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여기군.”
시론이 친구들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마법학부 바깥 동의 어느 연구실.
최소한 몇 년 동안 사람의 출입이 없었다는 것을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마치 폐허를 방불케 하는 곳이었다.
곳곳에 얽혀 있는 거미줄, 수북하게 쌓여 있는 먼지, 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실험 도구 등.
세베론은 무엇을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한 심정으로 서 있었다.
“이건 정말 너무하네…….”
왕립 아카데미의 생도가 된 이후,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처음인 그였다.
명색이 무려 ‘왕립’인데 이렇게까지 생도를 버릴 줄이야.
슈리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게리엘도스 교수님께서 신경을 써 줘서 이 정도예요. 배정 교실이 아예 없는 것보단 낫잖아요?”
“제 말은 담당 교수도 없는데 교실이 무슨 의미가 있냐 이 말입니다. 아니 정말 남은 학부 생활 4년을 이렇게 보내는 게 맞나?”
세베론의 눈총에 시론의 몸이 움찔했다.
슈리에가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됐고. 어차피 그룹 브로치까지 받은 마당에 이제 무를 수도 없어요. 앞으로의 계획이나 함께 짜 봐요.”
슈리에의 그 말에 모두가 서로의 가슴팍을 쳐다본다.
꼴에 ‘목소리’라고 무려 ‘입술 모양’의 브로치다.
도대체 이 멍청한 디자인을 누가 고안한 건지, 세베론은 당장 찾아가서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룹에 속한 이상 함부로 브로치를 제거하는 것은 교칙 위반.
문제아의 상징인 이 저주받은 낙인이 앞으로 얼마나 더 평지풍파를 일으킬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합류한다는 애들은 왜 안 오는 거지? 일손이라도 더 있으면 좋을 텐데.”
“아아, 철없는 귀족 녀석들은 제발 참아 줬으면 좋겠어요. 걔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슈리에의 그런 바람이 통했을까.
얼마 후, 연구실에 도착한 무등위 생도들은 귀족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아…… 너희는…….”
한눈에 의기소침함이 느껴지는 한 쌍의 남녀.
그들을 잘 알고 있었던 시론이 인상을 찡그렸다.
유명한 녀석들이다.
물론 나쁜 의미로.
세상에 천재가 있다면 당연히 바보들도 있었다.
낙제생 말코이, 그리고 벙어리 소녀 루이즈.
녀석들은 처참한 성적 때문에 목소리에 속하게 된 것.
전반기 이수 학점 0점에 빛나는, 어떻게 입학했는지부터가 불가사의인 유명한 무등위 낙제생들.
그런데 그때.
폭풍을 만난 것처럼 루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손끝이 사정없이 떨려 온다.
“아…… 아…….”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여린 표정에서.
작은 슬픔을 덜어 낸다.
거기에 투명한 분노를 얹고.
칼날 같은 기세를 덧씌우면.
“루이즈…….”
적요(寂寥)하는 마법사.
침묵의 심판관 루이즈.
그런 소중한 전생의 인연이.
여기에, 저 작은 모습으로, 저런 슬픈 눈으로 서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 루이즈에게 루인은 차마 계속 시선을 둘 수 없었다.
다시 사라져 버릴까 봐.
또다시 산화하며 부서져 버릴까 봐.
미친 듯이 심장이 조여 왔다.
“루인? 아는 사이인가?”
의아함을 가득 담은 시론의 질문.
자신의 일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루인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시론의 의문은 당연한 것.
“…….”
어찌 그녀를 몰라볼 수 있을까.
당연히 루이즈를 알고 있다.
그녀는 바람의 대행자, 시르하의 연인.
다만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만났기에 몸과 영혼이 굳어 버렸을 뿐.
그녀가 시르하와 더불어 르마델 왕국 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그녀가 왕립 아카데미에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루이즈는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는 루인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말을 할 수 없었던 루이즈는 사람의 눈으로 감정을 읽었다.
촘촘하게 얼룩져 있는 감정.
왜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보고 있는 건지 루이즈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온 마음으로 견디던 루인이 가까스로 웃었다.
“안녕. 루이즈.”
리리아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루인이 저토록 기꺼운 마음으로, 저리도 살갑고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
멍한 얼굴의 루이즈가 루인이 건넨 손을 마주 잡았다.
“아으… 우…….”
루인이 스스럼없이 루이즈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난…….”
온 마음이 무너질 듯 내려앉는다.
그녀의 희생, 그녀가 했던 마지막 선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했는지 루인만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그녀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있는 건 오직 자신 하나뿐이었다.
서글펐지만 기뻤다.
그녀가 이렇게 살아 있어서, 이렇게 나타나 줘서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여기까지.
더 이상은 그녀의 감정을 자극해선 안 된다.
동료들의 과거에 지나친 개입을 한다면 오히려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것을 황금 거인 산의 일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
자칫하다간 그녀가 시르하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사는 그쯤 하지. 우선 연구실 정리가 시급하니까.”
차가운 리리아의 목소리.
묘해진 분위기 때문인지 세베론도 거들었다.
“그렇죠. 이거 오늘 안에 끝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데요.”
시론이 으쌰으쌰 팔을 휘휘 저으며 외쳤다.
“까짓거 할 수 있다!”
그 순간.
우우우웅-
다프네의 수인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에 맺힌다.
푸르스름한 마력의 기운이 간질이듯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쏴아아아아-
잦아들듯 마력이 사라진 자리.
연구실의 잔해들을 덮고 있던 먼지들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사방에 가득했던 거미줄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잦아드는 마력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건 마치 모든 불순하고 더러운 것들이 이 세상에서 완벽히 ‘삭제’되는 듯한 장면.
슈리에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정화(Purification) 마법…… 그것도 최상급이야…….”
눈앞에서 입탑 마법사의 위력을 실감한 슈리에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세상에, 이 정도로 대단한 마법이라니.
자신의 경지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마법이었기에 마치 다프네가 신처럼 느껴질 지경.
‘흥,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건지.’
시론은 그런 다프네가 못마땅했다.
아카데미를 건너뛰고 곧바로 입탑 마법사로 활동할 만큼 그녀는 천재적인 마법사였다.
무려 할아버지의 수제자인 주제에 왜 굳이 아카데미까지 와서 위화감을 조성하는지 시론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루인을 영입하려는 목적이었다면 보다 치밀한 방법도 많을 텐데 말이지.’
저런 천재 마법사의 머리에서 나온 방법이란 것이 고작 미인계라니.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다프네의 목적이 그리 단순할 것 같진 않았다.
‘설마 할아버지께서?’
그녀가 할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론은 이내 피식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 르마델 왕국의 위대한 현자가 고작 한 명의 무등위 생도를 영입하기 위해 수제자를 파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좋군. 그럼 시작하지.”
리리아가 먼저 연구실의 잔해들을 정리하고 나섰다.
어색하게 서 있던 낙제생들이 리리아를 돕기 시작하자 다른 생도들도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한 시간 후.
“오! 어느 정도 교실 같군요 이제!”
손을 털며 웃고 있는 세베론을 향해 슈리에가 마주 웃었다.
“제법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이제 와서 막 의욕이 샘솟는 이유를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그런 건 아니고…….”
굳이 암담한 미래를 상기시켜 줄 필요까진 없는데.
금방 시무룩해진 세베론의 어깨 위로 시론의 팔이 걸쳐진다.
“자, 이제 우린 무얼 하면 되나?”
시론이 루인을 바라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말해 두지.”
루인은 이 바보 같은 놈들에게 확실히 자신의 의지를 피력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선을 지켜라. 난 너희들에게 이곳을 강요한 적이 없다. 너희들의 선택까진 존중한다. 하지만 나에게 뭘 바라는 건 선을 넘은 행동이다. 난 교수가 아니다.”
슈리에가 시선을 외면하자 루인의 차가운 음성이 다시 울려 퍼졌다.
“난 알아서 심상 수련을 할 것이고 마도서를 읽을 것이다. 또한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수업만을 찾아서 들을 것이다. 학점도 마찬가지. 누구의 과제를 도울 생각도 도움받을 생각도 없다.”
시론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 그건 좀 곤란한데. 넌 대체 아카데미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뭐?”
“그렇게 모든 걸 혼자 하고 싶었다면 대체 아카데미에 왜 온 거지?”
슈리에가 거들었다.
“마, 맞아요. 기본적으로 아카데미의 룰은 협력 생활이죠. 본인이 무식하게 똑똑해서 잘 모르나 본데, 애초에 마법학부의 과제들은 개인이 해결할 수 없게 설계되어 있어요. 각자의 재능과 특성을 살려서 반드시 협력해야 살아남을 수 있죠.”
시론이 문득 리리아를 시선으로 가리킨다.
“리리아를 봐. 아마 개인적인 성향은 너보다도 저 여자가 더할 거다. 그런데 저 리리아가 한 번이라도 어울리는 것에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루인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진다.
반박할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핏덩이들과 상큼발랄한 아카데미 생활을 계속하라는 건 대마도사에게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도 생도들과 협력하는 것보단 쟈이로벨과 의견을 나누는 것이 훨씬 마법의 경지에 도움이 되는 편이었다.
사실 루인은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이 조금 극단적인 편에 속했다.
타인이 자신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다는 건 일종의 목숨을 나눈다는 의미.
흑암의 공포는 지난 생 내내 그렇게 살아왔다.
“…….”
루인이 대답 없이 생각에만 잠겨 있자 리리아가 차갑게 물었다.
“관계에 큰 의미를 두는 편인가.”
핵심을 짚어 오는 리리아.
루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에게 ‘관계’란 함께 삶을 나아가는 동료.
세상의 마지막까지 등을 맞대고, 목숨으로 서로를 지켜 주는 그런 각별한 관계였다.
이 새파란 젊은이들이, 과연 자신에게 그런 의미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일까?
만약 그런 사람들이라면 이들 하나하나를 데인처럼 여길 것이다.
루인에게 동료란 가족,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그래. 다른 생(生)이구나.’
이미 한 번 겪어 온 인생이지만 분명 그 시간선은 다르다.
맺을 인연과 도래될 운명, 악제와 얽히는 방식 모두가 전생과는 다를 터였다.
이제 루인은 한번 시험을 해 보고 싶었다.
“내게 관계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내가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그를 목숨으로 지킬 것이다.”
“모, 목숨?”
시론의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 갔다.
루인의 두 눈에 얽혀 있는 결연한 빛.
그 눈빛이란 감히 더 물을 수 없을 정도로 엄정했다.
“또한 내 운명의 모든 짐을, 모든 숙명을 함께 나눌 생각이다. 동료란…… 그렇게 생각한다.”
루인이 건넨 감정의 무게란, 감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이 아카데미 따위에서 멈출 관계라면, 아예 시작도 하기 싫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아니 그건 너무…….”
“너무 극단적이야!”
세베론과 슈리에가 공포에 물든 사람처럼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루인의 방식.
“서로의 운명에 뒤섞일 정도의 각오도 없다면 내게 다가오지 마라. 그게 내 방식이니까.”
리리아 드리미트 어브렐.
오직 그녀만이 단 한 번도 루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르쳐 줘.”
“뭘?”
루인의 질문에 그녀가 처음으로 웃었다.
“네가 목숨을 바쳐서 나를 지키게 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