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이, 이념 놀이?’
결코 마도(魔道)를 꿈꾸는 생도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마법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법으로 세계의 진실을 풀어낸 자들이었고, 당시의 시대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위대한 위인들이었다.
역사 속에서 선구자들이 보여 준 놀라운 이성은 마법사들에게 경전(經典)이나 마찬가지.
헤데이안 학부장은 모멸감에 가까운 심정으로 루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루인 생도. 방금의 그 말을 철회하게.”
“마치 학부장님의 직권으로 벌점이라도 부과하시겠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루인은 예의 비틀린 입매로 웃고 있었다.
“마도학의 역사를 부정하는 생도에게 좋은 점수를 주는 교수는 없네.”
“역사를 부정한다고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참지 못한 헤데이안 학부장이 언성을 높였다.
“감히 이 헤데이안의 앞에서 말장난을 해 볼 요량인가! 마법의 선구자들께서 남기신 이상을 모두 하찮다고 단언하는 자네가 어째서 역사를 부정하지 않고 있다는 건가!”
순간 루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학부장님께선 마법이 소멸하는 인간성의 대체재라고 하셨죠.”
“……위대한 마법사 렐리우스 님께서 남기신 뜻이네.”
루인의 두 눈에서 범접하기 힘든 빛이 흘러나왔다.
그런 루인의 기세가 얼마나 사나운지 헤데이안 학부장이 쉽게 입을 열기 힘들 정도였다.
“편제에서 마법사는 최후의 최후까지 보호받는 존재. 빗발치는 석궁 세례로 온몸에 구멍이 꿰뚫리면서도 병사들은 마법사만 쳐다보며 죽어 가죠.”
갑자기 눈을 감은 루인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수다를 떨던 이가, 나를 위해 남몰래 숨죽여 울던 형제 같은 놈이, 누구보다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녀석들이 간절히 바라던 것.”
“…….”
“전세를 한순간에 뒤집을 수 있는 단 한 명의 마법사. 저마다 희망을 담아 죽어 가는 그런 불꽃같은 눈빛들을 바라보면서, 수인을 맺고 복잡한 마력을 재배열하여 마침내 지고의 술식을 완성해 낼 수 있는 동력은―”
“…….”
“내가 인간이라는, 그런 머저리 같은 자각몽이 아닙니다. 인간성이요?”
루인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아드레나는 이런 루인의 모습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놀랍도록 차가운 눈빛이었으나, 그 속에 억눌린 감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질식할 것만 느낌을 자아냈다.
“……개나 주라지요.”
마치 직접 경험한 감정들을 토해 내는 듯한 무등위 생도.
헤데이안 학부장은 오랜 자조처럼 느껴지는 루인의 말속에서 참을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이 녀석은……!’
루인이 건넨 묵직한 감정.
가슴속에서 내내 메아리치는 그 기묘한 감정이 헤데이안 학부장을 입조차 열 수 없게 만들었다.
감정이란 전염의 성질을 띠고 있어서, 생도들도 하나같이 눈을 감은 채 각자의 감상에 빠져들어 있었다.
“마법사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건, 그럼에도 살아남았다는 얄팍한 안도입니다. 애써 추억을 잊어 가는 비겁한 외면입니다. 복수를 완성했기에 모든 희생을 합리화하는 뒤틀린 자기애(自己愛)입니다.”
검성, 내 목소리가 들리나?
“뒤틀려 가는 자아를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마법사는 모든 비굴한 감정들을 짊어질 수 있습니다. 소멸하는 인간성? 그런 게 가능하리라 보시는 겁니까?”
왜 말이 없나. 처음으로 하는 고백인데.
“잔인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사람의 인간성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두 개소리란 겁니다.”
미안하네. 자네가 등을 맡기던 마법사가 고작 이런 놈이어서.
* * *
밤안개가 짙게 내리깔린 어둑한 오후.
언제나처럼 루인은 차갑게 돌아와 운동장을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지켜보는 이는 제법 많이 늘어나 있었다.
복잡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리리아와 슈리에.
그리고 아직도 멍한 표정의 시론과 그의 친구들.
“……녀석은 전쟁을 겪은 건가?”
뇌까리는 듯한 시론의 질문에 슈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반세기 내에 전쟁은 없었어요.”
이어 들려오는 세베론의 잔잔한 목소리.
“용병대에 몸담았다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몇몇 유명한 용병대들은 다른 왕국의 전쟁에도 참여하니까요.”
리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까지 참여한 용병대의 마법사라면 내가 모를 리 없다.”
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아의 가문은 오랜 전통의 마법명가.
어브렐가라면 왕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용병대들과 밀접한 교류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다른 왕국으로 출정까지 나가는 용병대들은 우리 나이 정도의 마법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기야 노련한 용병대장이라면 기껏해야 갓 성인식을 통과한 마법사를 초빙할 리 없었다.
차라리 보수가 높더라도 안정적으로 뒤를 맡길 수 있는 경험 많은 마법사를 원할 것이다.
당연히 시론의 의문은 더욱 진해져만 갔다.
마법(魔法).
그저 지혜를 알아 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난제를 해결할 수 있기에 보람찼다.
창의적인 회로를 접하며 술식을 정복해 나가는 희열에 즐겁기만 했다.
한데 그런 마법이, 죽어 가는 자들의 염원을 짊어지게 된다니.
시론은 그런 식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
운동장을 뛰는 루인의 행동이, 전에는 그저 시선을 끌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바보 같은 이유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루인 라이언.
천재라는 간단한 수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분명 그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하는 녀석이었다.
툭- 투툭-
갑자기 생도복 상의 단추를 푸는 시론.
그의 곁을 지키던 제드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시론? 설마?”
단추를 모두 풀어낸 시론이 생도복 상의를 벗어 던졌다.
“나도 녀석과 함께 뛴다. 제드.”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굳어 버린 제드.
평소 모든 체력과 정신력을 마법에만 쏟던 시론이었다.
그런 그가 운동장을 뛰는 모습이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괘, 괜찮겠어? 한 번도 뛰어 보지 않았잖아.”
시론이 말없이 운동장을 향해 뛰어갔다.
남겨진 생도들이 하나같이 멍하니 시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한참을 고민하던 세베론도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세베론, 너도……?”
“뭐, 시론 님에게 생각이 있겠죠.”
세베론까지 뛰어가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제드를 필두로 시론을 따르던 생도들 모두가 상의를 벗으며 운동장으로 뛰어나간 것이다.
나무에 기대어 있던 아드레나가 루인을 관찰하던 것을 멈추며 인상을 찡그렸다.
“에, 왜 다들 미쳐 가는 거죠?”
한참 동안 루인을 바라보던 리리아가 기숙사로 발길을 옮기자 슈리에도 말없이 그녀를 뒤따랐다.
* * *
뎅뎅―
어느덧 새벽 3시를 알려 오는 괘종시계.
벌써부터 사서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역시 지금 시간까지 지혜의 라이브러리에 남아 책을 읽고 있는 생도는 오늘도 자신 하나뿐이었다.
텁―
루인이 책상을 정리하고 일어났을 때 쟈이로벨의 영언이 울려 퍼졌다.
-제자야.
쟈이로벨은 루인이 꽤 심란한 상태라는 걸 일찌감치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장난스레 불러 봤지만 루인은 지금까지 한 번도 대꾸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때.
<흐아아암, 잘 잤다. 앗? 여긴 어디야?>
-으헉!
쟈이로벨이 기겁을 하며 루인의 영혼 깊숙한 곳으로 종적을 감추자.
<으아아악! 책이 너무 많아! 뭐야! 이 지옥 같은 곳은?>
깨어난 선조 사홀의 사념.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것이 많았던 루인이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여긴 르마델 왕국의 아카데미입니다.”
<아카데미? 그게 뭐야?>
르마델의 건국 영웅 사홀은 천 년 전, 왕국이 태어나기도 전에 활동하던 인물.
그의 사념이 온전하다고 해도 그의 기억 속에 왕립 아카데미란 없을 것이다.
“왕국에서 선별한 인재들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천 년 전에는 이런 곳이 없었나 봅니다.”
<천 년 전? 그게 무슨 뜻이야?>
“여기는 당신께서 살던 때로부터 천 년 후의 세계입니다.”
본디 사념이란 연약했다.
갑작스럽게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면 붕괴되어 사라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신 체계에 위험한 변수로 작용할 확률이 높은 사념이 사라진다면 그것대로도 좋은 일.
<너. 나 알고 있는 거지?>
“당연히 알고 있죠. 건국왕님과 더불어 르마델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단 두 명의 드래곤 라이더. 당신은 건국왕 소 로오 르마델 님의 친구이자 베른가의 시조이십니다.”
<너! 비셰리스마를 알아?>
“그 이름은 당신을 사역하던 드래곤의 이름입니다.”
<비, 비셰리스마를 안다고? 그럼 지금 그 녀석은 어디에 있지? 안다면 제발 그 녀석에게 날 데려가 줘!>
하이베른가가 멸망할 때도 가문의 수호룡 비셰리스마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만약 비셰리스마가 있었다면 그렇게 비참하게 멸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건 모릅니다. 아마도 죽었을 겁니다.”
그렇게 루인은 계속 사홀을 자극하고 있었다.
마치 아이처럼 느껴지는 사념이, 역사 속의 위대한 선조라는 것은 너무 이질적이었다.
그래서 루인은 연속되는 자극을 통해 빨리 사홀의 사념이 각성하기를 바랐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없어지거나.
<죽었다고……>
불안한 듯 떨려 오는 사념의 파동.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사홀의 사념은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그래. 결국 죽었구나. 어쩐지 지고룡의 대지를 다 뒤엎었는데도 없었거든.>
루인은 깜짝 놀랐다.
지고룡(地古龍)이라면 드래곤 종족의 신화 속에 존재하는 창세룡.
신화처럼 아득한 존재가 실체였다는 것도 놀랍지만, 사홀이 그런 지고룡의 레어(Lair)를 알고 있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게다가 뒤엎었다니.
고고한 드래곤들이 알았다면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를 말살하려 들 것이다.
대체 이 사홀은 얼마나 엄청난 인간이었을까?
어쩌면 건국왕보다도 더 강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하긴 그가 남긴 작은 사념이 천 년이 지나도록 남아 있는 것만 해도 상식적이지가 않았다.
<어…… 네 이름은 루인 베른. 그럼 넌 나의 후손이야? 잠깐만! 이게 뭐지? 이런 비참한 세계가? 너 과거로 돌아왔어? 이게 가능해?>
영혼의 파편에 불과한 사념 주제에 자신의 기억까지 읽어 낼 수 있다니.
루인은 마치 모든 감각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어 불쾌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정신 방벽을 치고 싶어도 이미 영혼까지 침투한 사념을 어쩌지는 못했다.
<말도 안 돼! 세계를 이루는 ‘존재’들이 다 죽는다고? 어머니는? 그녀는 뭘 했지? 그녀가 우리를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아무래도 천 년 전의 인간들은 주신 알테이아와 조금 더 친밀했던 모양.
<영혼의 구름을 두른 저 녀석! 나 이외에 저만큼 강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니 말도 안 돼!>
순간 루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뇌 속을 헤집고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홀의 사념이 각성(覺性)을 시작했다는 것을.
그렇게 루인이 한참을 기다렸을 때.
사홀의 사념은 전과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나의 아이야. 앞으로 너와 할 이야기가 참으로 많겠구나.>
대마도사에게 아이라니.
루인이 비로소 환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