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리리아는 어브렐가의 역사에 존재했던 천재적인 마법사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벙어리로 태어났지만 절대언령(絶對言靈)을 깨우치며 불과 열다섯 나이에 마탑에 입성한 ‘침묵의 마법사’ 드리미트.
엄청난 마나 친화력과 본질을 꿰뚫는 직관으로 왕국 최초로 소환계 마법을 개척한 ‘유리하는 환영’ 듀스란.
시공간에 대한 탁월한 해석으로 새로운 경지의 전이 마법을 학회에 발표하며 세상을 놀라게 한 ‘시공 마학자’ 에릭진저.
그 밖에도 최근 강력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메데니아가(家)의 마법사들.
또한 왕립 아카데미가 배출한 무수한 천재들…….
‘……다르다.’
리리아가 한가득 이를 깨물었다.
어떤 천재의 생애를 살펴봐도 자금 자신이 보고 있는 저 루인을 설명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천재들이 특별한 재능을 꽃피워 각자의 분야를 개척했다면…….
루인은 마치 애초부터 모든 면이 완성되어 있는 마법사 같았다.
저런 터무니없는 수준의 염동력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그가 세상을 뒤덮을 정도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도, 세월이 쌓이는 만큼 강력해지는 것이 바로 염동력.
그런 염동력이 대마법사에 필적하는 것부터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리리아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경쟁자는 저 시론이 아니라 세베론이라는 것을.
술식을 이해하는 능력만큼은 자신조차 따라갈 수 없는 천재.
한데 루인은 그런 세베론마저 바보 취급하며 자신의 급진적인 이론을 증명해 냈다.
더 황당한 것은 그가 평민 출신이라는 것.
마법명가 혹은 귀족, 그것도 아니라면 뛰어난 스승의 지도 아래 오랜 기간 마법을 배워 온 생도들.
그런 생도들과는 달리 그는 출신부터 불분명한 마법사였다.
대화를 하다 보면 으레 느낄 수 있게 마련인 특유의 학풍도 관찰할 수 없었다.
마법사가 저 정도 경지를 이룩했다면 분명한 소신이 생겼다는 뜻인데, 추구하는 학파가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
그런 불가해(不可解)의 존재가 다시 입을 열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생도들을 망가뜨릴 작정이셨나.”
텅 비어 있는 아다만티움 박스.
생도들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전이 마법 같은 공간 술식으로 시도했다면 정말이지 큰일이 날 뻔했다.
물리적인 형태가 있어야 계측과 연산이 가능하다.
또한 그 모든 계산값이 정교한 전이 술식을 통해 외부에서 재구성된다.
그러나 저렇게 텅 비어 있었다면 무수한 오류로 인해 시전자의 뇌가 붕괴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헤데이안 학부장.
그가 곧 항의에 가까운 생도들의 눈빛을 마주하며 책을 덮었다.
그의 표정 역시 혼란으로 가득했다.
“설마 애초부터 풀지 못할 것이라 단정하고 계셨습니까?”
시론의 진득한 항의.
“위험한 상황을 방치할 생각은 없었네.”
리리아도 표독하게 물었다.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생도들의 창의적인 발상을 보고 싶으셨다면 처음부터 풀이 과정만 채점하겠다고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이번 과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불합리입니다.”
헤데이안 학부장은 당황스러운 심정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새겨 넣은 술식이었다.
그런 주문이 불과 한 시간 만에 해주(解註), 그것도 통째로 디스펠을 당해 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교수들이 머리를 싸맨다 해도 사흘은 걸릴 난이도.
괘씸한 유급 후보생을 시험하려 했던 마음이 돌이킬 수 없는 칼날이 되어 되돌아온 것이다.
이번 과제의 위험성이 교율청에 보고된다면 아무리 학부장이라고 해도 징계를 피할 수 없을 터.
물론 징계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폄훼될 대마법사의 명예는 문제가 달랐다.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겠다면 딱히 말리진 않겠네. 하지만 그렇게 담당 교수와 척을 져 봤자 자네들에게 득이 될 건 없네만.”
루인이 피식 웃었다.
지난 생에서 모두 보았다.
사람들에게 추앙받던 대마법사들이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그들은 완고한 자존심 때문에 무너졌다.
고고한 자아를 포기하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
단단해진 노인의 마음은 때론 세상의 어떤 추악한 것들보다 더한 비참함을 토해 내는 법.
솔직하지 못한 감정들이 저 게슴츠레한 눈꺼풀 뒤에 가득할 것이다.
감히 이 대마도사 루인의 앞에서 인간의 감정을 감추려 들다니.
“고작 한 사람의 역량을 시험하기 위해 생도들까지 위험으로 몰아간 것을 사과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물론 학부장님의 과제가 그런 의도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 시작이 옹졸한 감정이라는 건 틀림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루인은 학부장이 숨기고 싶은 마음을 차가운 현실의 바닥으로 끌어내 내동댕이쳤다.
순간 시론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루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 내 편을?’
시론은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루인의 냉철한 직관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심한 척하면서도 생도들의 신분과 사정을 모두 헤아리고 있었다는 건가?’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학기 내내 지혜의 라이브러리에 처박혀 있었으면서 자신과 학부장의 관계성까지 정확히 캐치하고 있다니.
“……오, 옹졸?”
헤데이안 학부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루인이 별것 아닌 투로 말을 이어 갔다.
“달리 대체할 단어도 없습니다만.”
학부장이 아무리 이것저것 물어봐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역시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마도사의 자의식이 비합리를 눈앞에 두고 그저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싶었지만 역시 무리였을까.
어쨌든 학부장은 생도들 앞에서 자신의 면모를 드러나게 만든 원흉.
“부정해서 마음이 편해지신다면 그리하시지요. 그러나 생도들의 마음에서 학부장님에 대한 존경을 덜어 내는 것까지 막아선 안 됩니다. 그건 좀 추하지 않습―”
“그만.”
입담까지 보통이 아니었다.
단지 말투만 정중할 뿐, 교묘하게 옹졸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추악한 늙은이로 만드는 녀석이었다.
학부장의 권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달려드는 놈이라면 유형은 단 하나.
“원하는 것이 있는가?”
루인이 흐릿하게 웃으며 담담하게 요구했다.
“이번 학기 전원 만점은 약속하신 부분입니다. 거기에 제 개인적인 열망입니다만, 제한적인 도서관의 출입을―”
“허락하지.”
학부장이 더는 떠들지 말라는 투로 단번에 수락을 해 오자 루인은 흡족한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단숨에 자신의 의도를 읽고 정확한 처세를 보여 준다.
과연 노련한 늙은이.
헤데이안 학부장이 생도들을 훑으며 다시 고아하게 입을 열었다.
“약속대로 최고점의 부여는 물론 정중하게 사과하겠네. 이제 되었는가?”
초급 염동학 개론은 가장 난해한 필수 과목.
아직 학기가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그런 필수 과목의 최고점이 보장되자 생도들의 낯빛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더욱이 학부장이 사과까지 한 마당이라 더는 따질 수가 없었다.
“그럼 오후 수업에서 보겠네.”
“네? 오후 수업이라뇨?”
슈리에가 당황하며 묻고 있었다.
오후 수업은 오델로 교수의 초급 마도학 사론.
훌륭한 인품을 지닌 오델로 교수, 또한 생도들이 가장 재미있어하는 필수 과목이었다.
“초급 마도학 사론도 오델로 교수를 대신해 내가 맡게 되었네.”
“…….”
“…….”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정적.
그제야 자신들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뼈저리게 깨닫기 시작한 생도들.
그렇게 헤데이안 학부장이 사라져 가자 생도들이 하나같이 루인을 차갑게 노려봤다.
이번 일을 빌미로 학부장이 얼마나 괴롭혀 올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시론만은 달랐다.
그가 잔뜩 호감 어린 표정으로 루인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내밀었다.
“날 위해 나서 준 것은 제법 흥미로웠다. 나는 시론이다.”
“음?”
시론이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루인은 다가오는 호의를 배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루인이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시론은 한껏 기분이 들떴다.
세베론을 능가하는 천재.
이런 엄청난 인재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이번 아카데미의 생활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시론이 더없이 진중한 얼굴이 되어 다시 루인을 응시했다.
“그대의 스승이 누구인가? 그런 엄청난 염동력이 우리 나이에 가능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잠시 생각하던 루인이 희게 웃으며 대답했다.
“쟈이로벨.”
즉각적으로 쟈이로벨의 반응이 이어졌다.
-네, 네놈!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냐……?
한껏 들떠 떠들고 있는 쟈이로벨 때문에 루인이 피식거리며 웃고 있을 때.
“쟈이로벨? 그런 마법사가 우리 왕국에 있었나?”
시론이 생도들을 돌아보자 하나같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처음 듣는데?”
“나도 처음 들어.”
“다른 왕국의 마법사인가?”
다시 루인을 바라보는 시론.
“그럼 너의 학파는?”
무등위 생도들의 대부분은 아직 학파를 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인 같은 천재적인 녀석이라면 반드시 추구하는 학파가 있을 것이다.
“…….”
루인은 백마법의 다른 것들은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 학파 문제만큼은 부정적이었다.
당장 헤데이안 학부장의 태도만 해도 그랬다.
하나의 학파에 평생 매몰된 자들.
억척스러운 소속감, 추구해 온 이론에 대한 어그러진 자부심.
그런 것들은 마법사의 정신을 좀먹게 할 뿐이었다.
많은 학파로 갈라져 서로 경쟁하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각각의 자부심이 비틀려 있다면 전체의 발전이 저해될 뿐이었다.
-고작 한 뼘의 땅을 사이에 두고도 각자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이 인간이지. 하물며 늘상 관념과 관념이 부딪치는 마법이다. 이건 마계 쪽도 사정이 다르지 않아.
어쩌면 지혜를 추구해 온 모든 이들에게 불가항력적인 악습일지도 모른다.
루인은 그런 편협한 세계에 자신까지 발을 들이긴 싫었다.
“추구하는 학파 같은 건 없어.”
리리아가 그런 루인의 말에 가장 놀라고 있었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학파란 자기 확신이요 증명이다.
그만큼 마법사의 평생을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이며 살아가는 가치 그 자체.
“그게 정말 사실인가?”
반면 시론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항상 도도하기만 하던 그가 이렇게 기꺼운 감정 표현을 하는 건 이례적이었다.
‘좋군!’
루인을 할아버지의 엘고라 학파로 영입할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
이런 엄청난 천재라면 학파 내의 원로들은 물론 할아버지 역시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었다.
어쩌면 엘고라 학파는 이 천재에 의해 좌지우지될지도 모른다.
시론은 자신의 눈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슈리에가 루인에게 친하게 굴었다.
“마력 발현에 대한 당신의 관점이 듣고 싶어요.”
“마나를 사유하는 과정이지.”
“사유(思惟)?”
“다만 그리 목맬 필요는 없다. 너무 학문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것이 좋아.”
“인위적인 과정보단 실체적 현상이 중요하다는 얘기군요.”
“제법…… 틀린 말은 아니다.”
리리아도 질문 공세에 합세했다.
“사유를 동기로 삼는다면 역시 탐구와 인식을 중요시하는 건가?”
“넓은 의미로는 그런 식의 관점도 가능하지. 다만 결국은 목적의 문제다. 무슨 의지를 담을 것인가. 마나를 사유하는 건 그래서 시작점이다.”
“너무 관념적인 접근이군. 내 생각은…….”
점점 묘한 표정으로 변해 가는 시론.
광신도들은 절대로 처음부터 거창한 교리를 들먹이지 않는다.
가만 듣고 있자니 슈리에와 리리아는 어떤 특정 학파의 인식론(認識論)을 향해 교묘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고 있지 않은가?
저 여자들이 지금 눈앞에서 인재를 빼돌리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미혹당하지 마라 루인! 저 여자들이 지금 널 세뇌하고 있다!”
“세뇌……?”
저토록 깨끗하고 투명한 천재에게 감히 더러운 것을 묻히려 들다니!
시론이 여생도들의 고단수에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