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68화 (68/187)

<68화>

시론은 마치 사고가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설마하니 저 고고한 다프네가 곧장 고백을 늘어놓을 줄이야!

다프네의 터무니없는 미인계에 벌써부터 지독한 패배감이 몰려왔다.

루인도 남자.

과연 그가 저 엄청난 미모의 다프네를 거부할 수 있을까?

모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루인에게 모인다.

저 무심한 리리아마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그만큼 충격의 여파는 컸다.

“그 대상이, 설마 나라는 거냐?”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은 채 마치 신기한 동물을 대하듯 다프네를 바라보고 있는 루인.

“안 되나요?”

루인이 흥미가 가신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털어 냈다.

그녀의 눈빛에 서려 있는 감정은 호감이나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호기심, 어쩌면 두려움.

목적이 무엇이든 이 소녀는 지금 사람의 감정을 한낱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루인이 가장 혐오하는 종류의 인간.

사람이 사람을 기꺼워하는 감정을 저리도 무감각하게 말할 수 있는 여자라면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

“얼빠진 계집이군.”

그것이 다프네를 향한 루인의 첫 평가.

입탑 마법사, 현자의 수제자, 게다가 왕국 최고의 미녀를 다투는 재녀(才女)를 ‘얼빠진 계집’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더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

“…….”

루인의 입에서 상상도 해 보지 못한 대답이 흘러나오자 생도들은 저마다의 충격으로 굳어졌다.

무려 여자가 먼저 건넨 고백.

더욱이 그녀는 마탑의 다프네.

한데 이런 엄청난 기회를 저렇게 바보같이 저버린다고?

“루, 루인!”

“레이디께 실례되는 말이다!”

몇몇 생도들이 루인을 노려보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저런 모욕적인 언사로 화답하다니!

“그만.”

“시론!”

시론이 측근들을 제지하며 경외의 시선으로 루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어떤 남자가 저 아름다운 다프네를 한낱 못생긴 몬스터처럼 취급할 수 있단 말인가!

더없이 굳건한 마법사의 의식.

그 초절하고 격조 높은 정신 세계가 가히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시론이 마치 우상을 바라보는 듯한 심정으로 루인에게 물었다.

“과, 과연!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라면 남자의 욕정쯤은 기꺼이 접어 둘 수 있단 말인가! 조, 존경한다! 혹시 너는 귀족인가? 이런 지고한 마도(魔道)가 평민에게서 나올 수 있을 리가 없다!”

“거짓말이다.”

“응?”

루인이 식판을 들고 퇴식구로 향하며 다프네를 힐끗 쳐다봤다.

“그런 바보 같은 눈으로 호감을 말하다니. 극단의 배우가 되고 싶다면 감정을 속이는 법부터 배워야겠군.”

하지만 다프네는 루인의 그런 지독한 평가에도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다프네의 모습에 생도들은 또다시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프네가 루인을 뒤따라 퇴식구로 걸어가자 황급히 정신을 차리는 생도들.

“포, 포기하지 않았어!”

“와나, 세상 진짜.”

새삼 처지가 서글퍼진 제드가 밥맛이 떨어진 듯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니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저런 여자를 거부할 수 있지?”

“남자가 아닐지도.”

터무니없는 세베론의 상상력이었지만 제드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루인 녀석과 씻어 본 적 있는 사람?”

그는 여리여리한 루인의 체형이 정말로 그럴싸하다고 믿는 눈치였다.

*  *  *

루인은 아카데미의 장미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어제 독파한 마도서를 미처 심상으로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그렇게 조금이라도 마도서를 소화하고 싶었는데 불행히도 그럴 수가 없었다.

다프네가 그림자처럼 계속 자신을 따라붙고 있었기 때문.

자신의 조사관(?)을 자처하는 아드레나도 이 정도까지 노골적이진 않았다.

“……왜지?”

“관심 받고 싶어서요.”

이렇게 대놓고 관심을 구걸하다니.

고고한 레이디의 입에서는 결코 쉽게 나올 수 없는 말.

웬만한 이유 없이 입탑 마법사의 자존감으로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는 터.

다행히도 다프네는 곧바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 주었다.

“인간이 위대한 존재의 관심을 받는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 유희(遊戲)의 삶에 인간이 끼어들기란 마치 기적 같은 일이거든요.”

“…….”

와.

루인은 정말 게리엘도스라는 인간이 달리 보였다.

베스키아 산의 수업 이후 이제 고작 사흘이 지났다.

마탑이 다프네를 파견해 올 정도라면 베스키아 산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일러바쳤다는 말.

무슨 마법사란 놈이 이렇게까지 입이 싸단 말인가?

일부 교수들과 학부장에게 상의를 하는 정도까진 이해가 되건만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이 정도라면 게리엘도스 교수는 마법학부가 아니라 마탑의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이제야 루인은 게리엘도스 교수를 상대할 방향성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터무니없는 고백을 한 건가?”

“관심 끌기의 일환이죠.”

“관심을 끌어서? 그 후엔?”

다프네가 활짝 웃었다.

“확인을 해야죠.”

“내가 드래곤이 맞는지를?”

“인지하는 것과 실증하는 것은 확실히 다르니까요. 마도의 조종(祖宗)이시니 저희 마법사의 사고방식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어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화를 낸다면? 너무 조심성이 없는 것은 아닌가?”

그 순간, 다프네의 아름다운 두 눈에 짙은 두려움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드래곤에 관한 연구라면 마탑의 누구보다 열심히 해 왔다고 자부했다.

“지혜로 향하는 인도자, 진실한 마도의 궁구, 세계의 균형을 조율하는 초월자. 제가 알고 있는 위대한 종족의 속성이에요. 저는 제 행동이 위험하지 않다고 믿어요.”

마치 확신하고 있는 듯한 다프네의 태도에 루인은 피식 웃어 버렸다.

이 여자는 드래곤들이 얼마나 괴팍한지를 알지 못한다.

너무나도 단순한 이유로 인간에게 호감을 가지거나 적대하는 것이 드래곤.

그들의 사고방식은 인간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쉽게 헤아릴 수가 없었다.

“드래곤을 책으로 배웠군.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테니 마탑으로 돌아가 자중하도록 해라.”

“저는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어요.”

발길을 옮기려던 루인이 멈춰 섰다.

“폴리모프(Polymorph)라도 풀란 뜻인가?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나 해?”

괴팍한 드래곤이라면 여기서 폴리모프를 풀고 곧장 유희를 끝내 버릴 수도 있다.

인간들에게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기꺼워할 드래곤은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

“아, 아뇨! 그 정도까진 바라지 않아요! 전 그저…….”

다프네가 고아하게 예를 다해 무릎을 꿇었다.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 위대하신 존재의 마도(魔道)를 배알(拜謁)하고 싶어요.”

다프네의 두 눈에 깃든 감정은 꾸밈없는 열망이었다.

식당에서와는 달리, 적어도 저 열망만큼은 진실.

그제야 조금은 마음이 풀어졌는지 루인이 다시 다프네를 응시했다.

그녀는 단순히 확인만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경지에 대한 갈망.

위대한 것을 향한 경이.

“이제야 좀 마법사다운 눈빛이군.”

마치 자신을 해부하는 듯한 루인의 강렬한 시선에 다프네는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가소롭구나. 감히 거리낌 없이 이 흑암의 공포에게 마도를 청하다니.”

‘그, 그의 이명!’

마탑으로 돌아가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정보.

다프네는 ‘흑암의 공포’라는 섬뜩한 이명을 가슴 깊은 곳에 간직했다.

“다만 내 흥미를 돋우는 데는 성공했구나. 내 유희의 옆자리 정도는 내어 줄 수 있으니 알맞게 처신하도록.”

“아아……!”

다프네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인이 멀찍이 사라졌다.

멀리 수풀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시론과 그의 측근들이 홀린 듯이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세상에! 저 다프네가 구질구질하게 무릎까지 꿇었어!”

“루인 녀석에게 무슨 말을 들었길래 저렇게 감동한 표정인 걸까?”

시론이 경악의 표정을 했다.

“설마! 허락한 건가?”

“그럴지도요?”

“아아!”

치잇, 역시 녀석도 어쩔 수 없는 남자라는 건가?

시론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물들어 갈 때, 반대편 수풀 쪽이 물결처럼 일렁이더니 초급 시야 교란 마법이 사라지고 있었다.

“앗! 너희는 언제!”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는 리리아와 슈리에.

이내 리리아가 냉랭하게 코웃음 쳤다.

“흥! 저건 차인 거다.”

“차인 거라고?”

슈리에도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리리아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아직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잖아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갑자기 벼락같이 화를 내는 시론.

“이 남부의 거짓 이교도들! 왜 자꾸만 루인 녀석에게 관심을 가지는 거지?”

“뭐래. 옛 망령에 사로잡혀 진실을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맹인 주제에.”

“닥쳐라! 대체 어디냐? 칼파스? 드레고아? 그것도 아니면 설마 뷰오릭?”

“뭐, 뭐래! 이만 가요 리리아!”

*  *  *

불길한 예감에 쟈이로벨이 루인을 쏘아붙였다.

-네놈, 너무 거침이 없어진 것이 아니냐?

거리낌 없이 드래곤 행세를 하는 것도 그렇고 생도들과 교수를 상대하는 방식도 그렇고 뭔가 확연히 달라진 느낌.

“최고의 대전사를 얻었는데 어렵게 갈 필요는 없지.”

-대전사(代戰士)?

루인이 말하는 대전사가 자신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이해한 쟈이로벨.

곧 그가 뭔가를 깨달은 듯 불같이 화를 냈다.

-초인과 맞상대할 상황이 오면 나서 주겠다고 했지 그걸 빌미로 네놈에게 도박을 하라고 하진 않았다!

“그게 그거지 뭐.”

-설마 너…… 꾀어낼 생각이냐?

“그래. 이 맛있는 먹잇감을 렌시아 놈들이 놓칠 리가 없지.”

쟈이로벨은 루인의 입에서 렌시아라는 단어가 흘러나온 순간 그의 의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네놈! 사홀이 했던 말을 확인하고 싶은 거군!

렌시아 놈들이 건국왕과 초대 사자왕의 드래곤들을 노렸던 것이 사실이라면.

타이탄족의 생존에 드래곤의 사체가 필요한 것이 정말로 진실이라면…….

“마탑은 언젠가 나의 존재를 렌시아가에게 알릴 거다.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렌시아 놈들이 접근해 오겠지.”

-너무 위험하지 않겠느냐?

“지금의 나는 르마델 왕국의 보호를 받는 생도 신분이다. 또 여차하면 인간임을 증명하면 끝나는 문제고. 충분히 도박을 걸어 볼 만해.”

루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사홀의 증언을 반드시 확인한다. 만약 렌시아가가 드래곤들을 사냥해 온 것이 확실하다면…….”

용납할 수 없다.

어쩌면 최후의 날까지 드래곤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놈들과 관련된 일일 수도 있기 때문.

그것이 사실이라면 렌시아가, 아니 타이탄족도 악제의 군단의 하수인일지도 모른다.

그 말은 흑암의 공포, 자신이 궤멸해야 할 대상이라는 뜻이었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 둬. 일은 언제나 예고 없이 일어나니까.”

루인이 곧바로 염동력을 일으켜 어제 연구했던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정신력으로 마력을 통째로 녹여 내는 듯하다가도 끝없이 세밀한 술식으로 이어지는 지고한 마법.

쟈이로벨이, 그리고 루인이 기다려 온 흑백(黑白)의 융합이, 그렇게 좁은 기숙사의 방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어느덧 아카데미의 여름 방학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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