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므드라의 마법?”
대마신 므드라.
그는 마계의 여덟 절대자, 팔대마신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마신이었다.
최초의 마계대전 ‘전율의 시대’부터 존재해 온 그는 마족들에게 있어서 살아 있는 화석이나 다름없는 존재.
한데 헤이로도스의 마법이, 그런 마계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의 흑마법이라니?
마나의 발현 방식부터 수렴에 다가가는 과정, 전이 단계별 회로 구성, 마력을 맺고 강화하는 체계 자체가 명백한 백마법이었다.
특히 테아마라스가 남긴 대표적인 이론 업적 ‘대칭의 불변성’과 ‘통제 역설’의 흔적이 곳곳에 그득했다.
진마력이 아닌, 철저하게 인간계의 마나를 해석해 낸 마법이 너무나도 명확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데? 이건 누가 봐도 백마법이잖아?”
-그렇게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하지만 잘 봐라. 과연 그게 전부인지.
백마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지혜’다.
반면에 흑마법은 ‘정신’.
분명 헤이로도스의 마법에는 압도적인 정신 체계로 마력을 통째로 녹여 내는 느낌 자체가 없었다.
-이건 그저 놈의 마법을 인간의 백마법에 맞게 풀어놓은 것이다. 저기서 이론 체계나 술식의 속성 따위는 모두 덜어 내고 마력의 흐름 자체만 분석해 봐라.
“뭐?”
다시 마도서를 살펴본다.
루인은 쟈이로벨의 말대로 이론과 속성을 모두 배제하고 순수한 마나의 흐름만 좇았다.
이내 루인의 동공이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확산열화계(擴散熱火計) 흑마법……?”
-그래. 이건 놈의 작열 마법 ‘키오데라’다. 백마법의 이론에 맞게 변형된.
쟈이로벨은 그저 변형된 마법이라 애써 폄하하고 있었지만 루인은 알고 있었다.
헤이로도스의 ‘구유의 불’은 그보다 더욱 발전된 형태의 마법이라는 것을.
백마법과 융화되어 더욱 위력이 증폭된, 그야말로 놀라운 재해석을 보여 주고 있는 마법이었다.
루인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 헤이로도스의 마도서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 왔던 단서.
흑마법과 백마법의 융합.
하지만 쟈이로벨의 천적, 대마신 므드라가 남긴 유산이 실마리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늘 어그러지기만 했던 심상이 드디어 맺히기 시작한다.
화르르르르―
구유의 불, 지독히도 푸른 겁화가 심상의 세계에서 피어났다.
비록 심상으로 맺은 열기였으나 그 아득한 열기에 온몸이 불에 그을리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
금방 루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런 마법을 인간이 펼칠 수 있다고?”
구유의 불은 흑마법에 대한 이해 없이 결코 접근이 불가능했다.
이런 헤이로도스의 마법이 무수한 학파의 검증을 통과하고 하나의 이론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
그건 백마법사들이 이 마법을 이해했다는 뜻이었고 이는 루인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인간들 중에 마신의 흑마법을 연구한 마법사가 더 있다는 뜻이지. 아무래도 이 쟈이로벨이 인간들을 너무 얕봤던 것 같군.
루인은 대마신 므드라의 마법 체계를 이해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다.
‘하긴 나도…….’
쟈이로벨의 계약자.
므드라 역시 인간과 계약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텁-
아쉽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다.
더 이상 마도서에 빠져들었다간 애써 지켜 온 루틴이 깨질 위험이 있었다.
루인이 지혜의 라이브러리를 빠져나와 기숙사로 향했다.
* * *
운동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드레나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연신 시계탑을 확인하고 있었다.
“에……?”
야광빛으로 발광하고 있는 시계탑의 시침은 분명한 새벽 4시를 가리켰다. 한데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루인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아앗! 그 녀석이 없어! 없다구!”
한데 이 일이 왜 이렇게 즐거운 걸까?
철저하게 시간을 관리하던 녀석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되니 묘한 쾌감이 온몸을 번져 온다.
“흐흐흐! 녀석도 사람이었어!”
오래도록 루인을 관찰한 자신만이 간직할 수 있는 소중한 쾌감.
아아! 늦잠을 잤을까?
아니면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걸까?
뭐든 상관없다. 녀석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는 자신의 앞에서 절대로 거만하게 굴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약점을 잡은 것만 같은 기분!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침 8시가 될 때까지도 루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 괘종이 울리고 오전 수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비로소 루인이 교실에 나타났다.
루인을 발견한 아드레나가 득의의 미소를 흩날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툭-
루인의 어깨를 치면서 여전히 묘하게 웃고 있는 아드레나.
“에, 무슨 늦잠이라도 잤나아? 아니면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아? 이상하네. 그럴 사람이 아닌데에?”
루인이 초승달처럼 휘어진 아드레나의 눈을 억지로 외면했다.
“왜 부끄러워 하는 걸까아? 이해 못 하는 일도 아닌데에? 아아, 사람이라면 하루쯤은 늘어져도…….”
루인이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입―”
뭐라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고 마는 루인.
갑작스럽게 각성한 사홀과의 대화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거기에 ‘헤이로도스기 - 백마법총론’의 재해석 때문에 지혜의 라이브러리를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새벽 3시가 넘은 상태.
원래의 루틴을 지키려고도 해 봤지만, 한 시간도 숙면하지 못한 컨디션으로는 아예 하루 전체를 망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아침 달리기를 건너뛰게 된 것.
“내 입? 내 입에 뭐라도 묻었나아? 한껏 늘어지고 나니 막 그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게 되셨을까아? 갑자기 내 입술이 막 탐스럽게 느껴―”
루인은 이 여자가 무엇에 가장 약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100리랑. 정산은 나중에.”
“접수.”
입을 억지로 다물었지만 여전히 눈으로는 웃고 있는 아드레나.
-어차피 누구보다 시간의 효율성을 따지는 네놈이 아니냐? 마법도 중요하지만 필멸자인 인간에겐 번식 행위도 중요하다고 보는데.
-인간이라면 역시 명확한 번식의 기준은 엉덩이겠지? 저 빨간 머리 암컷 정도면 충분해 보인다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네놈의 생각은 어떠냐?
아, 정말 놈에게도 육체가 있다면 주둥아리를 찢어 버리고 싶다.
하긴, 뱃속의 알이나 토하던 놈에게 뭘 바라겠다고.
미개한 자웅동체로 살아온 마족이 인간의 고결한 사랑을 이해할 턱이 없다.
루인이 이를 깨물었다.
‘그렇게 궤짝이 열리는 꼴을 보고 싶어 하니 어쩔 수가 없군. 오늘 저녁…….’
-미안하다.
마계의 절대자 마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의 현실 타협.
루인이 한숨을 쉬며 책상에 앉았을 때 시론이 다가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어. 좋은 아침.”
이어 시론이 가방에서 널찍한 나무판자를 꺼내더니 루인의 책상 좌측에 고정시켰다.
“……무슨 짓이지?”
자세를 낮추며 왼쪽을 흘끗거리는 시론.
“이미 학부장에게 남부의 학파를 따른다고 의심까지 받는 녀석들이다. 앞으로 저 여자들과는 시선조차 섞지 마라 루인.”
“…….”
아침부터 여러모로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루틴만 어그러진 것이 아니라 이 빌어먹을 마법학부 생활 자체부터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느낌.
그렇게 루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시론을 쳐다보고 있을 때 게리엘도스 교수가 수업에 나타났다.
게리엘도스 교수 역시 등장하자마자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정신을 차리는 루인.
그렇게 루인은 다시는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수차례 다짐했다.
대마도사의 자의식이 바보 같은 마법 이론을 용납할 수 없어도.
혹여 무슨 말로 자존심을 긁어 오더라도 무조건 입을 다물 것이다.
-…….
문득 진짜 소년처럼 행동하는 루인을 지켜보며 쟈이로벨은 묘한 심정이었다.
정말로 아카데미 생활을 하고 있는 학부생 같은 모습.
가문에서의 루인의 날카롭고 차가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쟈이로벨로서는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과거의 슬픔을 잊은 걸까.
아니면 생도들의 생기발랄함에 자신도 모르게 동화되고 있는 걸까.
교탁 위에 올라가 교편을 잡은 게리엘도스 교수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네 생도들. 오늘은 ‘마력의 궤도 관성’에 대해 강론하겠네.”
동시에 생도들의 표정이 한 몸처럼 어두워졌다.
마법학부의 수업이 쉬울 리가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초급 마력 이론’의 수업 난이도란 그야말로 극상.
마력이라는 힘의 성질이란 워낙 복잡다단해서, 하나의 완벽한 이론과 법칙이 있다 해도 다른 모든 술식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특히 마력이 갖는 다양한 관성 성질은 마나의 양과 순도, 시전자의 인지 능력과 마법 경지, 염동력의 수준, 정신 체계의 특성에 따라 수렴값이 천차만별이었다.
배운다고 당장 자신의 술식에 적용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배워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생도들도 많았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전에 수업했던 ‘비관성 기준 좌표계’에 혼이 쏙 빠진 모양이군.”
몇몇 생도들의 얼굴빛이 흙빛처럼 변했다.
이 엄청난 이론들을 모두 배우고 먼저 나아간 1등위 생도 선배들에게 무한한 존경심이 일어날 정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마력의 성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회로를 구성하는 첫 단계부터 어그러지는 것을. 다행히 저번 수업보다는 흥미로울 것이니 그만 표정들을 풀게나.”
그때, 게리엘도스 교수의 오른 손바닥에서 갑작스러운 돌개바람이 피어났다.
휘우우웅-
“알아보겠는가?”
간단해 보이지만 무등위 생도들 수준으로는 절대로 펼칠 수 없는 마법.
“이것이 마력의 궤도 관성을 활용한 대표적인 중급 마법 윈드 스크류(Wind screw)네.”
생도들은 마치 살아 있는 바람처럼 휘돌고 있는 게리엘도스의 윈드 스크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력이 평면 궤도에서 적당한 가속을 시작하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등속하지. 이것이 바로 마력의 궤도 관성. 문제는 이 ‘적당한 가속’을 가늠하는 기준이네.”
윈드 스크류, 게리엘도스의 손바닥 안에 머물고 있는 돌풍이 점점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사람마다 인식하는 관성 기준계는 모두 다르네. 운동 상태를 가늠하는 관찰자의 시선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지. 이건 감각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이론의 모순이라네.”
“아아!”
“오오오!”
점차 빠져들기 시작하는 생도들.
“마력의 수축, 팽창을 통해 술식을 구현하는 염화계나 결빙계 마법의 경우, 잠시 마법이 흐트러져도 기회가 남아 있네.”
문득 루인을 바라보는 게리엘도스.
“하지만 이렇게 마력의 궤도 관성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경우, 모든 궤도 등속이 각변위를 초과해 버린다네.”
화아아아아악!
“아앗!”
“악!”
활성화된 돌풍이 교실을 먹어 치울 것처럼 거대해지더니 이내 공기 중에 흩어져 버렸다.
게리엘도스 교수가 수인을 털어 내며 루인을 바라본다.
갑자기 책상에 시선을 내리까는 루인.
“그래서 풍절계 마법은 실수하면 다시는 쓸어 담을 수가 없네. 속성 마법 중에서도 풍절계 마법의 난이도가 가장 극악한 이유지.”
게리엘도스 교수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관성 기준계를 마법사의 감각의 문제로 치부한다면 이 수업은 할 필요조차 없는 법.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나 루인 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