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방학 때문에 한층 편하게 생활할 줄 알았던 루인.
하지만 루인은 단 한 명의 생도 때문에 생도들로 바글바글할 때보다 더욱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리리아 드리미트 어브렐.
특별히 눈이 마주친다든지 말을 걸어오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운동장을 뛸 때도, 지혜의 라이브러리에서 마도서를 읽을 때도, 장미 정원에서 심상에 빠져 있을 때도.
언제나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는 편도 아니었고, 이미 아드레나 때문에 이런 상황이 익숙했지만 루인은 온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어제의 일로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홱-
갑자기 루인이 고개를 꺾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리리아가 황급히 마도서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벅저벅.
고요한 도서관에 그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고.
리리아가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려는 그때.
“미리 말해 두지만 간섭할 생각은 없다.”
루인의 무감한 음성.
리리아가 멈춰 선 채로 뒤를 돌아봤다.
“혹시 상대가 필요한 거냐?”
“무슨…….”
루인이 웃었다.
“대화.”
차갑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감정은 없으나 기대고 싶게 만드는.
루인의 목소리는 그런 목소리였다.
* * *
남자, 그것도 단둘이서 차를 마시는 건 리리아로서도 처음이었다.
그런 어색함 때문일까.
김이 모락모락하던 밀크티가 차갑게 식을 때까지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을 불러 세워 놓고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이상할 법한데도 루인은 묵묵히 차만 음미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리리아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어제 너였나.”
역시.
이것 때문에 내내 곁을 맴돈 것이었군.
루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리 감정적인 상태였다고 해도 역시 마법사는 마법사.
방문 앞의 인기척이 마법사의 민감한 감각에 감지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타인의 사생활에 호기심을 가지는 악취미는 없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리리아도 루인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철두철미한 자기 관리.
본인의 일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무감함.
그는 냉철한 마법사의 표본 같은 그런 인간이었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거지?”
방학인데 왜 다른 생도들처럼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는지.
또 왜 울고 있었던 건지.
같은 반 생도라면 누구나 궁금해했을 그런 의문들을 루인은 결단코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루인의 그런 무심함이 리리아를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루인의 가라앉은 두 눈이 리리아를 직시했다.
“너라면 알고 있을 텐데.”
생도들 중 유일하게 리리아만이 자신에게 직접적인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쉼 없이 운동장을 뛰는 것을, 절식에 가까운 자신의 식단을 그녀는 굳이 궁금해하지 않았다.
전생의 마도 체계를 드러냈을 때도, 비정상적인 염동력을 드러냈을 때도, 오직 그녀만이 유일하게 침묵을 유지했다.
“……내가 뭘 알고 있다는 거지?”
“내가 직접 입을 열기 전까진 어떤 질문도 의미가 없다는 것.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라는 인간의 성향을.”
루인이 싱긋 웃었다.
“너 역시 그런 사람이니까.”
“아…….”
비로소 리리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루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마치 감정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
본인을 닮았다는 말을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다니.
“난 너와 다르다!”
루인이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는 리리아의 눈동자를 재밌다는 듯이 바라본다.
짧게 자른 은빛 단발.
별다른 치장도 없는 말끔한 얼굴.
그러나 그녀의 타오르는 듯한 진녹색 눈동자만큼은 열의를 잔뜩 머금고 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소녀.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
마치 그 옛날의 자신처럼.
“물론 다르다. 넌 나처럼 올곧은 이성을 이룩하지 못했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건 분명 치명적이지.”
“치명적……?”
“제어하지 못한 감정으로 심상 수련을 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마 모르고 있는 건가.”
정신 폭주(精神暴走)는 마나번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운이 좋아야 의식을 잃는 정도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이성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 건 마법을 향한 열정 같은 게 아니야. 그냥 자살행위다.”
해부할 듯이 직시해 오는 루인의 두 눈.
그 섬뜩한 눈빛에 리리아는 감히 반박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어브렐가의 가주, 아버지가 눈앞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네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물어볼 생각도, 또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굳이 그런 꼴을 동료 마법사에게까지 보이진 마라. 그런 상태로 마법을 연마하는 건 나에겐 수치로 느껴지니까.”
리리아는 참을 수 없는 모멸감에 온몸이 떨려 왔다.
분명 그건 자신에 대한 냉철한 평가였고 옳은 충고였다.
하지만.
마치 머나먼 꼭대기 위에 서서 멋대로 남의 감정을 도륙하는 자에게서 들을 말은 아니었다.
이미 다 안다는 듯한 눈빛.
저 인간 같지도 않은 무심한 표정이 또다시 아버지의 얼굴과 겹쳐 온다.
어제의 감정이 구토할 듯 치밀어 올랐지만 리리아는 지독하게 견뎌 내며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넌…… 정말…… 모든 감정에서 자유로운 건가……?”
그건 자신에게 불가역적인 것.
이토록 온 마음을 헤집고 다니는 분노를 제어한다는 건, 마치 사람이기를 포기해야만이 가능할 것 같았다.
“…….”
루인은 말없이 웃었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수만 년의 시간을 보내 온 인간이라면 모든 감정에서 자유로운 초월자가 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지금도 죽어 간 검성의 미소가 또렷이 그려졌다.
아직도 성녀의 절규가 어제처럼 생생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죽어 간 자들의 모든 비탄(悲嘆)이.
살아남은 자들의 모든 허무(虛無)가.
지금도 온 마음을 소용돌이쳤다.
악제를 향한 증오와 공포 역시 낙인처럼 낡은 영혼을 짓누르고 있었다.
차라리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비루하게 하루하루를 버텨 온 세월.
“그럴 리가.”
여전히 비튼 입매로 웃고 있는 루인.
하지만 그 짧은 한마디에 리리아는 숨이 턱 하고 막히는 심정이었다.
루인이라면 감정을 극복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저 광기로 가득 찬 눈동자.
그것은 누구보다 감정으로 살아가는 자의 눈이었고, 동시에 스스로 감정을 집어삼킨 자의 눈이었다.
그 모순된 느낌에 리리아가 두 눈에 참을 수 없는 의문을 드러낼 무렵.
“감정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 말에 리리아는 허탈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기껏 지금까지 해 온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겨 낸 인간만 있을 뿐이지.”
“……이긴다고?”
어떻게? 라고 묻고 있는 듯한 리리아의 눈빛에 루인이 시선으로 아카데미 밖을 가리켰다.
“도망치지 않고 직시하는 것. 처음은 그것부터다 리리아.”
리리아의 이글거리는 두 눈이 루인의 시선을 좇았다.
그의 말에 오기가 치민 것도 자존심이 상한 것도 아니었다.
‘도망…….’
저 루인이라는 녀석의 눈에 고작 도망쳐 온 인간으로 보였단 말인가.
그것은 자신을 향한 실망.
순간 리리아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보여 주지. 내가 도망치지 않았다는 걸.’
한여름 날의 오후.
그렇게 리리아는 자신의 가문, 마법명가 어브렐가로 향했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를 루인이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뭐, 뭐야? 저 녀석? 방학 내내 아카데미에 있었던 거야?”
감탄인지 경악인지 모를 제드의 외침.
여름 방학을 끝내고 아카데미로 복귀한 무등위 생도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운동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척척척-
거의 전력 질주로 뛰고 있는 루인.
“저 녀석! 몸이……!”
상의를 벗어 드러난 루인의 몸은 가히 기사 생도를 방불케 했다.
“미친, 고작 한 달 만에 저런 몸을 만들었다고?”
제드는 이제 두려울 지경이었다.
사람의 몸이란 분명 납득할 수 있는 선이란 것이 있는데, 녀석의 몸엔 응당 있어야 할 그런 인간미가 없었다.
지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독히 선명한 근육선.
조각처럼 다져진 녀석의 몸이란 마치 미술품을 보는 것만 같아서, 그 압도적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었다.
“한 달이 아니지. 무려 반년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시론이 입술을 깨물며 무거운 목소리를 토해 내자, 그제야 생도들도 여름 방학 전의 루인을 떠올렸다.
“맞아요. 녀석은 보결로 입학하자마자 저 엄청난 짓을 해 왔죠.”
감탄에 가까운 세베론의 목소리.
이제 루인의 달리기는 아무리 달려도 속도가 줄지 않았다.
보폭, 호흡, 동작 모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서 지쳐 가는 느낌 자체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몸을 단련하는 거지? 마법사에게는 충분히 과한 것이 아닌가? 아무리 이해하려 해 봐도 저건 경우가 심하다.”
시론은 보잘것없었던 루인의 몸을 기억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루인의 노력을 인정하고 응원했었다.
허나 지금의 저 인간미를 무시한 몸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기사가 될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그 노력을 마법에 쏟는 것이 더 유의미할 터였다.
그런데 그때.
“미, 미친!”
“물구나무!”
생도들의 경악이 이어졌다.
갑자기 루인이 물구나무를 시작하더니 그 상태 그대로 운동장을 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능숙한 동작으로 보나 속도로 보나 틀림없이 저 미친 짓을 방학 내내 해 온 것이 틀림없었다.
시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질려 버리겠군.”
그것은 루인의 처절한 정신력을 향한 순수한 경이(驚異).
저런 건 평범한 인간이 따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론 일행이 감탄하고 있을 때 뒤편에서 슈리에의 뾰족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악!”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지만 손가락의 틈은 왜 굳이 벌어져 있는지.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슈리에의 동공이 마치 마나 스캔을 하듯 빠르게 루인의 몸을 훑고 있었다.
속속 도착하는 다른 여생도들도 마찬가지.
비명을 지르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하나같이 루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 루인 녀석! 이걸 위해?”
“에이, 설마?”
그제야 생도들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루인.
빠르게 땀을 털어 내며 상의를 입은 그가 무심한 얼굴로 기숙사로 돌아갈 그때였다.
“어? 리, 리리아!”
천천히 마법학부로 걸어오고 있는 리리아.
반갑게 달려가 리리아를 살피던 슈리에가 그대로 굳어진다.
풍겨 오는 마력의 결.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차가운 눈빛.
마치 자신이 알던 사람의 모든 면이 한순간에 바뀌어 버린 듯한 느낌.
후드의 짙은 음영 아래 드러난 리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슈리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
하지만 리리아는 시린 눈빛만 빛내고 있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런 리리아의 분위기가 너무 압도적이라 슈리에는 더는 묻지 못했다.
저벅저벅.
차분한 보폭으로 걸어간 리리아가 루인 앞에 멈춰 섰다.
“……직시. 그다음은 뭐지?”
루인은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