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63화 (63/187)

<63화>

렌시아가의 초대 가주가 신의 자손이라 일컬어지는 전설의 타이탄족이라니.

그런데 타이탄족이라면 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에 의해…….

루인의 눈이 금방 이채를 발했다.

“타이탄족은 멸망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극소수이지만 살아남은 타이탄들이 있단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사홀의 말대로라면 타이탄족이 인간 세상에 숨어들어 암약하고 있다는 뜻.

인류 연합의 총지휘자였던 검성의 곁에서 무수한 정보를 접해 온 자신이었다.

하지만 멸망이 가까워질 때까지 타이탄족의 흔적이라곤 접해 본 적이 없었다.

‘이상하군…….’

악제는 자신의 군단을 제외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 대상으로 규정했다.

타이탄족에게 정말로 건국왕과 사홀을 제거할 정도의 역량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런 악제의 군단과 충돌했을 것이다.

루인의 의문이 이어졌다.

“왜입니까? 살아남은 타이탄들이 극소수라면 인간의 눈에 띄어서 좋은 일이 없을 테죠. 한데 굳이 그런 위험한 짓을……?”

<날 죽여서 확실하게 비밀을 지켰지.>

“예?”

<내 생애에 그토록 처절한 함정은 경험한 바가 없느니. 수십 년은 족히 준비한 것만 같은 완벽한 암살 작전이었다.>

“후환 따위를 아예 생각지도 않은 거군요.”

하지만 자신의 선조 사홀은 초월자다.

그것도 스스로 영혼을 쪼개어 자신의 사념을 천 년 이상 지속시킬 수 있는 역량을 지닌.

하물며 최강의 생명체 드래곤까지 함께 상대해야 했다.

아무리 신의 후손이라는 타이탄족이라지만 그런 초월자를 상대하려면 막대한 자원을 갈아 넣었을 터.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런 위험 부담을 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루인의 머릿속에서 무수한 정보들이 추론과 가정을 반복하며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의외로 결론은 금방 도출되었다.

역사 속에서 드래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던 인간은 꽤 있었다.

그러나 드래곤과 함께 삶을 영위하는 운명 공동체, 즉 드래곤 라이더는 인류의 역사에 건국왕과 사홀이 유일했다.

다른 왕국들이 르마델 왕국을 ‘드래곤의 왕국’이라 칭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

건국왕의 청룡 베스키아.

사홀의 백룡 비셰리스마.

타이탄족, 아니 렌시아가는 분명 이 드래곤들을 노렸을 것이다.

“비셰리스마를 죽였다면 드래곤의 사체(死體), 혹은 드래곤 하트를 노렸군요. 어디에 필요했던 겁니까?”

<과연…… 영특하구나. 나는 그들의 영속성(永續性)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종(種)의 영속성, 즉 번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드래곤이 필요했을 거라는 뜻.

하지만 루인은 뭔가 다른 것이 더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오랜 세월을 통해 벼려진 감(感)이, 찌르르한 불길한 감각을 피워 내고 있었다.

“그들이 이종 번식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내가 아는 타이탄은 네칸 렌시아뿐이란다. 놈들이 여럿이었다면 날 상대하기 위해 그런 큰 희생을 감수하진 않았겠지.>

사홀의 말은 그들이 인간과 이종 번식을 할 수 없다는 뜻.

하기야 이종 번식이 가능했다면 진즉에 무수한 타이탄들을 양산하여 세계를 지배했을 터.

한참 동안 고민하던 루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한 가문의 멸망을 바라는 것은 아니시겠죠. 드래곤들을 보호하고 싶으신 겁니까?”

사홀의 말대로 그들이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드래곤의 희생을 강요했다면, 그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뜻.

아니 어쩌면 타이탄 용살자들이 지금까지 수많은 드래곤들을 해치워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존재들. 하지만 어머니는 신과 닿아 있는 타이탄족을 함부로 제약하실 수 없으시지.>

<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가 타이탄족을 절멸시킨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느니. 나는 베른(Baron)이 그의 길에 동참했으면 한단다.>

루인의 두 눈이 다시 투명하게 변해 갔다.

최소 과거의 경지를 이룩하고 양지로 나가 가문의 힘까지 동원할 수 있다면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는 렌시아가라는 막강한 가문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 아득한 심경을 느꼈는지, 사홀이 루인의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허허……>

순간 루인이 움찔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지식들이 갑작스럽게 머릿속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대 사자왕 사홀의 모든 심득이었다.

사홀의 우주.

한 무인의 무한한 세계.

찬란한 심상, 그 아득하고 너른 깨달음에 루인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으로 굳어 버렸다.

‘이럴 수가…….’

이것이 정녕 한 인간의 힘이란 말인가?

지금 사홀이 심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경지는 대마도사의 자의식으로도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무한함이었다.

한 무인의 검으로 이런 경지를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불세출의 초인이었던 검성이 이런 경지를 접했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런 감상도 잠시, 사홀의 사념이 눈에 띄게 약해지자 쟈이로벨의 영언이 거친 비명을 토해 냈다.

-네놈! 더 이상 영혼력을 소비했다가는 네 존재가……!

<……이미 각오했다네. 마족.>

사홀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불살라 자신이 깨달은 심득을 루인에게 전하고 있었다.

루인이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악착스럽게 버티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검사가 아닙니다! 대체 왜 제게 이런…… 크윽!”

<검사였다면 오히려 전하지 않았을 터.>

<이번 생에는 부디 뜻한 바를 모두 이루길 기원……>

순간 거센 폭풍처럼 몰아치던 심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루인의 영혼을 울려 오던 사념의 파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바라 온 일이었으나 정말로 사홀의 사념이 사라지는 순간이 오니 루인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복잡한 심정이었다.

쟈이로벨 역시 사홀이 이토록 어이없게 소멸을 택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뭐냐? 정말 사라진 거냐……?

즉각적으로 루인은 열상처럼 기억에 새겨진 사홀의 심득을 헤아리려 노력했다.

천 년을 지내 온 사홀의 선택.

초대 사자왕이 남긴 심득을 온전히 계승하는 것은 베른의 의무였다.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르고.

천천히 눈을 뜨고 있는 루인의 표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뼛속까지 마도(魔道)로 점철된 자신의 의식으로는 아무것도 헤아린 것이 없었다.

그저 간헐적인 심상만 남아 있다.

떠오를 듯 말 듯, 모든 것이 모호한 감각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마치 한바탕 꿈속을 헤집고 나온 것만 같은 기분.

검도 익히지 않은 자신에게 왜 이런 심득을 전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이건 애초부터 길이 달랐다.

-바보 같은…… 이래서 인간들이 멍청하다는 것이다.

마치 탄식처럼 울려 오는 쟈이로벨의 영언에 루인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루인이 쟈이로벨을 용서한 것은 바로 그의 이런 점 때문이었다.

놈이 인간을 싫어하고 저주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하나 그것은 일종의 외면이었다.

쟈이로벨이 그저 인간을 생명력을 갈취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이유.

인간은 언제고 죽어 갈 존재.

필멸자이기에 인연을 맺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어떠냐? 초월자가 남긴 심득을 먹어 치운 소감이?

“모르겠다. 헤아린 것도 짐작할 만한 단서도 없다. 시간이 지난다 해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아.”

-좀 더 자세히 표현해 봐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많은데 기이하게도 장면을 구성할 순 없다. 떠오른 감각도 죄다 순간순간이고 파편적이야. 감각을 나열하거나 연속성을 띠게 만들 수가 없다.”

-뭔지 알 것도 같군.

그런 쟈이로벨의 반응에 루인의 두 눈이 가득 호기심을 담았다.

“어째서지?”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네놈의 의식이 그의 이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루인은 자존심이 상했다.

경지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 역시 엄연히 초월자의 반열에 진입했던 대마도사.

-크흐흐흐! 아득한 초월자의 홀황(惚恍)을 만끽했다면 잠시나마 그 위력을 살필 수 있었을 테지. 어떠냐? 네놈의 전생과 비교했을 때?

그대로 굳어지는 루인.

사홀이 보여 준 심상의 세계.

그 세계는 한마디의 단어로 정의할 수 있었다.

‘무한.’

그의 검은 진실로 무한했다.

순간이나마 악제가 우스워졌을 만큼.

자신이 본 악제가 놈의 전부라면 결코 사홀과의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과의 비교는 무의미했다.

-표정을 보니 알 만하구나. 그러나 실망은 이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네놈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남겼겠느냐. 네놈의 기억을 모두 살핀 놈이다. 분명 뭔가를 느꼈겠지.

위로가 되진 않았다.

하긴 백마법도 아직 헤아리지 못하는 판국에 무슨 초월자의 힘이라니.

쟈이로벨의 말대로 잊지 않고 소중히 간직한다면 언제고 길을 열어 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야 했다.

문득 루인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마도서를 응시했다.

<헤이로도스기(紀) - 백마법총론>

최근 들어 가장 자신을 어지럽게 만드는 마도서.

헤이로도스는 테아마라스의 백마법을 완벽히 계승한 것을 넘어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한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는 학문적인 업적에 비해 마법의 경지가 낮았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대마도사의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었다.

후일 재평가되어 그의 시대를 따로 연대(紀)로 분리할 만큼, 지금에 이르러서 그의 위상은 대단했다.

-또 그 책에 미련이 생긴 것이냐? 그만 포기해라.

루인은 헤이로도스가 주창한 이론들을 단 하나도 심상으로 구현해 낼 수 없었다.

“…….”

옛 마법사들이 따로 연대로 구분하여 그가 생존했던 마법의 시대를 칭송했다는 것.

그 말은 헤이로도스의 이론이 무수한 검증을 통해 학술로 증명되었다는 뜻이었다.

한데 어째서 백마법의 기초를 착실하게 닦아 온 자신이 심상조차 맺지 못하는 걸까?

어느 정도는 심상이 맺혀야 마력회로를 구성할 수 있고 술식의 기초 발현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더욱이 고위 술식을 펼친 것도 아니었다.

루인이 심상으로 맺고자 한 마법은 그의 마법총론 가장 첫 장에 존재하는 ‘구유(九幽)의 불’이었다.

-잠깐? 이건?

루인이 워낙 많은 마도서들을 섭렵하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흥미를 보였던 쟈이로벨도 최근 들어서는 함께 읽지 않았었다.

한데 헤이로도스의 마도서를 루인의 시야로 자세히 바라보고 있자니 묘한 감흥이 피어오른 것이다.

독특한 술식 구현, 마력 발현 과정, 회로의 운용 방식이 어딘가 모르게 낯설지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호기심에 루인이 물었다.

“왜? 뭐가 이상하지?”

억겁과도 같은 시간.

쟈이로벨은 그 오래된 의문을 드디어 오늘로써 모두 풀었다.

-하하하하하하!

쟈이로벨의 웃음소리가 마치 절규처럼 들려온다.

-어쩐지 놈의 마법이 인간처럼 교활하더라니 인간계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구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쟈이로벨의 웃음이 흩날렸다.

-크흐흐흐흐! 이건 므드라의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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