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76화 (76/187)

<76화>

왕립 대전투장 제16관.

왕국에 들이닥친 7년 전의 대재앙 ‘유성 폭풍’에 의해 파괴된 후 아직 보수가 끝나지 않은 곳이었다.

르마델 왕국의 최전성기 시절, 아카데미의 생도 수는 2천여 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고작 7백여 명 수준.

당시의 생도 수를 기준으로 증축해 놓은 건물이었기에 어차피 쓰이지 않는 곳이나 다름없었다.

“…….”

깨어진 천장을 무심히 올려다보고 있는 루인.

교교하게 흘러내린 달빛이 여기저기 깨어져 있는 대리석 바닥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내 루인이 마력을 집중하며 감각을 뻗어 나갔다.

과연 대략 이백여 미터 내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루인이 생도들을 쳐다본다.

“누가 먼저 할 거냐.”

“나다! 내가 먼저 하겠다!”

시론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호기로운 눈빛을 빛냈다.

루인의 진짜 실력이 궁금한 사람은 시론뿐만이 아니었다.

칼날 같은 긴장감이 대전투장을 휘감았다.

“무투대회의 전투 규칙은?”

“당사자가 전투 의사를 포기하거나, 혹은 어느 한쪽이 전투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을 입었을 때 심판관들의 만장일치제로 승자를 가늠한다.”

“간단해서 좋군.”

루인이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은 채로 시론의 두 눈을 마주했다.

“시작하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론이 허공에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작열하며 타오르는 붉은 광구.

3위계 확산 마법 마력폭열(魔力暴熱)이 잔인한 열기를 머금기 시작했을 때.

루인의 몸이 마치 활처럼 꺾어졌다.

생도들이 본 것은 마치 잔상처럼 번져 가는 루인의 전신, 거기까지였다.

퍼벅!

흐릿한 루인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 곳.

“끄어어어……!”

그곳은 시뻘게진 두 눈으로 배를 움켜잡고 있는 시론의 바로 옆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처절한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깊숙이 파고든 주먹.

“끄으으…… 끄으…….”

시론이 혼절하기 직전처럼 눈이 뒤집어지자 세베론이 기함하며 달려 나왔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루인이 주먹을 털어 내며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시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 비겁하잖아! 이런 건 대마법 전투가 아니야!”

세베론은 마법사의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생도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루인이 왜 기사처럼 날렵한 몸놀림을 보이는지에 대한 의문보단 분노가 먼저였다.

-호오? 드디어 생명력의 치환(置換) 없이 혈주투계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나?

몰라보게 달라진 루인의 혈주투계(血朱鬪界)에 쟈이로벨의 짧은 감상이 이어졌다.

4위계에 오른 루인의 융합 마력은 이제 마계로부터 뿜어져 오는 순수한 진마력 못지않았다.

간단한 술식만 첨가하면 마력만으로도 혈주투계를 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이 반년 동안 악착같이 단련해 온 육체까지 시너지를 일으켰다.

오히려 생명력으로 펄떡거리는 젊은 육체는 전생의 그것보다 훨씬 위력적이었다. 적어도 혈주투계만큼은 전성기의 기량에 거의 근접해 가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혈주투계는 전생에서도 그다지 경지가 높지 않았다.

흑암의 공포가 지녔던 진정한 권능에 비하면 그저 보조 수단.

문제는 이 보조 수단조차도 생도 수준에서는 범접하기 힘든 경지의 전투 체술이라는 것이었다.

루인이 배를 움켜쥔 채 공포로 젖어 있는 시론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규칙을 위반했나?”

“으으…….”

말 그대로 무투대회.

마법이든 체술이든 검술이든, 생도들의 역량을 제한하거나 구속하지 않는다.

리리아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되어 루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 기사였나?”

또다시 마주한 루인의 불가사의였다.

마법에 대한 놀라운 혜안과 관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드높은 식견.

학풍을 가늠할 수 없는 독특한 술식.

하지만 리리아는 앞선 모든 놀라움보다 지금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마도명가의 일원으로 살았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인전에 국한한다면 마법사들에게 기사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를.

한데 지금 루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보다 더욱 위력적인 기사의 몸놀림을 보여 주고 있었다.

현상과 본질을 보는 눈, 마안(魔眼)으로도 좇을 수 없는 움직임.

지금까지는 그런 기사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

말없이 웃고만 있는 루인.

여기에 모여 있는 모든 생도들이 루인의 첫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육체가 기사의 것일 리가 없었다.

“기사는 아니지.”

루인이 흰 이를 더욱 환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기사를 상대하는 방법은 알고 있다.”

오싹!

그것은 강렬한 기세도 강자의 오만도 아니었다.

반대로 말한다면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더 쉽다는 의미.

무심한 루인의 그런 확언(確言)만으로도 리리아는 온몸에 전율이 치밀었다.

“……아직 난 기사와 대인전을 할 수 없다.”

루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고 있다.”

“너와 진정한 대마법전을 해 보고 싶다.”

그 순간 루인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리리아는 알지 못했다.

그 말이 얼마나 더 절망적인 결과를 초래할지를.

리리아의 정신은 아직 약했다.

과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루인은 그녀의 강렬한 열정이 마음에 들었다.

“좋다.”

루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리리아는 단숨에 거리를 벌렸다.

움직임만으로도 어브렐가라는 마도명가의 치밀함이 엿보였다.

그렇게 리리아가 강렬한 눈을 빛내고 있을 때.

저벅.

루인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리리아가 이를 악물며 수인을 뻗었다.

스스스스스-

루인이 마주 손을 뻗자 움직임을 봉쇄하는 약화계 특화 마법, 리리아의 마력 감속 주문이 간단하게 흩어졌다.

자신의 마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하자 리리아의 두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술식이 이어지지 않는다.

회로들이 미친 듯이 꼬이고 있다.

악착같이 집중하며 주문을 외우려고 했으나 언령조차 봉쇄된 듯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 이게 뭐지?’

모종의 결(結)이 모든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런 미지의 힘이 마력을 흩어 내고, 회로를 침범해 오며, 언령과 술식을 완벽하게 봉쇄한다.

감각으로는 분명 느낄 수 있는데, 대체 어떤 방식으로 구현해 내는 힘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저벅.

루인이 또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의 오른손이 환상처럼 유려하게 다시 뻗어 간다.

‘아……!’

그 순간 리리아는 아득해지는 의식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었다.

정신이 모이지 않았다.

심상이 갈래갈래 찢어지고 있었다.

이를 악물며 흩어지는 정신을 집중하려 했지만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이런 게 마법(魔法)이라고?

온몸으로 감당하면서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이건 마치 절대적인 권능 그 자체.

저벅.

루인의 발소리는 이제 공포였다.

그 압박감을 필설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순간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나약한 마음만이 들끓고 있을 때.

어느새 루인이 지근거리에 다다랐다.

그의 입매가 기묘하게 비틀린 순간.

츠츠츠츠츠-

천천히 떠오른 잿빛의 마나볼(Mana Ball).

위력은커녕 그가 펼치고 있는 마법의 정체조차 알 수가 없다.

파파파파파팟!

갑자기 마나볼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하자 엄청난 대지 돌풍이 자욱한 먼지를 일으킨다.

콰악!

루인이 마나볼을 움켜쥐자.

순식간에 공기가 사방으로 밀려나며 굉음을 터뜨렸다.

파아아아앙―

미친 듯이 흩날리던 은빛 머리칼이 잦아들었을 때.

공포로 젖어 있던 리리아의 두 눈이 드디어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마지막에 루인이 마나볼을 움켜쥐지 않았다면 칼날 같은 대지 돌풍에 의해 자신의 얼굴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거라는 것을.

“아…… 아아…….”

이런 건 그녀가 상상해 온 대마법전이 아니었다.

마치 믿어 온 모든 상식이 부정되는 기분.

다프네가 토끼 눈을 뜨며 달려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혹시 이건 절대봉쇄주문(絶對封鎖呪文)…… 마지막엔 정신주박(精神呪縛)의 일종인가요?”

생도들 모두가 찢어질 듯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일정한 구역을 시전자의 마력으로 통제하는 절대봉쇄주문은 초고위의 영역.

게다가 상대의 정신계를 침범하는 마법이라니?

그야말로 전설과 상상 속의 경지.

정신계 마법은 드래곤들의 전유물로 현자들조차 감히 시도하지 않는 마도의 극한이었다.

-끌끌! 나의 메아트마를 유치하게도 변형시켜 놓았구나.

메아트마(ѩѯѯѹ).

상대의 정신계에 침범하여 착란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고위 흑마법.

메아트마는 마신 쟈이로벨이 즐겨 구사하는 그런 정신계 흑마법들을 총칭하는 단어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저 내게 유리한 ‘마력 필드’를 구사했고 마지막은 슬립(Sleep) 마법과 잔풍계 마법이었다.”

“마, 마력 필드? 슬립?”

백마법과 결은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마신 쟈이로벨, 아니 흑암의 공포가 구사했던 흑마법이 융합되어 있었다.

“거, 거짓말! 분명 정신계 마법이었어요! 고작 슬립 마법 따위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정신 속박을……!”

루인이 리리아를 쳐다봤다.

“잠이 오지 않았나?”

“…….”

분명 리리아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수마(睡魔)가 아니었다.

단순한 슬립 마법이 마법사의 심상을 찢어 놓을 수가 있나?

슬립 마법이 3위계에 이른 마법사의 정신까지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위력적이다?

그렇다면 진즉에 대마법 전투는 슬립 마법에 의해 평정되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대마법 전투라는 것이 성립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모두가 염동 마법이었어…….’

리리아는 치가 떨려 왔다.

루인의 무시무시한 염동력을 직접 경험해 보니, 이건 도무지 같은 인간의 경지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디스펠?

대응?

마법의 발현조차 감각에 걸리지 않는 마당이다.

마치 마법의 신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

이런 압도적인 경험은 마도명가 어브렐가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컸는지, 리리아는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마력 필드는 들어 보지도 못했어요! 무슨 마력 필드가 상대의 마력과 술식, 언령까지 통째로 봉인할 수 있어요?”

유희하고 있는 주제에 드래곤의 정신 마법을 드러내다니.

이렇게 정체를 쉽게 드러내고 다녀도 괜찮다는 건가?

다프네는 루인이 고작 생도들과의 대결에서 필요 이상의 힘을 드러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세계의 질서, 즉 ‘맹약’에 위배되는 행동을 철저하게 경계하는 편이 아니었나?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루인이 다프네와 마주 섰다.

“직접 경험해 보면 될 것을.”

“…….”

그 순간 다프네의 머릿속에서 모든 의문들이 사라졌다.

위대한 종족과의 대마법전을 경험할 기회라.

마법사의 인생에서 결코 쉽게 접할 수 없는 기회다.

“전력을 다해도 되겠죠?”

열기 어린 다프네의 질문에 루인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숨기고 있는 것이라도 있나.”

“물론이죠.”

지이이잉-

공간이 찢어지며 휘황찬란한 빛을 머금은 아티펙트가 드러난다.

“우와!”

“오오!”

생도들이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총천연색의 수정 구슬을 감싸고 있는 유백색의 지팡이.

생도들로서는 결코 구할 수 없는 수준의 마법 스태프였다.

“인사드리죠. 저의 소중한 동반자 ‘서리의 입김’이랍니다.”

루인이 신중한 표정으로 마법 스태프를 살폈다.

마력에 대한 촉매력과 감응력을 높여 주는 마법 스태프.

수준에 따라 최소한 두 배, 뛰어난 아티펙트라면 다섯 배 수준까지 시전자의 마력을 배가시킨다.

루인이 예상하는 다프네의 경지는 6위계.

고위 마법사를 눈앞에 앞두고 있는 다프네가 마력 스태프까지 쥐고 있다면…….

“어쩔 수 없군.”

츠츠츠츠츠츠츠-

허공이 찢어지며 시커먼 공간이 드러난다.

모두의 입이 벌어졌을 때.

루인이 시커먼 공간으로 팔을 집어넣으며 씨익 웃고 있었다.

“나도 무기는 많거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