고 있었다.
“마, 마력 흡수?”
마력 흡수 필드(Mana absorption Field) 마법을 품고 있는 아티펙트라니?
기겁하면서도 다프네는 다급히 모든 마력의 운용을 멈춘 후 루인과의 거리를 벌렸다.
달려가면서도 루인의 관모를 끊임없이 곁눈질로 살피는 다프네.
과연 관모로부터 뻗어 나온 붉은 마력 결계가 일정한 범위에 구축되어 있었다.
다프네가 결계의 범위를 빠져나가자.
그 즉시 수많은 술식이 현신했다.
촤르르르르-
5위계 폭렬 마법, 폭풍 갈퀴의 손.
쏴아아아아-
4위계 절단 마법, 칼날 여행자의 심판.
츠츠츠츠츠-
5위계 배리어계 마법, 비탄의 수호벽.
우우우우웅-
5위계 감지계 특화 마법 오큘리스의 마력안(Oculus’s Magic-eye.)
마지막으로 3위계 강화계 특화 마법, 가변 헤이스트(Variable Haste).
다프네의 주위로 피어난 다섯 개의 마법.
그런 엄청난 장면에 리리아의 두 눈이 금방 전율로 물들었다.
‘메모라이징……?’
아무리 술식의 천재라고 해도, 염동력이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상회한다고 해도.
이토록 짧은 시간에 중위계 등급의 술식 5개를 한꺼번에 시전하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저런 것을 구현하려면 인간을 초월한 연산력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저 정도 동시 시전은 그 연산력의 진폭(震幅)을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답은 하나.
루인과의 대결을 고려한 그 순간부터 이미 모든 마법을 염두에 두었다는 뜻.
물론 그래 봤자 고작 한 시간여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미리 치밀하게 저 모든 마법들을 심상 속에 메모라이징을 해 둔 것.
하지만 비록 메모라이징을 해 두었다고 해도 순식간에 구현해 낼 수 있는 저 압도적인 마력과 술식 발현법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물론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인 공격 마법인 ‘폭풍 갈퀴의 손’과 ‘칼날 여행자의 심판’으로 적을 공격한다.
‘오큘리스의 마력안’으로 적의 마력과 움직임을 감지하며.
그럼에도 적이 감지를 따돌리고 공격을 해 온다면 ‘비탄의 수호벽’으로 악착같이 막아 낸다.
배리어 마법으로 막아 내지 못하는 최악의 경우엔 언제든지 전장에서 내뺄 수 있도록 헤이스트로 대비한다.
그 와중에도 가변(Variable) 술식으로 마력을 아끼는 치밀함.
이런 엄청난 술식 조합을 처음부터 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리리아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때.
스스스스스스-
다프네가 펼쳤던 폭풍 갈퀴의 손과 칼날 여행자의 심판이 루인의 결계막에 닿은 순간 흔적도 없이 바스라졌다.
마법이 품고 있는 마력이 모조리 와해되거나 흡수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이어 대마법 전투장의 허공에 리리아에게 익숙한 기운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루인의 잿빛 마나볼.
당시에는 당황스러워서 마력의 결을 느끼지 못했지만 침착하게 바라보니 이제야 그 위력을 확실하게 읽을 수 있었다.
3위계 수준의 원소계 공격 마법.
그런데 잔풍계?
지금은 확신할 수가 없다.
순간, 루인의 마나볼이 기다랗게 찢어지며 무수한 창날로 변해 버렸다.
“아……?”
잿빛이 아니다.
투명한 마력 칼날.
수도 없이 반짝이는 칼날들이 은은한 달빛에 의해 잔혹하게 드러났다.
쏴아아아아아아-
일시에 쏟아진다.
그것은 마치 마력의 비(雨).
역설적이지만 그 모습은 아름다웠다.
교교한 월광 아래, 칼날비가 환상처럼 다프네를 짓쳐 간다.
커다란 마력 눈동자, 오큘리스의 마력안이 제 임무를 한 번 해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산화된다.
푸르스름한 마력 보호막, 비탄의 수호벽에서 벌떼가 우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진다.
촤촤촤촤촤촤촤!
5위계 배리어계 마법 비탄의 수호벽의 방어력은 비록 강력했지만, 안타깝게도 마력 칼날의 수가 너무 많았다.
쩌저저저적-
순식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다프네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진 그 순간.
“피, 피해!”
“다프네!”
생도들의 급박한 외침.
다프네가 온몸에 헤이스트를 받아들이고 다급히 피할 곳을 살폈으나.
쏴아아아아아-
비탄의 수호벽이 막아 내지 못한 모든 방위에서 투명한 마력 칼날이 쏟아지고 있었다.
‘위!’
그렇게 다프네가 도약을 선택했을 때.
그녀의 주변이 어두워진다.
펄럭펄럭-
생도복을 휘날리며 달빛을 막아선 자.
다프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부우우우우웅!
그녀는 끌어낼 수 있는 마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고.
끝까지 숨겨 온 권능, 진정한 6위계의 힘을 마침내 개방했다.
6위계 확산계 마법, ‘화염 거인의 진노’의 복잡한 술식이 허공에 그려질 무렵.
탁-
갑작스럽게 땅에 떨어진 붉은 관모.
‘응?’
맺고 있던 마력이 또다시 급격하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는 걸 인지한 그 순간.
빠아아아악!
안면부의 엄청난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다프네는 사정없이 벽 쪽으로 처박혀 버렸다.
푸스스스스…….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 사이로 루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멍하게 입만 벌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생도들.
“자, 잠깐? 이건 사람을 때린 소리 같은데?”
“꺄아아악! 다프네 님!”
슈리에가 경악하며 달려간다.
벽에 처박혀 있는 다프네.
이미 혼절한 듯, 그녀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아? 이런 미친 놈!”
시론이 살아 있는 괴물을 보듯이 루인을 쳐다본다.
진짜 저 아름다운 다프네를 때렸다고?
아니 그것보다 녀석이 마법사가 맞긴 한 건가?
“아.”
리리아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마법사의 모든 상식이 부정되는 장면에서 드디어 깨어난 것이다.
루인이 유령마장의 영관모를 다시 주워 들며 무심하게 말했다.
“한심하군. 전부 한 방 감이잖아?”
그제야 맞은 배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한 시론.
리리아 역시 수치스러움에 몸을 떨며 이를 깨물었다.
“이런 실력으로 무투대회에 참가하겠다고?”
순간 루인의 두 눈이 진한 의문을 드러냈다.
“혹시 아카데미의 상급자들도 이렇게 약한 건가?”
부들부들.
시론과 리리아가 한참이나 선 채로 몸을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