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시론의 여유로운 미소에 세베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의 마지막까지 시론의 뜻을 따르기로 했었다.
어린 날의 치기 어린 다짐이었으나 분명 그것은 마도의식(魔道儀式)으로 했던 맹세.
“…….”
맹세대로라면 시론의 결정에 따라 자신도 ‘목소리’를 선택해야 했지만 도저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개의치 마라, 세베론. 네 운명까지 강요할 생각은 없다.”
부담을 덜어 주고 있는 시론.
시론은 자신을 잘 알고 있다.
분명 그라면 탑(Tower)이 최선이라며 응원해 줄 것이다.
그런데.
“아앗! 다프네마저 목소리라고?”
“와, 너희들 진짜 후회 안 할 자신이 있는 거야?”
가슴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미소로 다프네가 웃고 있다.
입탑 마법사, 현자의 수제자인 그녀마저 ‘목소리’라니.
다프네, 리리아, 시론.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 불려 왔기에 알 수 있었다.
저들은 그런 자신조차 넘어서는 천재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차가운 이성과 드높은 지혜를 지닌 저 녀석들이 왜 저런 무모한 선택을 하는 걸까?
결국 세베론은 루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불가사의의 중심에 서 있는 소년.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이 기묘한 감정의 근원지.
모든 천재들의 이성을 앗아 가고 있는 독버섯 같은 녀석.
‘…….’
한 번도 잠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었다.
마법이 없는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법을 배워 온 지난날을 생각하면 놈에게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놈의 눈을 마주한 순간.
‘아…….’
생각이 멈춰 버린다.
녀석의 눈빛에는 일관된 감정이 없었다.
누구보다 염세적이면서, 동시에 마법을 논할 때만큼은 범접할 수 없는 열정을 품어 내는 녀석의 눈동자.
권태와 허무, 열정과 오만이 한꺼번에 느껴지는 녀석의 눈빛은 언제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런 루인의 눈빛에, 결국은 세베론도 취해 버렸다.
<열망하며 은둔하는 목소리(Voice)>
직접 적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마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이 세베론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이라니.
“세베론……?”
시론이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하지만 세베론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결정의 이유를 묻는다고 해도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하, 어처구니가 없군. 죄다 미친놈들만 모여 있구나.”
사나워진 볼칸의 눈빛.
무등위 생도라고 해도 어쨌든 이놈들도 마법사다.
한데 그런 마법사의 차가운 이성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는 놈들이었다.
볼칸은 상급자의 교양을 유지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실력 있는 놈들이 많은 기수라더니 괜히 시간만 버린 꼴이로군.”
그 말을 끝으로, 탑(Tower)의 4등위 리더 생도 볼칸은 그렇게 휑하니 나가 버렸다.
홍염의 파수꾼, 에덴티아도 심기가 불편해진 것은 마찬가지.
“이번만큼은 좋은 인재를 많이 건질 줄 알았는데 실망이 크군요.”
에덴티아마저 교실을 나가자 이제 남은 4등위 생도는 ‘천공’의 소녀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묘한 눈빛으로 루인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이었어.’
천재적인 역량이 엿보인다 해도 아직 제대로 된 마법을 배우지 않은 단계인 무등위 생도들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대부분은 탑(Tower)의 생도들, 그중에서도 특별한 성적을 증명한 생도들만 비밀리에 섭외해 왔다.
천공(天空)의 역사에 이렇게 공개적인 생도 섭외는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그런데 거절을 당했다.
그런 예상하지 못한 결말에, 천공의 소녀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천공의 소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공개적인 섭외라면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터.
“나중에 다시 오겠다.”
그 말에 무등위 생도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아름다운 다프네도 차 버린 놈이다.
저놈이 한번 마음먹었다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을 무등위 생도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천공의 소녀마저 나가 버리자 교실이 금방 부산스러워졌다.
“시론, 이유나 들어 보자.”
항상 장난기로 가득하던 제드가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시론은 현자의 손자.
마법학부에서의 평판이 그의 후계 구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거라는 것을 그의 측근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에게 운명을 걸어 온 측근이라면 이번 일은 꽤 심각한 상황.
시론이 메데니아가(家)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몰락한다면 친구들 모두가 함께 나락으로 가는 것이었다.
시론이 피식 웃으며 루인을 쳐다봤다.
“이 녀석이 제대로 수업에 참여한 게 얼마쯤 될 거 같냐?”
잠시 골몰하던 제드가 대답했다.
“한 3주?”
“그래. 이 녀석은 여름 방학 직전 단 3주만 제대로 수업에 참여했지.”
“그래서?”
시론이 확언하듯 입을 열었다.
“그 단 3주 만에 내 마도(魔道)는 앞선 6개월보다 훨씬 나아갔다.”
“응……?”
“단순히 마법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법을 보는 안목, 기조, 정신력, 통찰, 직관, 자기 확신…… 내 모든 기초 소양들을 수치화한다면 적어도 두 배 이상 진일보했다.”
시론의 두 눈이 더없이 깊어졌다.
“너도 마법사라면 알 테지. 이런 기초 소양들은 쉽게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도 이런 변화에 더욱 민감해야 할 거다.”
“난 별로 느끼지 못하겠는데?”
시론이 피식 웃었다.
“저 리리아가 바보 같냐? 반년 내내 확인했을 텐데? 저 여자의 직관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건…….”
“그런 리리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 녀석을 따라 그룹을 정했다. 본능적으로 느낀 거다. 루인에게 교수들 이상의 뭔가가 있음을.”
마법학부의 교수들 이상이라니?
그게 말이 되나?
이론적으로 뛰어나든 실력이 엄청나든 마법학부 교수들은 하나같이 괴물 같은 마법사들이다.
왕립 아카데미에서 가려 뽑은 교수들이었기에 그들은 마탑 최상층의 원로들과 대등한 위상을 지닌다.
지금 시론은 고작 무등위 생도이자 10대 소년에 불과한 루인을 그런 교수들보다 더욱 뛰어난 마법사라 말하고 있는 것.
제드가 더욱 묘한 눈빛이 되어 루인을 바라보자.
루인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주제에, 이렇게 대놓고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해 대다니.
“내게서 뭘 기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착각이다. 사람의 소양은 각자의 노력만큼 성장한다.”
“네 주장을 곱씹었고 네가 말한 대로 사고(思考)했다. 나의 시야는 넓어졌으며 믿어 왔던 직관과 마법의 기조가 변했다. 거기에 착각은 없었다.”
미간을 일그러뜨리는 루인.
“마도명가 메데니아가(家)는 전통의 수련법이 없나? 가법이 정한 수련법을 버리고 그렇게 쉽게 타인의 방식에 동화되어도 되는 건가?”
씨익.
“모르는 소리. 우리 메데니아가의 장점은 새로운 것을 배척하지 않고 드높은 마도를 존중하는 유연한 자세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우리 가문이 고이고 썩지 않는 비법이지.”
루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마도명가라는 건가.
한 번씩 이상하리만큼 천재적인 감각을 보이는 녀석이었다.
이처럼 유연하고 능동적인 사고를 지닌 놈이 왜 그토록 바보 같은 면모를 보이는 건지.
과연 하늘은 모두를 주지 않는 건가.
“에휴.”
한숨을 쉬며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슈리에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지원서에 ‘목소리’를 적었다.
하지만 루인에게 동요한 생도는 여기까지.
메노에, 프레나 등 좋은 재능을 지닌 생도들은 모두 ‘환영의 등나무 탑’에 지원했다.
제드를 비롯한 측근들도 긴 고민을 하더니 결국 탑을 선택했다.
시론은 굳이 녀석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나 시론은 고작 그룹 따위로 우정을 깰 생각은 없다. 일상에서 언제든지 만날 수 있으니 섭섭해하지 말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
제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럼 이제 작별이네.”
그룹을 정하는 순간 2학기부터는 기숙사와 반 배정이 바뀌게 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1등위를 거머쥘 때까지는 각자의 생존을 도모할 시간이었다.
지원서를 작성해 봤자 학점을 채우지 못해 유급을 당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시론. 부디 원하는 것을 모두 얻길.”
제드의 진중한 작별 인사에 시론이 빙그레 웃었다.
“제드. 너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다.”
루인.
시론과 세베론.
리리아와 슈리에.
그리고 다프네까지.
마법학부 역사상 가장 쟁쟁한 천재들이.
그렇게 ‘은둔하며 열망하는 목소리’에 입성했다.
그리고 그 소문은 금방 아카데미 전체로 퍼져 나갔다.
* * *
장미 정원에서 아무렇게나 둘러앉아 홀린 듯이 ‘그룹 안내서’를 보고 있는 무등위 생도들.
“이럴 수가…….”
시론이 ‘그룹 안내서’를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니 배정 교실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죠?”
슈리에의 질문에 세베론이 입술을 삐죽였다.
“뻔한 거죠 뭐. 어차피 유급 혹은 퇴교 처리될 생도들인데 학부에서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 아니었나요?”
“그,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일 줄은 몰랐죠! 게다가!”
눈을 부라리며 다시 그룹 안내서를 확인하는 슈리에.
“기숙사 배정도 그래요! 지독하게 외딴 곳이에요! 학부 건물과 너무 멀잖아요!”
이 와중에도 심상 수련을 하고 있던 루인이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아직은 돌아갈 기회가 있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탑(Tower)으로 가라.”
하지만 모두의 눈빛을 보니 번복할 것 같진 않았다.
시론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1등위까지 남은 학점을 차례대로 말해 보자.”
“전 16점 남았어요.”
슈리에가 대답하자 시론이 리리아를 쳐다본다.
“2점.”
시론은 금방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총 이수해야 할 52점 중에 벌써 50점을 돌파했을 줄이야.
사실상 시답잖은 교양 수업 하나 이수하면 끝이었다.
“난 12점이다. 루인 너는?”
시론의 질문에 루인이 짧게 대답했다.
“24점.”
거의 학기 마지막에 수업에 참여한 것치고는 대단한 학점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도 들었던 필수 과목들을 모두 최고 배점으로 이수한 모양.
질문은 세베론에게 이어졌다.
“넌?”
“32점이요.”
“왜지? 아…….”
시론은 그가 바보같이 최고 배점을 거부한 사건을 기억해 냈다.
“돌아 버리겠군. 자존심이 밥이라도 먹여 주냐?”
지금부터는 담당 교수의 조언이나 지도 교수들의 친절한 교육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거지같이 청강을 다니는 눈칫밥 신세가 바로 앞으로의 미래.
지도 교수들이 ‘목소리’ 그룹 출신 생도들을 좋게 볼 리 만무하다.
어차피 시간만 때우다 꺼질 놈들이니, 그 가르침에 열의가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미치겠군. 그럼 일단 세베론의 과제부터 돕는 방향으로 하지. 다음은 루인과 슈리에, 나 차례로…….”
“잠깐만요.”
모두의 시선이 다프네에게 쏠린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다프네.
“전 0점이거든요?”
“…….”
“…….”
“…….”
“…….”
모두가 다프네를 잊고 있었다.
시론이 단호한 얼굴로 일어나며 다프네를 쳐다봤다.
“너의 그룹 지원서는 지금 어디에 있지?”
“왜요?”
“지금 가서 찢어 버리게.”
시론의 싸늘한 눈빛에 다프네의 미소가 어색해졌다.
“그, 금방 학점을 채울 수 있어요! 아시잖아요? 저 입탑 마법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