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71화 (71/187)

<71화>

무등위 학년이란 말 그대로 등급이 없는 생도 시절.

1등위 생도부터 진정한 마법학부의 생활이라는 아드레나의 설명처럼, 무등위 생도들의 2학기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1등위가 되기 전, 무등위 생도들은 반드시 자신이 속할 그룹을 선택해야 했다.

‘꿈꾸는 불새의 둥지(Nest)’는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며 원소계 마법을 주력으로 삼는다면 반드시 이곳을 선택해야 했다.

원소 마법사들의 대중적인 인기 덕분인지 뛰어난 교수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는 곳이었고, 그런 이유로 생도들의 가장 무난한 선택지이기도 했다.

‘환영의 등나무 탑(Tower)’은 전이계, 각성계, 진동계, 투시계, 강화계 등 특화 마법에 특별한 재능을 지닌 생도들의 터전이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이곳의 생도들 대부분이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마법사였고, 덕분에 입탑 마법사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그룹이었다.

‘황금 여명의 천공(天空)’은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 운명의 영역이었다.

이 그룹에 속하려면 교수들의 만장일치가 기본적으로 필요했고, 당연히 생도 수준을 뛰어넘는 특출한 재능과 실력을 겸비해야 가능했다.

오히려 황금 여명의 천공에 속하는 것이 입탑 마법사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지경.

그러므로 이 그룹에 속한 생도들은 무려 십 년 동안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었다.

이들은 철저하게 왕국의 비밀 병기로 키워지기에 쉽게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베일 속의 집단이었던 것.

마지막으로 ‘열망하며 은둔하는 목소리(Voice)’는 어떤 생도도 선택하지 않고 싶어 하는 그룹이었다.

마법학부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예비 낙제자, 유급 대상자 등을 몰아넣은 문제아 그룹, 즉 사실상의 유폐지.

반면 학업의 자유도는 엄청났는데, 인맥 쌓기가 목적이었던 귀족가의 자제들 대부분이 결국은 이곳에 정착하기 때문이었다.

유급이나 퇴교 처분을 기다리는 생도들이었기에 수업에 참여할 필요도 없었고, 심지어 수료할 의무 학점 같은 것도 없었다.

결국 무등위 생도들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그룹은 ‘꿈꾸는 불새의 둥지’와 ‘환영의 등나무 탑’.

성적이 평범하다면 둥지(Nest)로, 특별하다면 탑(Tower)으로 가는 것이 마법학부의 전통적인 루트였던 것이다.

“반가워요. 4등위 마법 생도 에덴티아라고 해요.”

긴장감으로 가득한 무등위 생도들의 교실 내부.

가슴에 불새 모양의 브로치를 달고 있는 에덴티아는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무등위 생도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녀의 소문을 일찍이 접한 무등위 생도들은 하나같이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하는 눈치.

그녀는 바로 ‘홍염(紅焰)의 파수꾼’이라 불리는 그 유명한 ‘꿈꾸는 불새의 둥지’의 리더 생도였다.

“우리 둥지가 탑보다 못하다는 건, 오래된 편견이며 집요한 요설이에요.”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리더 생도, 볼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는 ‘환영의 등나무 탑’의 리더 생도.

분명 에덴티아의 말은 무례하고 광오하기 짝이 없었으나 의외로 그는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왕궁 마법사의 대부분은 우리 둥지 출신이죠. 그만큼 우리 둥지를 선택한다면 가장 많은 기회가 뒤따른다는 뜻이에요.”

수가 가장 많다는 건 기득권, 즉 권력을 뜻했다.

왕국에 촘촘한 그물망처럼 퍼져 있는 선배들.

먼저 나아간 선배들이 훌륭한 ‘둥지’가 되어 후배들을 이끌어 줄 거라는 점을 그녀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었다.

“전통의 마도서들이 왜 그토록 기본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잘 생각해 보길 바래요. 원소 마법은 마법사의 기본 소양이며 전통의 밥줄이랍니다.”

제법 많은 무등위 생도들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충분히 현실적으로 다가왔기 때문.

어설픈 재능과 실력으로 탑(Tower)에 도전할 바에야, 마법사로서의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되는 둥지(Nest)가 더욱 올바른 선택일 터였다.

그때, 탑의 리더 생도 볼칸이 나섰다.

“용기 없는 자들의 궤변이군. 그대들은 드높은 마도를 꿈꾸며 마법 생도가 된 것이 아니었나?”

볼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실력으로 이 왕립 아카데미에 입성한 생도라면 지금 당장 두 눈을 감아라. 그리고 그동안 노력했던 과정을 한번 이미지해 봐라.”

그동안의 엄청난 세월이 떠올랐는지, 몇몇 무등위 생도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깝지 않나? 그런 노력으로 고작 안정적인 직업을 운운하는 게.”

부들부들.

가장 많이 동요하고 있는 무등위 생도는 세베론.

“마법학부에서 오직 우리만이 탑(Tower)으로 불린다. 가장 많은 입탑 마법사를 배출한 우리 ‘환영의 등나무 탑’이야말로 마법사를 꿈꿔 온 자라면 반드시 도전해야 할 그룹이다.”

에덴티아가 피식 웃었다.

“지금도 그 가망 없는 미련에 녹아나는 생도들이 너무나 많죠. 입탑 마법사? 지금이야 드높고 영광스럽게 느껴질 거예요. 하지만 여러분,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마법학부에서 5년을 구르고 입탑 마법사로 15년을 더 구르면 여러분의 나이는 얼마가 될까요?”

“……거의 사, 사십 대?”

제드가 홀린 듯이 중얼거리자 에덴티아의 눈썹이 활처럼 휘어졌다.

“호호, 그래요. 거의 그 나이쯤이죠. 여러분은 결혼한 입탑 마법사를 보셨나요?”

세베론은 자신을 향한 에덴티아의 시선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 그건…….”

“입탑 마법사란 근본적으로 명예직이에요. 보수도 쥐꼬리만큼 적고 시간은 오히려 생도 시절보다 더 부족하죠. 그렇게 뼈가 부서질 만큼 연구 업적에 매달리고 탑을 나왔을 때, 여러분의 ‘둥지’ 친구들은 뭐가 되어 있는 줄 알기나 아세요?”

“잘…….”

“어지간한 남작령의 한 달 세입과 맞먹는 보수. 15년 근속의 당당한 일등 궁정 마법사. 여러분이 고향으로 돌아가 마탑 출신이라며 위세등등하게 마법 교실을 차려 봤자, 그들의 연봉을 언제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과연 에덴티아는 대중적인 ‘둥지’의 리더다웠다. 그녀의 언변술이란 그야말로 마법에 가까울 지경.

벌써부터 세뇌당한 많은 무등위 생도들이 지원서에 ‘꿈꾸는 불새의 둥지’를 적어 가고 있었다.

“자, 잠깐! 그건 입탑 마법사로서의 최악의 가정이다! 뛰어난 연구 업적을 이루어 더욱 나아간다면 마탑의 최상층, 고위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여러분도 아카데미의 교수나 학부장, 심지어 현자를 꿈꿀 수 있―”

“여전히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확률을 말하고 있네요. 마법사의 입이 구질구질하게 확률만을 언급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 건가요?”

“……도, 동요하지 마라! 이 여자는 마녀다! 그대들을 미혹하고 있다!”

“흥, 빗자루 하나 선물해 준 적 없으면서.”

한데 그때.

드르르륵-

교실의 문이 열리며 한 여자 생도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견장을 향했다.

그녀 역시 4등위 마법 생도.

하지만 에덴티아와 볼칸은 그런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호기심 어린 에덴티아의 눈빛이 그녀의 전신을 훑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

등위 생도라면 반드시 가슴에 차고 있어야 할 ‘그룹 브로치’가 없다.

그 말인즉, 교수의 조교이거나 졸업생이라는 뜻.

“아아…….”

“신비로워.”

무등위 생도들은 반응은 달랐다.

새롭게 교실에 등장한 4등위 여생도의 분위기가 실로 범상치 않았기 때문.

‘저 여자는 누구지?’

처음에 시론은 매혹 마법에 당한 것이 아닌가 싶은 착각마저 들었다.

고아하게 흘러내린 금빛 머리칼.

마치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마력적인 눈빛.

한 번 바라본 것으로도 마치 영혼이 진탕되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로 압도적인 첫인상의 마법 생도라.

그렇다면 분명 자신의 정보망에 있어야 할 인물인데, 아예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것이 시론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루인 라이언 생도.”

그것이 모든 생도들의 의문을 뒤로하고 그녀가 처음 뱉은 말.

무신경하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루인이 처음으로 교실 앞쪽을 쳐다보았다.

“그대는 ‘천공(天空)’의 후보다. 뜻이 있다면 따르도록.”

“처, 천공?”

“그, 그럴 수가!”

찢어질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에덴티아.

당연히 무등위 생도들도 하나같이 경악한 얼굴로 굳어 버렸다.

“그대가 그 ‘천공(天空)’이라고?”

에덴티아는 헛것을 본 것처럼 놀라고 있었다.

황금 여명의 천공.

십 년 이상 단 한 번도 마법학부에 정체를 드러낸 적이 없는 신비의 그룹.

하지만 천공의 소녀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루인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결정은 지금 이곳에서. 시간은 짧게.”

모두의 시선이 루인에게 모인 것은 당연한 일.

그동안 천공의 정체가 마법학부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십 년 이상 후보생이 없었다는 말과 동일할 터.

그렇다면 루인이 십 년 만의 천공 후보생이라는 뜻인가?

하지만 시론은 확신할 수 없었다.

유급을 계속 당한 것이 아니라면 생도의 시간은 5년이다. 무등위 생도 기간을 제외한다면 고작 4년.

한데 당장 저 눈앞의 천공 소녀만 해도 생도복을 입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루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거절한다.”

미련 없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린 루인.

감정의 변화라곤 한 치도 보이지 않던 천공의 소녀가 처음으로 두 눈에 당황한 감정을 드러냈다.

“……정말인가?”

그 역시 마법학부의 생도라면 ‘황금 여명의 천공’에 속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을 터였다.

입탑 마법사가 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 천공.

천공의 후보생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교수진과 학부장, 심지어 마탑에서도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난 이미 선택했다.”

루인의 그 말에, 주변의 무등위 생도들이 모두 일어나 그의 지원서를 살폈다.

“뭐, 뭐야? 이게?”

“아, 아니! 루인! 이건!”

생도들이 호들갑을 떨자 호기심이 치민 시론이 루인의 책상에 다가갔다.

그의 책상 위.

지원 그룹에 적혀 있는 문장은 분명.

<열망하며 은둔하는 목소리(Voice)>

“모, 목소리라고?”

이단아들의 도피처.

문제아들의 종착역.

천재적인 재능의 마법사라면 결코 선택해선 안 되는 곳.

그 얼음 같은 리리아마저 당황한 표정으로 루인의 책상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루인을 노려봤다.

“……왜지?”

루인의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필요 없는 수업을 굳이 듣지 않아도 되니까.”

‘목소리’에 속한 이상 무슨 수업을 듣건 말건 그대로 생도의 자유.

선택적인 수업 환경.

자유로운 도서관 출입.

이 둘을 확보한 이상 루인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그런 루인을 탑(Tower)의 리더 생도 볼칸이 미친놈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탑도 아니고 무려 천공이다.

그런 절호의 기회를 차 버리고 목소리(Voice)를 선택하는 미친놈이 존재하리라곤 상상해 보지도 못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다른 생도들도 마찬가지.

한데 더욱 놀라운 상황이 이어졌다.

“리리아?”

슈리에가 리리아의 손을 거칠게 잡았다.

리리아의 펜이 지원서에 적고 있던 것.

그것은 바로 루인과 동일한 그룹 ‘목소리’였다.

“놔.”

슈리에의 손을 뿌리친 리리아가 그대로 지원서를 적어 갔다.

“아, 아니 미쳤어요?”

그런 리리아의 행동에 시론이 흥미롭다는 듯 웃고 있었다.

“재밌군. 정말 재밌겠어.”

슥슥-

“미친! 시론!”

“아니, 죄다 미쳐 돌아가는 거야?”

그렇게 시론의 지원서에도 ‘목소리’가 적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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