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대공…… 그래, 이맘때쯤이었나.’
하이렌시아가의 가주가 대공이 될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지 못했다.
전생, 그러니까 하이베른가로부터 뛰쳐나온 건 지금의 시기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으니까.
‘이제 모든 것이 급변한다.’
하이렌시아가가 대공가로 거듭난 그즈음부터, 르마델 왕국의 정세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역사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1왕자 아라혼에게 온갖 폐륜의 혐의가 덧씌워질 것이다.
결국 르마델의 국왕은 오랜 전통을 깨고 1왕자를 실각시킨 후 6왕자 케튜스를 왕세자로 책봉한다.
모든 파멸의 시발점.
1왕자 아라혼이 얼마나 엄청난 괴물이 되어 돌아올지를 지금의 누구도 알지 못한다.
‘잘하고 있으려나…….’
이미 씨앗은 뿌려 두었다.
6왕자 케튜스와 그의 지지 세력들은 어떤 형태로든 하이렌시아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잘 해내고 있다면 지금쯤 아라혼은 그런 하이렌시아가와 끈질기게 암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아라혼이 자신의 충고를 듣고 본인에게 드리운 음모를 기필코 이겨 낸다면 역사는 충분히 바뀔 수 있었다.
‘그래도 확실히 해야 한다.’
아라혼이 또다시 ‘악제의 군단장’이 되는 일은 막아야 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테니 루인은 기회가 닿으면 다시 그를 만나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신중하게 생각을 정리하던 루인이 시론의 말을 상기했다.
‘나쁘지는 않아.’
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가 남긴 유적을 탐험할 수 있는 권한.
거기에 하이렌시아가의 암묵적인 후원.
우승자의 혜택은 충분히 좋은 편이었다.
먼저 하이렌시아가의 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동향과 의도를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말.
문제는 테아마라스의 유적이었다.
그는 백마법계의 신(神)적인 존재.
그런 엄청난 인물의 유적이 남아 있었다면 전생의 자신이 알고 있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떤 문제로 인해 테아마라스의 유적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라면 반드시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었다.
전생, 이 당시의 자신은 가문에서 누워만 있었던 상태.
따라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역사에 대해서는 동료를 통해 들은 것이거나 사료, 즉 활자로 접해 본 것이 전부였다.
일단 테아마라스의 유적에 대한 정보부터 모아야 했다.
“테아마라스의 유적에는 뭐가 남아 있는 거지?”
시론의 눈빛이 금방 열망으로 타올랐다.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다만 유적에서 살아남는 것에 성공한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대마법사로 성장했지.”
“살아남는다고? 단순한 유적이 아니란 뜻인가?”
“유적 내부에 위험한 트랩들로 가득하다고 들었다. 과거에 왕립 기사단 하나가 통째로 전멸한 적도 있다.”
“왕립 기사단이……?”
좀처럼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루인조차 놀라고 있었다.
르마델은 기사 중심의 국가.
그런 르마델의 왕립 기사단은 알칸 제국의 기사들조차 인정하는 대륙 최고 수준의 무력을 지닌 집단이었다.
그런 왕립 기사단이 고작 유적을 탐험하다 전멸했다는 것이 루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위험한 곳이라면 아카데미의 생도 수준으로는 탐험이 불가능할 텐데?”
“당연히 왕실의 지원을 받는다. 왕립 기사단의 기사들은 물론 마탑의 마도학자와 고위 마법사가 함께 동행한다.”
그렇다는 건 르마델 왕국으로서도 큰 출혈을 감수한다는 뜻이었다.
만약 유적에서의 생환이 불투명해질 경우.
왕국의 기사들, 마탑의 고위 마법사, 뛰어난 생도들을 동시에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도박을 감행한다는 건 한 명의 대마법사가 갖는 파괴력 때문일 터.
한 국가가 현자급의 대마법사를 보유한다는 건 단순한 전력 이상의 의미였다.
미래 가치를 위한 도전적인 투자인 셈.
“목숨을 거는 도박이 너희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가?”
루인의 두 눈이 생도들을 훑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마법사들은 확률을 싫어하는 집단.
우승한 마법 생도들의 소원이 그런 도박이라는 게 루인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뭐라는 거냐 넌.”
“음?”
리리아의 눈이 강렬한 빛을 머금었다.
“그 도박이 성공한다면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건 테아마라스 님께서 남기신 위대한 마도다. 그런 드높은 마도를 궁구(窮究)할 수 있다면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목숨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루인은 테아마라스가 이들 백마법사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비로소 현실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상투적인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는 백마법사들에게 신(神)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내가 무투대회에 참가하지 않겠다면?”
시론이 강렬한 눈빛을 빛내며 이를 깨물었다.
“밤이고 낮이고 설득할 거다! 4년마다 돌아오는 무투대회를 절대로 그냥 구경만 할 순 없다!”
“졸업 전에 한 번 더 기회가 있는 거 아닌가?”
이번 무등위 생도들은 생도 시절 동안 무투대회를 2번 경험할 수 있는 축복받은 기수.
“내 말이! 우리 기수에겐 기회가 두 번이나 주어진다! 모두 도전해야 한다!”
잠자코 지켜만 보고 있던 세베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시론. 상급자들은 팀을 구성하고 적어도 1년 이상 합을 맞춰 준비했을 거예요. 무투대회까지는 고작 3개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시론이 루인과 다프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헤데이안 학부장의 트랩 마법을 디스펠한 루인! 현자의 수제자 다프네! 게다가 이 시론까지! 이 정도면 충분히 우승을 노려볼 만하다!”
슈리에의 의기소침한 대답이 이어졌다.
“다행이네요. 그 이름 중에 제 이름이 없다는 건. 전 그 무시무시한 선배 생도들과 무모하게 싸우고 싶진 않아요. 전 빠질게요.”
“뭐?”
갑작스러운 슈리에의 불참 선언.
그렇다면 남은 인원이 모두 참여 의사를 밝혀야 단체전이 가능했다.
단체전은 5명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
금방 시론의 불길한 시선이 리리아를 향했다.
“혹시 너도 빠지는 건가?”
겉보기엔 궁합이 좋지 않아 보여도 학기 내내 리리아와 슈리에는 붙어 다녔다.
만약 리리아가 같은 뜻이라면 이번 무투대회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리아의 차가운 시선이 루인에게로 이어졌다.
“저 녀석의 답부터 듣겠다.”
돌고 돌아 결국 루인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루인의 입매가 예의 사납게 비틀린다.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조건?”
이 애송이들과 굳이 함께해야 한다면 루인은 철저하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할 생각이었다.
“첫째, 밑천을 남김없이 꺼내라.”
시론이 피식 웃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루인의 시선은 리리아에게 고정된 채 흔들림이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을 즐기는 시론과는 달리, 지금까지 그녀는 철저하게 자신의 경지를 절반쯤 숨기고 있었다.
리리아가 표독하게 되물었다.
“왜 그래야 하지?”
밑천을 모두 꺼낸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학파가 드러나게 된다.
무등위 생도부터 뷰오릭 학파를 따른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앞으로 수많은 편견과 핍박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마탑에 입성하기 전까진 최대한 숨기고 싶은 것이 리리아의 심정.
북부 학파에 속한 왕국, 르마델에서 뷰오릭 학파의 마법사로 산다는 건 그만큼 힘겨운 일이었다.
“어느 정도로 믿어도 되는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가 등을 맡길 수 있겠나?”
리리아는 침묵했다.
하지만 그녀의 도전적인 눈빛은 여전히 죽지 않았다.
“우습군. 넌? 이 중에서 가장 의뭉스러운 마법사는 너다. 본인부터 밑천을 밝히지 않는 주제에 무슨 그런…….”
“약속한다면 모두 드러내 주지.”
“어……?”
전투는 고결하다.
적을 상대하며 등을 맞대고 있는 동료를 믿지 못한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
이런 점만큼은 전생에서부터 언제나 일관된 태도를 유지해 온 루인이었다.
“…….”
뷰오릭 학파를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런 루인의 강렬한 눈빛에 리리아는 흔들리고 있었다.
“전 약속해요.”
다프네가 싱긋 웃어 보이자 시론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세베론도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알겠어요. 약속하죠.”
모두의 시선이 리리아에게 모이자 결국 그녀도 입술을 깨물며 읊조리듯 입을 열었다.
“……약속하지.”
“리리아!”
슈리에가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고 있었지만 리리아는 자신의 약속을 번복하진 않았다.
“두 번째 조건은 뭐지?”
시론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루인.
“전투에 관한 모든 전권을 내가 행사하겠다.”
“저, 전권이라뇨?”
루인이 세베론을 바라본다.
“말 그대로다. 훈련에 관한 제반 사항, 또한 대마법 전투 중에 일어나는 모든 전략과 지시. 이것들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난 참여할 의사가 없다.”
“아니 그건!”
시론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체로 팀이 유명해지면 그 팀의 리더가 이명(異名)을 얻는다.
이번 파티의 주역이 되고 싶었던 시론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
그러나 루인이 참가하지 않으면 다프네와 리리아가 참여하지 않겠다는 마당에 그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제길, 너도 어쩔 수 없는 생도였군.”
늘 욕망에 초월한 척하더니 이제 보니 속이 시꺼먼 놈이 아닌가?
그런 시론의 불만스러운 반응에 루인은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다프네가 루인의 요구에 화답했다.
“루인 님을 따르겠어요. 오히려 제가 먼저 요구하고 싶었는걸요?”
다프네는 누구보다 중요한 전력의 핵심.
결국 시론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제길. 알았다.”
“뭐 그렇다면 저도…….”
“그다음 요구는? 세 번째는 뭐지?”
리리아의 날 선 질문.
이번만큼은 루인도 조금은 동기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팀의 전력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나의 개인전 참여를 너희들이 허락하는 것이다.”
“개인전?”
“미, 미친!”
마법 생도가 개인 토너먼트에 참여하겠다니!
간혹 관심을 받고 싶어서 개인전에 참여하는 마법 생도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1회전 탈락이라는 뼈아픈 고배를 마시게 된다.
개인전은 엄연히 기사 생도들의 축제.
거기에 마법 생도가 낄 자리는 없었다.
“왜지?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거냐? 수치심과 패배를 즐기는 게 아니라면…….”
“보험이지. 팀이 우승하지 못한다면 혼자서라도 우승을 해야 하니까.”
“뭐?”
루인은 마음에 목표를 세운 이상 허투루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분명 테아마라스의 유적에는 자신이 모르는 역사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왠지 꺼림칙했다.
악제는 오랫동안 인간 진영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시간과 자원을 소모해 왔으며, 그 일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고 판단했을 때 세상에 나왔다.
과거, 그런 악제의 마수에 테아마라스의 유적이 파괴된 것이라면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뭐, 어차피 1회전에 탈락할 테니 팀의 전력에 차질을 빚는 일은 없겠죠.”
세베론의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상관없다.”
“저도요.”
“하긴 그렇겠군.”
그때 루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이제 서로의 밑천을 마주할 시간이군.”
“응?”
“훈련에 관한 모든 제반 사항을 내게 맡기기로 하지 않았나?”
루인이 시론을 내려다보았다.
“시론. 대마법 전투장을 섭외해라.”
“가, 갑자기?”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훈련할 수 있는 곳. 아니, 아예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곳이면 좋겠군.”
시론이 일어나며 물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루인의 새하얀 치아가 고르게 반짝인다.
“너희들 모두 나와 대인전을 치른다.”
그 순간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