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67화 (67/187)

<67화>

게리엘도스 교수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효과는 생각보다 꽤 컸다.

헤데이안 학부장에게도 소식이 전해졌는지 전보다는 확실히 덜 귀찮게 하는 느낌.

때문에 루인은 착실히 자신의 루틴대로 마법학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어, 오늘도 역시 나왔군?”

“…….”

루인은 애써 시론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분명 아무런 인기척도 없어야 할 새벽 4시.

한데 마법학부의 운동장은 생도들로 바글바글했다.

시론과 그를 추종하는 여덟 생도.

최근에 합류한 리리아와 슈리에, 그리고 아드레나.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얇은 슈미즈(Chemise)만을 걸친 채 벌써부터 준비 운동을 하고 있는 게리엘도스 교수였다.

루인의 황당한 시선을 느꼈는지 게리엘도스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생도들이 이 정도로 성실하게 몸을 관리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나 역시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오늘부터 함께 참여하게 되었네!”

그 뒤로도 생도들의 생활을 살피는 것은 교수의 의무라는 등의 별의별 일장 연설이 있었지만 루인은 애써 모른 척했다.

저 게리엘도스 교수가 무엇 때문에 뛰려고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며 학부장을 찾았지만 다행히 그는 보이지 않았다.

나이도 있는 사람이 함부로 뛰면 자칫 큰일이 날 수도 있는 터. 몸을 단련하는 것도 시기가 있었다.

물론 게리엘도스 교수의 나이 역시 오십 줄.

루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하하, 자네가 이 나를 거, 걱정해 주는 건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반응.

아마도 자신을 드래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다.

척척-

루인이 일정한 보폭으로 나아가자 생도들이 일제히 따라 뛰었다.

어색하게 웃고 있던 게리엘도스 교수도 황급히 발을 굴렸다.

파파파팟-

갑자기 루인이 전력 질주나 다름없는 속도로 치고 나가자 생도들이 이를 악물고 뒤따른다.

하지만 이미 단련된 루인의 속도를 초보 생도들이 따라잡을 수 있을 리 만무.

그렇게 네 바퀴를 뛰었을 때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루인과는 달리 몇몇 생도들이 주저앉기 시작했다.

물론 게리엘도스 교수도 그중의 하나였다.

“헉헉…… 저 녀석들! 어떻게 저렇게 뛸 수가 있지?”

오늘로써 6일 차를 맞이한 제드였지만 어김없이 오늘도 4바퀴째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루인이야 원래부터 이 짓을 하고 있는 괴물이었지만, 같은 6일 차인 시론과 세베론, 거기에 최근에 합류한 저 리리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메노에가 제드의 질문에 화답한다.

“혹시 몰래 헤이스트(haste)라도 건 게 아닐까?”

“오호!”

그럴싸한 추론이라는 듯 제드가 묘한 눈빛을 빛내고 있을 때 게리엘도스 교수가 엄정하게 꾸짖었다.

“후우…… 함부로 동기들을 매도하지 말게 생도들.”

놀랍게도 이 간단한 ‘운동장 달리기’에서조차 마법적 재능과 정신력이 정확히 정비례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지금 루인과 함께 뛰고 있는 생도들은 육체로 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법사의 뛰어난 정신력.

루인을 따라잡고 싶어 하는 끈질긴 집념과 승부욕이 그들의 육체를 한계로 이끌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게리엘도스도 마법사.

‘드래곤이라면 몰라도 생도들에게 질 수는 없다!’

게리엘도스 교수가 다시 필사적으로 뛰어가자 주저앉아 있던 생도들도 이를 깨물었다.

“게리엘도스 교수님도 50살이 넘는다고! 게다가 1일 차잖아!”

파파파파파팍!

그렇게 마법학부는 새벽부터 생도들의 열정으로 들끓었다.

*  *  *

죽어라 뛰고 난 후.

아카데미 식당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려 온 생도들은 시론의 식판을 쳐다보더니 동시에 기겁하고 있었다.

“도, 도대체 뭐야? 그 식단은?”

“진짜 미쳤나 봐! 죽으려고 그래?”

삶은 고기 한 덩이와 으깬 감자, 채소 한 움큼이 전부인 시론의 식단은 가히 죄수의 식단에 가까울 지경.

측근(?)들의 열렬한 반응에 시론은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네놈들이 위대한 마법사의 절제를 알 턱이 없지.”

“저, 절제?”

하지만 그렇게 득의양양하게 걸어가 자리에 앉은 시론은 루인의 식단을 확인하며 똥이라도 씹은 듯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스, 스테이크?”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듯, 치를 떨고 있는 시론.

거기에 으깬 감자에서 불에 구운 통감자로, 퍼석한 채소 무침에서 가벼운 향으로 드레싱한 샐러드로 바뀌어 있었다.

또한 묵직한 향의 고기 스튜에 빵까지 곁들였다.

“마, 말도 안 돼! 불에 구운 음식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었나?”

“전혀.”

루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자른 스테이크를 오물거리자 시론이 악착같이 이를 깨물었다.

“그럼 그동안은 왜 불에 닿은 음식들을 멀리한 거지?”

“전에는 속이 편하지 않아서.”

실망이 컸는지 시론이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불에 직접 닿은 음식을 멀리하는 건 일부 학파의 오랜 전통.

섭식 장애가 사람의 인지 작용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오래된 시각이었다.

그래서 시론은 루인이 위대한 마법사들의 흔적을 좇아 전통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건 마치 오랫동안 흠모해 온 학자가 눈앞에서 궤변을 늘어놓는 느낌이다.

“속이 조금 편해졌다고 갑자기 식단을 바꾸는 것은 오히려 속에 더 부담을 주지 않나? 게다가 맛을 가까이하는 건 네 절제에도 도움이 안 될 텐데?”

“맛?”

그저 삶은 고기에서 구운 고기로, 채소 무침에서 가벼운 향으로 드레싱한 샐러드로, 으깬 감자에서 통감자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스튜 역시 자극적이지 않은 일반 고기 스튜, 빵도 흔한 바게트.

어딜 봐도 맛을 중점으로 한 식단은 아니었다.

그런 반문을 담은 루인의 눈빛을 읽었지만 시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게다가 양 또한 급격하게 늘지 않았나! 너처럼 마르고 보잘것없는 몸에 엄청난 부담을……!”

시론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입을 꾹 닫았다.

사실은 자신의 말에 정답이 있었다.

“네가 잘 말했군. 이제 난 일반적인 수준까지 몸을 키울 작정이다.”

“……그렇군.”

시론이 독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녀석은 변절(?)했지만 자신의 각오를 여기서 무를 수는 없었다.

시론이 악착같이 삶은 고기를 베어 물고 있을 때.

세베론이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식판에 한가득 담은 채로 자리에 앉고 있었다.

“오호, 마법사의 절제인가요. 시론.”

“다, 닥쳐라!”

시론은 갖은 소스와 향신료로 범벅이 되어 있는 세베론의 스테이크를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짙은 육향, 코를 자극하는 풍미에 정신이 없을 지경.

한데 그렇게 고개를 돌린 시론의 시야에 고아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에메랄드빛을 가득 담은 머리칼.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 머리칼 사이로 별빛처럼 반짝이는 소녀의 두 눈.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너무나도 놀랐을 정도로.

더욱이 나이프와 포크를 쥔 모습만 봐도 귀족가의 예법을 단숨에 느낄 수 있는 고아함이었다.

한데 그런 그녀의 견장에는 아무런 매듭이 없었다.

‘무등위 생도?’

하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여자다.

새로운 보결 생도인가?

한데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거지?

그렇게 혼란스러운 시론의 시선이 그녀의 귀 뒤에 머물렀다.

세 개의 별(三星).

순간 시론은 마탑에서 가장 유명한 여마법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현자 에기오스의 수제자.

다프네 알렌시아나.

아주 어렸을 적, 그녀와 마주쳤을 때 숨이 쉬어지지 않았던 기억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다, 다프네!’

그녀는 천재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아카데미가 품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괴물.

다프네를 언급할 때면 할아버지의 눈빛은 언제나 경외심으로 물들어 있었다.

‘……왜지?’

그녀의 경지는 마탑의 초고위 마법사들과 수준을 함께한다.

마탑에서도 신비롭기 짝이 없는 인물.

마나의 축복을 타고난 그녀는 차기 마탑의 가장 강력한 탑주 후보다.

이미 한 학파의 수장에 맞먹는 경지를 이룬 그녀가 왜 마법학부, 그것도 무등위 견장을 끼고 나타났을까?

순간 시론은 등줄기에서 소름이 좌르르 돋아났다.

아무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듯한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가끔씩 루인을 힐끗거리고 있다.

설마 저 놀라운 마법사조차도 루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시론의 두뇌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그래, 그거였다!’

다프네는 마법적 재능과 실력에 비해 자기 사람이 없었다.

마탑의 초고위 마법사들 대부분이 현자이신 할아버지의 측근이거나 대마법사 게르휀의 사람들.

차기 탑주를 노리는 쟁쟁한 마법사들 사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면 어쩔 수 없이 자기 사람을 영입해야 했다.

그 도도한 다프네가 이런 무리한 선택을 했다면 그 이유를 따로 알아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 루인을 노리고 있었단 말이지.’

하지만 아쉽게도 이 몸이 먼저 점찍어 놨다는 말씀.

‘아무리 다프네라고 해도 이 시론의 사람을 함부로 눈독 들이는 건 아니지.’

시론이 자리를 옮기며 그녀의 시야를 방해했다.

시론이 갑자기 자신의 옆에 앉자 루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식사에 방해가 되는데.”

“아, 그냥 자리를 옮기고 싶었다. 조금 떨어지지.”

다프네.

저 리리아와 슈리에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경쟁자.

루인처럼 마도서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마법사라면 마탑이 보유한 희귀한 마도서 하나에도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빈틈을 보였다간 한순간에 낚아채 갈 수도 있는 것이다.

한데 그때.

또깍또깍.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 들려오는 구둣발 소리.

시론이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돌렸을 때.

다프네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본인의 식판을 든 채로.

“앉아도 되겠죠?”

엄청난 다프네의 미모에 놀랐는지 제드가 황급히 자신의 옆자리를 내주었다.

“무, 물론이죠! 여기에 앉아요!”

하필 그 자리는 루인의 맞은편.

하지만 여전히 시선을 내리깐 채 식사에만 집중하는 루인.

자리에 앉은 다프네는 그런 루인을 노골적인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다프네의 견장을 확인한 생도들이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엇? 새로운 보결 생도인가?”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이곳은 엄연한 르마델의 왕립 아카데미.

정당한 절차와 교칙의 엄수 없이 함부로 보결을 받는 곳이 아니었다.

한데 놀랍게도 다프네가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탑에서 파견 나온 마법사, 다프네라고 해요.”

“마, 마탑!”

“입탑 마법사라고요?”

“세, 세상에!”

입탑(入塔)은 모든 생도들의 꿈.

생도들은 그런 아득한 세계의 마법사가 아카데미의 생도, 그것도 무등위 생도의 견장을 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어색했다.

“마탑의 마법사라고 해도 신성한 아카데미에서 함부로 특권을 가질 수는 없죠.”

“자, 잠깐. 잠깐만요.”

세베론의 두 눈이 점점 찢어져라 부릅떠진다.

“그대가 다, 다프네라면 혹시 현자 에기오스 님의 수제자……?”

끄덕끄덕.

“부끄럽지만 그렇게 불리고 있죠.”

생도들은 입만 찢어지게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이는 분명 자신들과 비슷한데도 차원이 다른 신분을 지닌 고위 마법사였다.

“의외군. 이렇게 모두 떠벌이다니.”

시론의 진득한 눈빛에 다프네가 활짝 웃었다.

너무나도 마력적인 웃음.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컥거릴 정도다.

“그래. 하늘 같은 ‘입탑 마법사’께서 굳이 미천한 하계의 생도들과 함께 어울리려는 의도는?”

다프네가 고아하게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루인을 쳐다본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거든요.”

“뭐, 뭐라고?”

“네에……?”

“고, 고백?”

황망하게 굳어진 시론과 그의 친구들.

루인이 이건 또 뭐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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