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무심한 얼굴로 루인이 베스키아 산을 향해 마력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한 청록빛 마력들이 사방을 향해 뻗어 나가자 생도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멍해졌다.
“뭐 하는 거지?”
“마법인가?”
“아닌 거 같은데?”
“……하지만 아름답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마력 방출.
어떤 마법사라도 이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마력을 소모하는 일은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대체…….’
게리엘도스 교수는 그런 루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저토록 광활한 범위에 위력을 떨치는 마력 방출이라면 마법사의 가장 큰 약점인 마나번(Mana burn)을 각오한 위험한 행동이었으니까.
하지만 곧 베스키아 산의 정상을 부딪쳐 오는 계절풍을 맞이한 순간.
청량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루인의 마력이 한 몸처럼 춤추기 시작했다.
휘돌고 흩날리며,
나부끼다 잦아든다.
어떤 것으로부터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움.
비명처럼 몰아치다가도 부드럽게 나아가며 어떤 장애를 만나든 고고하게 부유한다.
강렬한 돌풍이든, 차가운 삭풍이든, 그것은 오직 세상을 품어 내는 하나의 바람이었다.
어느덧 석양이 진 하늘.
바람과 함께 일렁이다 포말처럼 흩날리던 루인의 청록빛 마력 결정들이 환상처럼 이내 찬란하게 부서졌다.
“…….”
게리엘도스 교수는 선 채로 굳어져 있었다.
루인의 보여 준 마력 방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제야 처절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루인의 입에서 여명처럼 잦아든 신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궤도 관성. 회전 등속. 관성 기준계. 각변위…… 저 바람에 또 무엇이 있습니까 교수님.”
게리엘도스 교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현상계(現象界:자연)를 바라보는 인간의 해석이 아무리 고명한들, 또한 어떤 수사를 가져다 붙인들 이건 그냥 바람입니다.”
시르하가 오랜 세월 바람의 대행자라 불려 온 영웅인 것은 그의 연산력이 뛰어나거나 감각이 엄청나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 자체로 바람을 느끼는 한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바람을 이해하며 살아온 한 명의 인간.
변함없는 그 사실이 그를 바람의 대행자라 불리게 해 주었다.
게리엘도스 교수를 바라보는 루인의 눈빛은 안타까움이었다.
“마법에 매진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학문적인 관점에 매몰되는 순간이 옵니다. 모든 현상을 해석하고 극복하며 이론으로 증명하고 싶어 하죠. 한 명의 마법사는 오래전에 원소를 이해했던 그 간단한 방법을 그렇게 잊어버립니다.”
게리엘도스는 거칠게 휘돌고 있는 베스키아 산의 돌풍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마법이 아니었다.
마법사의 감각, 학술적 이론을 논하기 전에 그저 자연 속의 바람이었다.
‘이 간단한 이치를…….’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던 걸까?
<자연을 이해하지 못한 자는 마법을 논할 수 없다.>
테아마라스의 마도서 첫 장에 적혀 있는 글귀.
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도대체 언제부터 잊고 있었던 거지?
어느덧 루인처럼 마력 방출을 시작한 생도들이 자연을, 그렇게 하나의 원소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와아…… 이런 기분일 줄은 몰랐어.”
“더없이 시원하고 청량해.”
“아아!”
복잡한 연산 없이 그저 흩날리는 바람에 자신들의 마력을 흘려보내는 생도들.
이것이 바로 마법사의 진짜 ‘감각’이었다.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법은 모두가 다르겠으나 그들이 느끼고 있는 것은 순수한 자연, 즉 바람 그 자체.
흔들림 없는 눈으로 생도들을 바라보던 루인이 다시 교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실망하셨습니까?”
질문의 모호함 때문인지 게리엘도스 교수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루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풍절계 마법을 향한 본인의 해석이 실망스럽냐고 묻고 있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실망을 느끼고 있냐는―
‘아…….’
루인의 두 눈을 마주한 순간 게리엘도스 교수는 그대로 고개를 내리깔고 말았다.
루인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 곧바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그렇다네.”
피식.
루인이 저 멀리 아래의 르마델 나이트 캐슬, 새까맣게 변해 버린 왕성을 응시했다.
“마법사의 자의식이 관성을 가진다는 건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잊고 있다는 그 감각마저 잊어버리게 만들죠.”
그 순간 게리엘도스 교수는 아드레나의 수많은 보고서가 떠올랐다.
루인이 쉼 없이 달리고 음식을 절제하는 근본적인 이유.
마법사의 날카로운 자의식을 유지하기 위한 그의 절제가 무엇을 위한 노력이었는지 즉각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네가 뛰는 이유가 바로?”
“인간의 의식은 쉽게 관성을 가집니다. 한번 무뎌지기 시작하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저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이라고 다를까.
지혜의 라이브러리에서 백마법의 세계를 엿본 루인은 백마법의 장점과 단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집단 지성은 분명 위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매몰되어 버렸다.
소수에게 전승되어 온 지혜는 오랜 세월 편협과 특권을 양산했고 이는 학파를 통해 더욱 공고하게 굳어졌다.
경쟁이 주는 이점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편집증과 불안에 시달리며 스스로 갇혀 버린 마법사들.
게리엘도스 교수 역시 그런 흔한 인간 군상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루인 생도…….”
게리엘도스 교수는 마음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루인은 아직 소년, 자아가 여물지 않은 나이다.
그럼에도 그는 인간의 자아가 지니는 관념적 한계, 그런 인간의 의식을 바라보는 관점의 밀도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어떻게 저 나이에, 인간의 약점을 저리도 냉정하게 정의하고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종(種)이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냉정하게 인간을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순간.
게리엘도수 교수의 머릿속에서 터무니없는 상상이 떠올랐다.
“……혹시 위대한 존재이십니까?”
-푸흡!
루인이 쟈이로벨의 웃음소리를 뒤로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게리엘도스 교수의 이런 착각을 내버려 두는 것은 분명 찝찝하지만 학부 생활을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귀찮은 일이 훨씬 줄어들 것이 명확하기 때문.
결국 루인은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글쎄요.”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루인의 반응에 게리엘도스 교수는 마치 확신하는 눈치였다.
‘세상에!’
드래곤 일족이라니!
수호룡 베스키아의 실종 후 드래곤들은 다시는 르마델 왕국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한데 이렇게 왕립 아카데미에서 지적 유희(遊戲)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게리엘도스, 위대하신…….”
순간 더없이 차가운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루인.
감동하며 예법을 펼치려던 게리엘도스 교수가 그대로 굳어졌다.
자신의 실수를 곧바로 깨달았기 때문.
유희를 시작한 드래곤들은 정체가 탄로 나는 즉시 인간들에게서 멀어졌다.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왕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위대한 존재.
하마터면 왕국에 크나큰 손해를 입힐 뻔한 것이다.
루인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은 귀찮은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저를 향한 호기심도 이쯤에서 멈춰 주시지요.”
“하, 하하! 물론 그래야지 루인 생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지만 일단은 자신의 의도가 성공한 셈.
몇몇 생도들이 풍절계 마법을 처음으로 시전하며 환호하고 있을 때 루인이 교수에게 요청했다.
“이제 그만 아카데미로 돌아가시죠.”
“아, 그래야지. 생도들은 모두 이리 모이게!”
* * *
현자 에기오스는 게리엘도스 교수가 보내온 보고서를 확인하며 홀린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녀석…… 아니 그가 드, 드래곤이라고……?”
마탑의 최고위 마법사 네홈이 경악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가 하이베른가의 수호룡 비셰리스마란 뜻입니까?”
현자 에기오스의 수제자 다프네는 부정했다.
“하이베른가의 백룡은 왕실의 청룡과 마찬가지로 왕국의 탄생 이후 한 번도 정체를 드러낸 적이 없죠. 가능성이 적은 이야기예요.”
“하지만 우리 왕국에 관심을 가질 만한 드래곤이라면 베스키아나 비셰리스마밖에 없지 않느냐?”
스승의 질문에 또다시 고개를 가로젓는 다프네.
“베스키아라면 몰라도 비셰리스마는 확실히 소멸한 것이 분명해요. 하이베른가의 후손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그를 찾아 헤맸는지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 옛날 하이베른가를 도와준 마탑은 알고 있었다.
하이베른가의 성곽 아래 지하 도시처럼 거대한 미로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네홈이 다프네를 응시했다.
“하지만 다프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드래곤이라면 비셰리스마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하구나.”
“왜 이렇게 의심 없이 확신하는 거죠? 게리엘도스 교수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짆아요?”
다프네의 반응에 현자 에기오스가 허허롭게 웃었다.
“그는 이 에기오스가 신뢰하는 자다. 마법학부에서 가장 신중한 사람이지. 절대로 섣부르게 판단할 사람이 아니야.”
뾰로퉁하게 볼을 부풀리며 다프네가 입을 다물자 네홈이 에기오스를 쳐다봤다.
“하지만 현자님. 그렇다면 그의 마나 서클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그들은 인외의 존재. 함부로 인간의 상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네.”
“인간의 눈으로는 살필 수 없는 초월적인 마법 현상이란 말입―”
에기오스가 네홈의 말을 잘랐다.
“자네는 드래곤 하트를 직접 본 적이 있나?”
“그, 그럴 리가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드래곤 하트가 등장한 적은 단 세 차례.
그것도 모두가 고대의 전설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몇몇 마도서에 드래곤 하트를 묘사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직접 확인해 보지 않은 이상 그 형태는 불명확했다.
“그렇다면 그게 드래곤 하트였을 수도 있지 않은가. 외부에 자신의 마나 서클을 소환하는 것은 그들의 용언(龍言)을 생각했을 때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지.”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는 드래곤 하트를 함부로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더욱이 그 목적이 고작 우리를 도발하기 위해서라는 건―”
“위대한 종족의 유희를 인간이 어찌 이해할 수 있겠나.”
“그럼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국가가 수십여 명의 초인들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드래곤을 보유한다는 것.
이는 모든 정치적 상황이 급변한다는 뜻이었다.
이 정보가 주변 왕국에 흘러가는 즉시 모든 동맹 관계가 새롭게 구축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 전부가 ‘알칸 제국’에게 붙어 버릴 수도 있는 일.
그것은 르마델 왕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재앙이었다.
“하이렌시아가에게는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실까지 장악하고 있는 그들에게는 결코 끝까지 숨길 수 없는 비밀.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을 이미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전에 일단 확실한 파악이 먼저예요.”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난 다프네가 로브의 후드를 덮어쓰고 있었다.
“그를 조사하고 있던 모든 이들을 그에게서 물리세요. 제가 직접 확인해야겠어요.”
“……네가?”
다프네는 마탑 밖의 인간들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에기오스의 눈빛에는 역시 염려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게리엘도스 교수는 루인이 드래곤 종족이라는 것을 인지한 상태.
그의 정체가 탄로 날 만한 일을 저지르거나 함부로 자극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잘할 수 있겠느냐?”
“네. 스승님.”
후드를 벗어 드러난 다프네의 신비로운 눈빛이 창밖의 마법학부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