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리리아의 서슴없는 질문에 루인이 말없이 루이즈를 바라보았다.
‘루이즈…….’
동료들끼리 서로 목숨을 지키게 하는 방법이라…….
그따위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서로를 이해한 마음의 문제다.
함께 쌓아 올린 추억의 높이다.
등을 맞대고 적을 마주한 공포의 결과이며, 안타깝게 보낸 슬픔의 동질감이다.
자신의 삶을 관통해 온 그 촘촘한 밀도를, 어찌 단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단 말인가.
수만 년을 지나 루이즈를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녀와의 추억에 이렇게 온 마음이 시려 오는데…….
저렇게 가볍게, 이리도 함부로 말하는 리리아에게 루인은 잠시 화가 치밀었다.
“우리가 무얼 했지?”
“……?”
리리아의 두 눈에 의아함이 번지자 루인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나는 네가 왜 우는지 모른다. 네가 왜 그렇게 마음을 닫고 있는지를 모른다. 간혹 삶을 포기한 듯한 네 눈빛의 이유도 알 수 없다.”
리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자신에 대한 루인의 감상이, 순식간에 가슴을 헤집고 들어와 마구잡이로 뒤젓는 기분이었다.
삶을 포기한 듯한 눈빛이라니!
한 번도 그런 마음을 품어 본…….
아……!
리리아는 가문으로 가기 전, 루인과 대화를 나눴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의 자신이라면…….
루인의 감상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너는 나에 대해 무얼 알지?”
직시해 오는 루인의 눈빛에, 리리아는 마음속의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루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실망감 때문이 아니었다.
‘언니…….’
루인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은 언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브렐가의 그 누구도.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 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변해 버린 어브렐가의 혈족들.
지금까지 자신이 마음을 닫고 살았던 것이 무슨 이유였는지 이제야 모두 깨닫게 된 것이었다.
루인은 그렇게 슬픔으로 차오른 리리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저 웃고 있었다.
비틀리거나 차가운 감정이 아닌, 리리아가 처음으로 마주한 루인의 진짜 웃음이었다.
“좋지 않은 일이 겹쳐 오거나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마주했을 때 굳이 입을 열어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다.”
루인의 시선이 생도들을 훑었다.
“친구를 가깝게 여긴다면 언젠가 위로를 받는 순간이 오겠지. 그러다가 어깨를 빌리고 싶어지고, 또 함께 웃고 싶어질 것이다.”
시론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루인의 모습에 자꾸 할아버지가 겹쳐 왔기 때문.
이건 마치 할아버지의 따뜻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분명 자신과 나이가 같거나 비슷할 텐데, 왜 자꾸만 이런 느낌이 드는 건지 시론은 이해할 수 없었다.
“너. 너무 애늙은이군.”
“어렸을 때 고, 고생을 많이 했나?”
다프네가 그런 루인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드래곤이 위대한 생명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드래곤이 인간의 감정을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이해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마도서 속의 드래곤들은 인간의 감정을 좋게 봐야 유희의 도구, 나쁘게는 나약함의 원천으로 보고 있었다.
인간은 언제나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나약한 존재이며.
그 독특한 인간의 감수성이 바로, 마법의 경지를 방해하는 가장 원천적인 요소라고 그들은 이해하고 있었다.
마도서가 틀리지 않았다면 이 드래곤은 틀림없이 독특한 개체.
인간이라는 유희의 삶에 완벽히 녹아들 수 있는 드래곤이다.
이토록 인간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인간과의 교류를 끊임없이 이어 왔을 것이다.
다프네는 루인이 하이베른가의 비셰리스마일지도 모른다는 스승님의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건국 설화 속 백룡 비셰리스마.
그는 그 어떤 존재보다도 인간을 교감하고 사랑하는 드래곤이었다.
어느덧 다프네가 차갑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런 건 생도 간의 교우 관계가 아니죠. 너무 거창해요. 생도 생활은 고작 몇 년인데 당신의 말대로라면 수십 년도 모자라겠는걸요?”
“…….”
“그저 과제를 함께하고 아카데미 생활의 어려움을 같이 극복하는 거죠. 하지만 그런 거창한 게 관계에 대한 당신의 관점이라면 이 왕립 아카데미에 오지 말았어야 해요.”
의외로 루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가문의 정상화.
세계의 멸망을 대비한 마법 수련.
이들은 자신의 거대한 운명을 이해할 방법도, 또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이다.
가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급했던 자신의 마음이 또 한 번 바보 같은 욕심을 부린 것이다.
이들도 데인이나 데아슈, 위폰처럼 그저 어린아이, 한창 꿈 많을 마법 생도에 불과하다.
이런 아이들에게 자신의 동료라는 거창한 운명을 덧씌우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방식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니.
“그래. 바보 같았군. 인정한다. 내가 어설펐다는 것을.”
루인이 바닥에 앉으며 이미지 자세를 취했다.
“왕립 아카데미 생도로서의 본분, 원만한 교우 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하지만 너희가 만족할지는 모르겠군.”
그 말을 끝으로 루인이 곧바로 심상 수련에 들어갔다.
시론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루인을 바라보다 주위를 환기시켰다.
“자, 이제 대책 회의를 좀 해 보지. 청강을 다니는 건 문제 될 것이 없고. 문제는 지독한 과제들과 학기 말에 열릴 무투대회 정도겠지?”
슈리에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무, 무투대회라뇨?”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왕립 아카데미의 무투대회는 상급 생도들의 축제다.
적어도 3등위 이상의 견장은 달아야 참여해 볼 만한 수준으로, 웬만한 실력으로는 예선조차 통과할 수 없었다.
게다가 개인전은 기사 생도들의 축제.
대인전에 취약한 마법사의 특성상, 개인전은 깔끔하게 포기해야만 했다.
단체(Party)전도 문제가 있었는데, 한 번도 손발을 맞춰 본 적이 없었기 때문.
이미 마법학부의 상급자들 중에는 원소 계열, 특화 계열, 보조 계열, 강화 계열 등으로 이뤄진 완벽한 조화와 호흡을 자랑하는 팀들이 즐비했다.
“시론? 지금까지 무등위 생도들이 무투대회에 참여한 적은 없어요!”
세베론은 상급자 생도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이명(異名)을 쟁취한 생도들만 해도 수십여 명.
특히 ‘생동하는 화염’ 유리우스나 ‘그림자 혹한’ 타가옐은 생도의 수준을 아득히 벗어난 강자들이었다.
본인의 순수한 능력만으로도 귀족의 작위를 쟁취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마법의 권능자들.
그들뿐만 아니라 출전하는 팀들의 대부분이 입탑 예정자이거나 왕국의 주요 요직으로 내정된 생도들이었다.
시론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다프네를 쳐다봤다.
“다프네, 어때?”
“흐음…….”
다프네만 참여한다면 승산 없는 싸움은 아니다. 현자의 수제자라는 위상은 그만큼 대단했다.
그런 다프네가 루인을 응시했다.
“루인 님이 참가한다면요. 초반에 탈락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호오……?”
시론은 지금 여기 있는 ‘목소리’의 구성원들은 마법학부 역사상 최고의 무등위 생도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예상되는 리리아와 슈리에의 경지는 최소한 2위계, 세베론 역시 2위계, 거기에 자신은 무려 3위계다.
마법사의 경지만으론 이미 2, 3등위 생도들과 나란한 것이다.
물론 술식의 깊이나 마법적 지혜는 상급자들이 더 높을 테지만, 문제는 저 다프네가 우리 편이라는 것이었다.
예상되는 경지는 최소 4위계.
아니 어쩌면 5위계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마탑의 고층 마법사, 아카데미의 교수, 마도학자로 나아가는 첫발이라 할 수 있는 5위계를 저 나이에 이룩한 미친 여자인 것이다.
5위계라면 상급 생도 중에서도 극상위권의 경지.
이미 이명을 떨치고 있는 몇몇 상급 생도들만이 도달한 그곳.
그들과 나란한 이가 저 다프네였다.
“루인만 참여하면 된다고?”
한데 그런 여자가 이 중에서 루인을 최고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사실 시론은 루인의 경지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상태였다.
분명 뛰어난 마도 지식과 통찰, 상식을 벗어난 염동력, 핵심을 꿰뚫는 혜안 등 모든 것이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4위계 이상? 5위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가 보여 준 마법이 모두 3위계 이하였기 때문.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헤데이안 학부장의 마법을 디스펠할 때였는데, 이 경우는 조금 결이 달랐다. 자신의 눈으로는 살필 수가 없는 경지의 마법이었던 것.
마법이란 확증을 전제로 하는 학문이기에 함부로 경지를 판가름할 수 없었다.
일반적인 논리라면 8위계의 대마법사인 학부장의 마법을 디스펠했으니 루인도 같은 8위계라는 뜻인데.
그건 불가능한,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가정이었다.
십 대 후반의 마법사가 현자와 맞먹는 경지라니!
인류의 마법 역사에 단 한 번도 그런 천재는 존재하지 않았다.
루인이 천천히 눈을 뜨며 이미지에서 벗어났다.
“참가의 목적은?”
“어? 모른다고?”
아카데미의 생도라면 모를 수가 없는데 이 정도까지 무심한 놈이라니!
다프네가 소리 없이 웃었다.
“우승자에겐 알현권(謁見權)이 주어지죠. 그리고 전통적으로 우승자들은…….”
“마법학부의 우승자들은 언제나 왕께서 내려 주신 소원권을 테아마라스의 유적을 탐험하는 데 써 왔다.”
“……테아마라스?”
테아마라스의 유적이 남아 있다니?
최초의 마법사가 레어(Lair)를 남기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지만 루인은 전생에서 무수한 백마법사들과 교류했지만 금시초문이었다.
하긴 흑마법이 완성된 이후, 그들의 마법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가치가 있는 일.
테아마라스의 유적이라면 자신의 마법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슈리에의 두 눈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4년마다 열리는 무투대회예요. 대부분의 생도들에게 기회는 한 번밖에 없죠. 이번에도 엄청난 선배들이 참가할 거예요. 소문으로 들었던 지난 무투대회는…….”
가히 전쟁을 방불케 했다.
특히 기사 생도들의 개인전.
그 무시무시한 전투들은 지금도 왕국의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개인전과 단체전, 둘 다 보상이 같나?”
“다르다.”
“무엇이?”
시론의 눈이 깊어졌다.
“명목상의 혜택은 같다. 같은 알현권이지. 하지만 누구나 개인전의 우승자를 더욱 경이롭게 바라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혜택이 훨씬 더 많지. 개인전이야말로 무투대회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말에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대인전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건 마법사의 숙명이었다.
마법사는 수인을 맺고 스펠을 외우며 또 언령한다.
염동을 일으키고 술식을 완성하는, 즉 시전 시간이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반면 기사들의 공격은 초 단위마저 쪼개며 짓쳐 온다.
단체전이면 몰라도 개인전은 마법사의 역량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무대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혜택이라. 구체적이지 않군.”
루인의 대답에 시론이 씁쓸하게 웃었다.
“모르는 소리. 무투대회를 우승한 기사 생도는 그 자체로 이미 귀족이다. 공작가의 후원을 받는 존재를 그 누가 무시할 수 있겠냐.”
“공작가? 하이베른?”
시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소식이 늦군.”
“무슨 뜻이지?”
“한 달 전, 하이렌시아가의 가주 레페이온 님이 왕국의 새로운 대공이 되셨다.”
“뭐……?”
지금까지 르마델 왕국의 공작가는 하이베른가 하나뿐이었다.
그 말인즉, 왕국의 공작가가 이제 둘이 되었다는 뜻.
“개인전의 우승자는 하이렌시아가의 암묵적인 후원을 받는다. 고작 생도의 몸으로 이 왕국의 권력, 그 중심에 서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