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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62화 (62/187)

<62화>

긴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사홀의 사념은 루인의 기억을 통해 스스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보의 총량이 너무 방대한 나머지 소화하는 데는 제법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 인간의 생애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시간들.

한데 이 과정이 쟈이로벨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

루인의 정신과 동화되어 강림체의 강신(降神)까지 가능한 자신조차도 루인의 기억을 직접 살피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데 영혼의 파편에 불과한 사홀의 사념이 가능하다는 것.

그 말은 영혼의 등급, 즉 영격(靈格)이 자신보다 사홀이 월등하게 높다는 뜻이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수만 년 마신의 도정으로 닦은 영격이 필멸자에게조차 밀린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루인도 그렇고 사홀도 그렇고 이 빌어먹을 베른(Baron)들은 도무지 상식적인 맛이 없었다.

<음…… 여기까지인가.>

루인의 기억을 모두 훑어본 사홀의 사념은 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드래곤 라이더이자 르마델의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영웅 사홀.

그런 그조차도 루인의 처절한 지난 생, 그 지옥 같은 사연에 비한다면 평범한 삶 정도로 치부되는 것만 같았다.

더 놀라운 것은 차원 거품에서 수만 년을 버틴,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한 루인의 정신력이었다.

마신 쟈이로벨의 마지막 시공 초월 마법은 루인을 위한 일이었지만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마신 같은 초월적인 정신력을 지닌 존재조차, 희미해져만 가는 자아(自我)를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

하물며 인간의 정신으로 그 긴 시간을 견뎌 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초인을 넘어 초월자의 반열을 이룩했던 사홀이지만 그런 수만 년의 인고(忍苦)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루인.

깎이고 풍화되어 더 이상 닳을 수 없는 석상처럼 앙상한 표정.

아득한 시간선의 후손이었으나 저 무심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저토록 바래질 수 있다니.

이제는 녀석이 견뎌 온 슬픔과 치열함을 모두 알기에 더욱 가슴이 아렸다.

<말할 수 없는 심정으로 위로하마. 소중한 나의 자손, 베른의 후예여. 이것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구나.>

선조의 짧은 위로였지만 루인은 마치 오래도록 막혀 있던 둑이 터져 나온 것처럼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음울한 눈에서 바보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으나 루인은 머리칼을 흩트려 금방 슬픔을 지워 냈다.

-네놈! 나를 기억하느냐?

사홀은 루인의 기억을 통해 쟈이로벨이 자신의 후손들에게 했던 짓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러나 기이할 정도로 분노가 일어나지 않았다.

인간이던 시절이었다면 광포하게 그를 힐난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언제 사그라질지 모르는 사념에 불과한 자신.

그럴 힘이 남아 있다면 차라리 루인에게 보다 많은 것을 전해 주고 싶었다.

<아직도 날 탓하는가. 드비아느의 육체와 정신을 점령하고 생명력을 갈취했던 것은 너다. 금기된 섭리를 깬 것도 너이며, 세계의 경고를 무시한 것도 너다.>

-흥! 그래서 내 혼주(魂珠)를 깬 것이냐? 네놈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 거냐? 덕분에 내 영혼은 수천 년간 마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내 영토는 좁아지고 있다! 감히 인간 주제에……!

<잠깐! 그게 무슨 말인가? 혼주라니?>

-나의 강림체! 머리를 부수지 않았느냐!

사홀은 멍해졌다.

놈의 머리를 부순 것이 그런 엄청난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다.

결국은 지난 천 년간 후손들의 생명력을 갈취해 온 쟈이로벨의 행위가 모두 자신 때문에 일어난 필연이었다는 것.

마계로 돌아갈 방법이 사라진 쟈이로벨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증오밖에 없을 터였다.

어쩐지 루인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쟈이로벨의 강림체가 인간처럼 작더라니.

원래 쟈이로벨의 강림체는 트롤보다도 거대했다.

본래의 수준으로 회복하려면 아직도 수천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억울했다.

아무리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강림체라 할지라도, 설마하니 마신쯤 되는 존재가 일격에 머리가 깨질 것이라곤 생각지도 않았었다.

<사실 너무 약하지 않았는가? 탐색하기 위한 가벼운 일격이었다. 그런 가벼운 공격에 곧바로 머리가 터지리라고는……>

-크아아아악! 닥쳐라 인간! 그건 모두 네놈의 용(龍) 때문이었다! 그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가 절대용언으로 내 진마력을 흩트려 놓지만 않았다면 네놈 따위의 공격이 통할 성싶으냐?

절대용언(絶對龍言).

최강의 드래곤 종족, 그중에서도 지고룡(地古龍)의 직계 후손만 쓸 수 있는 절대적인 권능.

무한의 주문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절대용언이었다.

본체였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강림체로는 결코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권능.

<비셰리스마의 도움이 컸던 건 사실이지만 내 힘으로도 결국은……>

-시끄럽다!

안타깝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사홀은 인간의 역사에 매우 희귀하게 나타나는 초월자였다.

어떤 특수한 계기로 태초신의 의지와 권능을 이어받은 초월자들은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를 극복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뻔뻔한 놈!

쟈이로벨은 치를 떨었다.

이미 휘하의 몇몇 마왕들이 진지를 비우고 므드라에게 투항해 버렸다.

이대로라면 아예 자신의 세력권 자체가 사라질지도 몰랐다.

모든 마군들과 영토를 잃은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리 많지 않았다.

어쩌면 마신의 지위를 잃고 다시 평범한 마장으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을 표출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쟈이로벨은 궁금증이나 채울 요량이었다.

-네놈! 혹시 태초신의 목소리를 들었느냐?

오랜 시간 인간계를 탐험해 온 쟈이로벨이었지만 초월자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것은 처음.

과연 짐작대로 초월자들이 태초신의 의지에 화답한 존재들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건 말해 줄 수 없네.>

-흥!

비밀스럽게 굴었지만 역시 짐작대로다.

이제 보니 이 사홀이라는 인간은 꽤 순진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그만. 그쯤 해라.”

루인의 제지에 쟈이로벨은 영언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궤짝을 가져온 이상, 쟈이로벨은 함부로 루인을 자극하고 싶진 않았다.

이번에는 루인의 궁금증이 이어졌다.

“제 기억을 살펴보셨다면 악제(惡帝)의 위력을 느끼셨을 겁니다. 전성기의 선조님께서 상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음……>

사홀의 고민이 길게 이어졌다.

비셰리스마의 절대용언과 자신의 검이 어우러진다면 산과 바다조차 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악의로 가득 찬 악제의 권능이 어떤 위력을 발휘했는지 루인의 기억을 통해 모두 보았다.

그래서 쉽게 단언할 수가 없었다.

“선뜻 대답하기 힘들다는 뜻이군요.”

루인은 사홀이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희망적이었다.

고민이 길다는 건 그만큼 박빙의 승부를 예상한다는 뜻.

<쉽게 지진 않겠지만 역시 힘들겠구나. 나는 세계의 존재들을 모두 죽일 수 없다.>

루인이 되물었다.

“마음의 문제란 말입니까?”

<아니다. 현실적인 능력이 그에 미치지 않는다. 하위의 존재들이라면 어떻게든 상대해 보겠지만 최상위는 차원이 다르다. 더구나 난 어머니의 의지에 반할 수 없을 것이다.>

잠시 침묵하는 루인.

이어 그가 터뜨린 질문은 오랫동안 지녀 왔던 의문이자 자기 확신에 관한 문제였다.

“인간의 마도(魔道)로 그를 상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입니까?”

<하하하……>

사홀은 루인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자신의 힘, 미래를 확신할 수 없다는 건 어떤 이에게도 지옥일 터.

특히 루인처럼 상상할 수도 없는 사연을 걸어온 자라면 그 고통이 훨씬 더할 것이다.

<이미 나보다도 네가 더 잘 알고 있다.>

“…….”

<지난 생, 너 역시 초인 너머의 경지, 초월의 세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더냐. 그런 존재가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높은 세계, 절대적인 권능의 영역에서 바라본 세상.

모든 경계가 희미해진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러나 한없이 아득하기만 한 하나의 완벽한 경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그것이, 어떤 실체를 지니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곳에 마법(魔法)은 없었다.

당연히 무(武)도 없었다.

모든 것들의 초현실.

그 길을 다시 걸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도와주십시오.”

지극히 건조한 말투.

그러나 오랜 갈망을 담은 루인의 감정을 사홀은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내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구나.>

영혼의 파편 사념.

언제든지 재가 되어 부서질 수 있는 미약한 의지.

“……그렇겠지요.”

루인도 그런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변한 것도 오랜 세월에 의해 사념의 존재력이 약해졌기 때문.

그런 미약한 상태에서 각성까지 했으니, 지금 사홀의 사념은 마지막에 환하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상태였다.

금방 루인의 눈빛이 슬픈 감정으로 물들었다.

인간이 스스로 영혼을 쪼개면 영혼의 안식은커녕 환생조차 할 수 없는 무(無)의 존재가 된다.

그 말인즉, 사홀에게 반드시 사념을 남겨야만 했던 사정이 있을 거라는 뜻.

그러므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사홀의 인생, 그 마지막에 반드시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을 거라는 점이었다.

<머나먼 후손이여. 베른의 선조로서 나의 보잘것없는 심득을 후손에게 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허나……>

이제 사홀은 모두 기억해 냈다.

자신이 이런 최악의 선택을 한 이유를, 세상에 사념을 남겨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를.

<그전에 먼저 나의 염원이 있느니. 들어줄 수 있겠느냐? 아니 꼭 들어 다오.>

루인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분명 이 선조에게도 자신 못지않은 사정이 있을 것이다.

<렌시아를 멸(滅)해 다오.>

루인의 동공이 급격하게 확장되었다.

선조의 짧은 한마디였으나 말할 수 없이 처참한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이렌시아가.

르마델 왕국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가문.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네칸 렌시아…… 그자가 나의 비셰리스마를 죽이고 날 봉인하였다. 소(So), 그 녀석도 아마도 그의 손에 죽었을 테지.>

믿을 수 없었다.

건국왕과 사홀은 전설 속의 초월자.

하물며 드래곤 라이더인 그들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그것이 가능했다고 해도 건국왕이 죽었다면 지금의 르마델 왕국과 왕실을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어쩌면 르마델의 왕실은 천 년 전부터 렌시아의 꼭두각시였을지도 모른단다.>

그것은 루인의 기억을 모두 살펴본 사홀의 확신이었다.

“아니 선조님.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개국 초창기 렌시아가의 위세는 남작가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초월자 둘을…….”

이어진 사홀의 대답에 루인은 충격적으로 굳어졌다.

<렌시아가의 초대 가주 네칸은 타이탄족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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