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모든 생도들이 썰물처럼 아카데미를 빠져나갔다.
톱니바퀴 같은 프로그램과 스케줄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마법학부 생활에서 방학이란 그들의 유일한 해방구.
덕분에 루인은 오랜 만에 아무런 방해 없이 마법 수련에 매진할 수 있었다.
-호오, 이것이 네놈의 새로운 마법이냐?
하늘과 지평선이 맞닿아 그 경계조차 알 수 없는 끝없는 어둠의 세계.
그런 루인의 심상(心想) 세계에서, 쟈이로벨이 루인의 마법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건 하기라사트라의 진화냐?
화르르르르-
풍겨 오는 농밀한 마력의 결은 분명 하기라덴의 상위 버전, 중급 겁화계(劫火計) 흑마법 하기라사트라다.
그러나 마력의 결만 유사할 뿐, 그 형태나 빛깔, 위력 등이 확연하게 달랐다.
“나도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흑마법의 진화라고 하기도, 백마법과의 융합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스스로 펼친 마법이었지만 루인은 지금의 마법을 쉽게 정의할 수 없었다.
지혜의 라이브러리에서 살폈던 백마법의 지혜들, 그리고 ‘헤이로도스기–백마법총론’에서 얻은 단서들, 또한 지금까지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얻은 결과란…….
너무나 예상 밖이었다.
-흑마법이든 백마법이든 원소계 마법이라면 반드시 고유의 색을 지닌다. 무색(無色)이라니. 이런 건 처음 보는구나.
화르르르르-
색이 없는 불꽃.
굳이 억지로 색을 부여한다면 잿빛에 가깝다.
하지만 문제는 더 있었다.
쏴아아아아-
루인이 더블 캐스팅으로 소환한 마법에서 소스라치는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멸빙계(滅氷計)? 카이쟌락타?
루인이 소환한 것은 수증기처럼 공중에서 흩날리고 있는 냉기.
하지만 이번에도 강력한 냉기는 느껴졌지만 어김없이 무색이었다.
냉기만 느껴지지 않는다면 사실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는 지경.
그 후로도 루인은 잔풍계(殘風計), 진동계(振動計), 뇌격계(雷擊計)로 보이는 마법을 차례대로 선보였다.
모두 흑마법에 원류를 두고 있었지만, 그 마법들 역시 하나같이 무색(無色)이었다.
특히 뇌격계 흑마법 마가라토라의 진화 마법으로 보이는 저것.
지지지직.
투명하고 날카로운 창들이 대지와 공명하며 연신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는데.
그 위력이란 쟈이로벨의 상상을 아득히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게 마가라토라라고?
원래라면 짙은 먹구름이 먼저 일어나고 일정한 범위 내로 검붉은 번개들이 연속적으로 수직 뇌격한다.
하지만 루인의 마가라토라, 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뇌격창은 투명하다.
뇌격계 마법의 전조 증상인 먹구름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미리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저런 걸 과연 막을 수가 있을까?
-구, 구성 회로와 술식 기전들을 모두 보여 다오!
루인이 마법을 흩어 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싫은데?”
-너 이 새끼!
“그 전에 내 요구부터.”
열불이 터져 죽어 버릴 것만 같은 심정!
이 사악한 인간 놈은 늘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헐떡이게 만든다.
이럴 때마다 쟈이로벨은 누가 숙주고 누가 지배자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또 뭐냐! 이 괴물 놈아!
심상 세계가 차츰 옅어지더니 이내 루인은 현실의 기숙사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전생에 익히고 있었던 열화판 흑마법을 전에 네게 심상으로 모두 보여 줬었지.”
루인의 전생.
그땐 마신 쟈이로벨의 온전한 흑마법을 포기해야만 했다.
인간의 염동력으로는 마신의 염동력을 흉내조차 낼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네 온전한 흑마법을 모두 전수해 주는 것. 그것이 이번 거래의 내 요구 사항이다.”
-흥! 진마력도 없는 놈이……!
쟈이로벨의 영언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루인이 자신의 핵(核) 오드를 마나의 고리로 삼아 이 세계의 마나를 진마력처럼 활용할 수 있는 미친 마법사라는 것을 잠시 망각했다.
더욱이 이제는 그런 자신의 흑마법을 인간의 백마법과 융합시켜 더욱 뛰어난 마법으로의 진화까지 이뤄 낸 놈이었다.
“싫어? 싫으면 관두고.”
-이, 이미 다 알고 있는 게 아니었느냐? 네놈 말대로 우리가 차원 거품에서 수만 년 동안 함께 있었다면…….
“인간의 일을 모두 잊고 마족이 되라더군. 최상급 마족의 육신을 내어 줄 테니 차기 마신이 되어 자신의 영토를 이으라던데.”
-뭐, 뭣이? 그래서 넌 뭐라고 대답했느냐?
“미쳤냐 내가? 그 잔인하고 더러운 마족들과 함께 살 부대끼며 살아가게? 최상급 마족의 육체? 말만 그럴싸하지 결국 네놈의 입에서 나온 알이 아니냐? 생각만 해도 역한 구토가 치미는군.”
-실성을 했구나! 내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다면 그건 처절한 각오와 격의 없는 진심이다!
쟈이로벨에게도 혈족이 있었다.
또한 무한의 전장을 함께 견뎌 온 휘하의 마장들도 즐비했다.
그들 모두에게 기회를 앗아 가고 한낱 인간을 마신의 후계자로 점찍는다는 건 일종의 내분을 각오한다는 의미.
마신 쟈이로벨의 ‘혈우(血雨) 지대’를 계승한다는 것.
그것은 이 작은 르마델 왕국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이었다.
“그럼 이번에도 너의 진신 흑마법을 얻으려면 네놈의 후계자가 되라는 뜻이군?”
-너……!
루인이 심상 세계에서 보여 준 무색의 마법들.
느껴지는 위력으로 보나 아득한 체계로 보나 자신의 진신 흑마법에 비해 결코 모자람이 없는, 아니 오히려 더한 위력을 지닌 융합 마법(融合魔法)이었다.
그런 녀석의 융합 마법이, 새롭게 전수받을 진신 흑마법으로 더욱 위력이 강해진다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어쩌면 헤이로도스라는 인간의 이름으로 완성한 므드라의 마법을 뛰어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마신의 정체성, 그리고 오랜 신념에 관한 문제.
그렇지 않아도 사홀 때문에 마계로의 복귀가 늦어지는 판국이다.
이런 와중에 후계까지 인간에게 넘긴다는 건…….
혈우 지대의 대혼란 혹은 몰락.
그 틈을 므드라가 놓칠 리 없었다.
-과거의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이 쟈이로벨의 생존과 신념에 관한 문제다. 미안하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마력으로 핵심 술식을 그리려던 루인이 수인을 흩어 버렸다.
분명 앞으로 루인은 저 핵심 술식을 모조리 염동력으로 치환해 버릴 것이다.
그렇게 쟈이로벨은 루인의 ‘무색 융합 마법’의 비밀을 영원히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
영겁의 마계 대전으로 모아 온 자신의 보물 창고 ‘헬라게아’를 통째로 놈에게 빼앗긴 것도 서러운데!
놈은 이 작은 지혜조차 나누지 않는단 말인가!
-그냥 네가 마신 해라.
“시끄럽다. 난 분명히 기회를 줬어. 나중에 딴소리나 하지 마.”
그때, 다시 마력으로 복잡한 술식을 그려 가는 루인.
허공을 물들이는 새하얀 회로의 물결을 확인하며 쟈이로벨이 신음했다.
-으음…… 이건 또 뭐지? 환혹계? 아니면 전이 마법의 술식인가?
루인의 수인이 다시 어지럽게 맺히자 루인의 마나 서클, 오드를 감싸고 있던 환영 마법이 천천히 흩어졌다.
“고위 마법사를 만나면 이 환영 마법은 쉽게 디스펠당한다. 그래서 틈틈이 준비해 왔지.”
허공에 맺힌 루인의 술식을 살피던 쟈이로벨이 감탄을 거듭했다.
-기본적인 틀은 여전히 시각을 교란시키는 환혹계 마법이군! 하지만 침범해 오는 마력을 아예 무작위 공간 좌표계로 전이시켜 버리는 이중 트랩이 덧씌워졌어! 과연 이런 식이라면 디스펠의 난이도가 극단적으로 상승하겠구나! 크하하하!
“아니. 트랩은 세 개다.”
-세 개?
지이이이잉-
허공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술식.
-오호! 침묵! 침묵이구나!
마력이 무작위 좌표계로 흩어져 버렸을 때.
고위 마법사라면 반드시 언령(言靈)이나 염동(念動)으로 디스펠 마법을 이어 가려 들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방벽 싸일런트(Silent).
언령과 염동을 끈질기게 방해하는 이 침묵 마법이라면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8서클 이상의 대마법사가 디스펠을 마쳤을 땐 이미 영계로 오드를 회수한 이후일 터.
이 정도면 쉽게 루인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겠느냐? 아무리 네놈이 서클의 경지에 비해 마력이 많아도 이 정도 난이도의 삼중 트랩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선 상당한 마력이 꾸준히 소모될 텐데?
“그렇다고 오드를 눈에 띄게 내버려 둘 순 없잖아. 아무리 적멸의 어스름을 새겼다고 해도 파괴된다면 모든 게 끝장이야.”
-하긴 너무 큰 약점이군. 심장을 꺼내고 다니는 꼴이니.
“초인급의 적들을 만나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지. 이건 그냥 임시 처방이다.”
우우우웅-
오드에 차례대로 마법을 덧씌운 루인이 수인을 털어 내며 심호흡을 했다.
“후우…… 어지럽군.”
고작 이 정도로 마나번을 느끼다니.
심상 세계에서의 길고 길었던 마법 수련, 거기에 고난이도의 삼중 트랩 마법까지 발휘했더니 뇌가 뜨겁게 달아오를 지경.
아직도 세 개의 고리, 3위계의 경지가 루인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는 법.
마력의 폭주를 각오한다면 당장이라도 위계를 높일 수 있었지만 그건 결국 미래를 갉아먹는 일이었다.
그렇게 급하게 쌓아 올린 경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덜컥-
마력도 회복할 겸 루인은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기숙사 복도의 창밖으로 두 개의 달이 휘영청 만월을 드러내고 있었다.
붉고 커다란 달 크라울시스.
작고 푸른 탈루만.
구름 위로 드러난 두 개의 아름다운 달을 바라보고 있자니 옅어진 마력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루인이 복도를 빠져나올 무렵, 그의 두 귀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우우웅-
마력이 파동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소음.
루인은 의아했다.
아무도 없는 이 한밤중의 기숙사에서 갑작스러운 마력 발현음이라니.
과연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니 불이 켜진 방이 있었다.
루인이 불이 켜진 방의 문 앞을 살폈다.
“음?”
방문에 적혀 있는 생도명은 리리아.
그녀는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인가?
늘 차갑게 구는 리리아였지만 아직은 소녀의 나이.
게다가 귀족가의 영애로 살아왔다면 아카데미의 평등한 생활이 충분히 불편했을 것이다.
그런 리리아의 사정이 궁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문을 열어 볼 수도 없는 노릇.
한데 루인이 발길을 옮긴 지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흑…… 흑흑…….>
멈춰 선 루인이 리리아의 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게 흐느끼는 소리는 틀림없이 그녀의 방에서 새어 나오고 있는 소리.
사람에겐 저마다의 삶의 무게가 있다.
그녀가 평소에 차갑게 굴어 대는 건 그 나름의 삶을 견디는 방식일 터였다.
하지만 서로가 각자의 삶을 모두 이해하려 들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루인은 그녀의 방에서 멀어졌다.
오늘은 그저 달빛 아래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 싶었다.
장미 정원에 나온 루인이 머나먼 하늘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잘하고 있겠지.’
오늘따라 유난히 데인이 보고 싶었다.
가문으로 다시 돌아가는 날.
몰라보게 달라진 녀석을 뜨겁게 안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