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저 교수란 놈은 네놈을 통해 무언갈 계속 배우고 싶은 모양이구나.
루인도 게리엘도스 교수의 그런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자신에게 질문하는 형태였으나 내심으로는 자신에게서 어떤 실마리를 잡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지금의 이 질문은 그가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무엇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루인은 그런 노골적인 교수의 의도에 더 어울리기는 싫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계속 눈에 띄었다간 학부 생활이 더욱 어그러질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루인이 계속 침묵하고 있을 때, 시론이 당당하게 먼저 손을 들었다.
게리엘도스 교수의 눈에서 잠시 실망하는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론 생도가 한번 대답해 보게.”
시론이 한층 더 깊어진 눈으로 게리엘도스 교수를 응시했다.
“지금까지 저는 학술적 이론과 마법사의 감각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 이는 마법사가 스스로 판단해야 할 가치문제라고 배웠습니다.”
생도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말을 이어 가는 시론.
“마법의 이론을 우선으로 삼을지, 혹은 감각을 더욱 다듬을지는 한 마법사의 고유 영역입니다. 한데 교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째서 ‘모순’이라 멸칭하시는지요?”
역시 게리엘도스 교수의 표정은 실망하는 기색.
사실 이 문제는 마법학부에서 교편을 들고 있는 교수라면 누구나 겪고 있는 중요한 화두였다.
이론으로 완벽히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마법들을 죄다 감각의 영역이라 치부한다면 결국에 남는 판단은 하나뿐이었다.
천재적인 재능과 천부적인 감각을 타고났다는, 그런 비마법적인 설명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게리엘도스 교수는 마법의 확실한 규격화, 즉 일원화된 체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생도들 모두가 동등한 기회에서 출발하길 바라는 마음.
재능과 감각으로 치부하는 마법보단, 모든 생도에게 똑같은 체계로 다가가는 마법을 가르치고 싶은 것이었다.
“말해 보게. 세베론 생도.”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있던 세베론도 입을 열었다.
“저희 생도들의 능력은 모두 다릅니다. 오히려 동일한 능력을 지닌 생도가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죠.”
“…….”
“마냐의 양과 순도, 염동력 수준, 서클 경지…… 더구나 ‘마력에 대한 감각’은 수치화할 수 있는 것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고전 마력 역학에서도 이 부분을 선택의 문제로 두루뭉술하게 넘긴 거겠죠. 각국의 마탑에서조차 이런 판단을 꾸준히 유지해 왔습니다.”
게리엘도스 교수가 두 눈을 빛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세베론의 말투는 어느덧 차갑게 식어 있었다.
“교수님께서 질문하신 문제는 너무 거대한 담론입니다. 저희 생도 단계, 더욱이 무등위 생도들의 수업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닌 것이죠. 마탑의 대회의(大會議), 혹은 학파들끼리의 대논쟁(大論爭)에서나 다룰 만한 화두입니다.”
“…….”
“그런 거대한 담론을, 굳이 루인 생도에게 질문하신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게리엘도스 교수가 담담히 무등위 생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이 반은 독특했다.
현자의 손자 시론.
천재라 불려도 손색없는 세베론.
무심한 얼굴 속에 끝없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리리아.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한 의뭉스러운 슈리에까지.
이들에 가려졌을 뿐이지 제드와 프레나 역시 만만치 않은 자질의 생도들.
한 학년에 한 명도 나오기 힘든 자질의 생도들이 이 작은 교실에 득실득실 모여 있었다.
더욱이 그 중심에 존재하는 루인 라이언.
거대한 담론을 왜 한낱 무등위 생도인 루인에게 질문하는 거냐고?
저 뛰어난 천재들조차 녀석이 얼마나 엄청난 마법사인지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놈은 천재? 그딴 것이 아니다.
서클과 같은 마법의 경지 따위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왕국의 또 다른 현자인 헤데이안 학부장님조차 판단을 보류한.
그야말로 규격 외, 감히 측정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루인이었다.
-네놈. 그렇게 관계의 방벽을 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깨닫고 나아가는 것이 스스로 힘만으로 가능하다면 어디 이름 없는 동굴에서 수양하는 편이 훨씬 나은 터. 네놈도 그걸 잘 알기에 이런 아카데미에 온 것이 아니냐?
갑작스러운 쟈이로벨의 의견에 루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시끄럽다.’
-되도록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은 네 녀석의 심정도 이해는 한다만 어차피 네 귀족 신분을 모른다면 큰 상관은 없지 않느냐?
‘내가 뛰어난 역량을 드러낼수록 악제(惡帝)와 렌시아가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다.’
-그게 어때서? 어떤 놈이 무슨 방식으로 접근해 올지 흥미롭지 않느냐? 접근해 오는 자들이 모두 악의를 지녔을 거라 단정 짓는 것도 우습고 말이지. 게다가 너는 전생의 정보를 통해 상대를 압도할 수 있지 않느냐?
루인은 한 번씩 이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해 대는 쟈이로벨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신씩이나 되는 놈이 매번 이 간단한 이치를 놓치고 있다니.
‘적어도 초인 정도는 제압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당장은 이것이 자신의 명확한 기준점이었다.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와의 결투를 다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고.
‘악의로 접근했을 때 제지할 방법이 없다면?’
-흐음…….
‘목숨을 잃든, 상대를 놓치든 둘 중 하나다. 하나는 또다시 내 부활을 위해 네놈의 진마력이 타격을 입는다는 뜻이고, 하나는 내 정보가 왕국 전역에 드러난다는 뜻이다.’
쟈이로벨의 흑마법을 통해 부활할 수 있지만 언제나 그것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마지막 보루여야만 했다.
쟈이로벨의 진마력이 모두 소진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모든 게 끝장이기 때문.
동료들의 죽음을 짊어지고 도착한 지금의 운명은 결코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루인은 최대한 치밀하게 자신의 동선을 신경 쓰고 있었다.
-초인 정도만 상대할 수 있으면 된다는 거냐?
아직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초월자들, 즉 악제와 그의 군단장들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적어도 이십 년은 지난 후의 일이니까.
-이 쟈이로벨의 강림체로 상대해 주겠다. 비록 본체는 아니지만 진마력만 온전한 상태라면 인간족 초인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
‘뭐……?’
쟈이로벨은 마계에서 구를 만큼 구른 마족이니만큼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존재였다.
만에 하나 초인을 상대하다가 강림체에 타격이라도 입는다면 그의 영격(靈格)에 크나큰 손해로 이어질 터.
어쩌면 마계의 본체에 타격을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왜지? 왜 그렇게까지……?’
-네놈은 이 쟈이로벨의 하나뿐인 제자이지 않느냐.
아, 괜히 물어봤다.
루인은 쟈이로벨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금방 유추해 냈다.
그도 빨리 보고 싶은 것이다.
흑마법과 백마법이 융화되어, 최종적으로 진화한 자신의 마법이 어떤 형태와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쟈이로벨 역시 거기서 대마신 므드라를 이길 수 있는 단서를 잡으려는 것이었다.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신의 각오가 그 정도라면 어울려 주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루인이 생도들을 바라보자 아직도 그들은 게리엘도스 교수와 치밀하게 논쟁을 이어 가고 있었다.
“무슨 수업을 할지 그 결정권은 엄연히 이 게리엘도스에게 있네.”
“그렇다면 좋습니다. 하지만 이번 수업을 통해 저희의 성적을 가늠하지는 마시죠.”
“그러지.”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은 세베론이 루인을 쳐다봤다.
이 모든 일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은 그가 저토록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만 있으니 왠지 세베론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게 다 교수님들께서 네게 관심을 보여서 일어난 일이잖아. 뭐라고 말 좀 해 보지 그래? 자꾸만 이런 식으로 우리 성적이 영향을 받는 건 별로 내키지 않아.”
세베론은 아다만티움 박스 과제로 무등위 생도 전부에게 주어진 만점의 점수를 유일하게 거부한 생도였다.
자신의 능력으로 쟁취한 과제의 해결이 아니기에 학점을 거부한 것.
마법사로서의 그의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루인이 게리엘도스 교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제 답을 듣고 싶으십니까?”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게리엘도스 교수는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네. 자네에게 답이 있는가?”
이제는 생도들도 게리엘도스 교수의 노골적인 태도를 통해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교수님은 루인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혜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나가시죠. 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대로 루인이 무표정하게 일어나 교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멍한 표정으로 게리엘도스가 그의 뒤를 따르자 생도들도 하나같이 교실 밖으로 나왔다.
루인이 아카데미의 정문을 열고 구불구불한 상점가의 계단길을 오르기 시작하자 게리엘도스 교수는 금방 난색을 표했다.
수업 중에 함부로 아카데미를 빠져나오는 것은 교수로서 큰 부담이었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자신의 책임.
하지만 게리엘도스 교수는 도저히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 신비로운 생도가 지금까지 보여 준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루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르마델 나이트 캐슬의 끝부분이었다.
산자락과 이어진 마지막 성곽.
그 성곽 위로 르마델 왕국을 상징하는 거대한 베스키아 산자락이 저 멀리 하늘 끝까지 굽이쳐 있었다.
루인이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자 게리엘도스 교수의 얼굴이 희게 변했다.
“루인 라이언 생도!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제 답을 듣고 싶다고 하셨을 텐데요.”
루인이 베스키아 산의 머나먼 정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답은 저기에 있습니다.”
생도들이 기겁을 하며 걸음을 멈췄을 때, 리리아만은 지독한 표정으로 루인을 따라나섰다.
이미 루인과 함께 운동장을 뛰기 시작한 시론과 그의 친구들도 결연한 눈빛으로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다는 듯, 게리엘도스 교수가 달마디카 깊숙한 곳에 감춰 둔 지팡이를 꺼냈다.
“생도들, 모두 멈추게.”
생도들이 뒤를 돌아보며 깜짝 놀라고 있었다.
교수의 마법 지팡이는 그들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게리엘도스 같은 고위 마법사가 마력 크리스탈의 힘을 빌린다는 것.
그것은 극강의 난이도를 지닌 마법을 발휘할 거라는 예고나 마찬가지였다.
뭔가를 깨달은 듯 시론의 얼굴이 환해졌다.
“메스 텔레포트(Mass Teleport)!”
과연 시론의 예상대로 게리엘도스의 교수가 딛고 있는 바닥에서 복잡한 문양의 마법진이 생겨나며 새하얀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생도들은 모두 마법진으로 모이게.”
루인이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한 담담한 표정으로 가장 먼저 다가와 마법진 위에 올라탔다.
다른 생도들도 모두 마법진에 올라타자 공간 좌표계를 점검하던 게리엘도스 교수가 마지막으로 루인을 쳐다봤다.
“자네의 답이 있는 곳이 베스키아 산의 정상인가?”
“그렇습니다.”
“알았네.”
화아아아악-
마법진의 나직한 진동을 느낄 새도 없이 눈부신 빛살이 퍼져 나감과 동시에 생도들은 베스키아 산의 정상에 서 있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이질적인 감각에 몇몇 생도들이 기함하며 놀라워했다.
“우와아! 이게 말로만 듣던 메스 텔레포트!”
“이, 이런 느낌일 줄이야!”
“대단해요! 교수님!”
공간 전이 마법의 최고봉을 직접 겪었으니 그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어느덧 루인은 주변의 전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봉화대(烽火臺)군.
르마델 왕국의 가장 거대한 규모의 봉화대.
확실히 이런 곳이라면 왕국의 마법사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공간 좌표계다.
창백해진 게리엘도스 교수가 탈력감을 겨우 억누르며 루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 이제 말해 보게. 이 베스키아 산의 정상에 무슨 답이 있나?”
루인은 아무런 말도 없이 광활한 베스키아 산자락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