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58화 (58/187)

<58화>

술식을 해제하려고 드는 즉시 시전자의 마력을 흩어 버리는 대마법 방어진.

방어 술식을 해제하는 것에 성공한다고 해도 다시 철벽처럼 자리 잡고 있는 고위 개폐 마법.

이런 철옹성 같은 난이도의 이중 트랩 주문이라면 졸업을 앞둔 4등위 생도들이라고 해도 쉽게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가능하다고 해도 최소 몇 주, 길게는 몇 달 동안 술식의 작동 기재를 연구해야 겨우 가능한 수준.

파스스스스―

한데 루인은 또다시 염동력만으로 마법을 구현하며 대마법 방어진을 무력화해 버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방금처럼 일시적으로 주문을 상쇄하는 것이 아닌, 이번에는 완전하게 해체를 해 버렸다는 점.

극한까지 구동된 염동력 덕분인지, 루인의 온몸에서 새하얀 김까지 아지랑이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방어 주문의 술식이…….”

“……사라졌다.”

시론과 리리아가 경악의 얼굴로 루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보다 훨씬 강력한 염동 마법.

최소 교수님들이 새겨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대마법 방어진을 염동 마법만으로 분쇄할 수 있는 생도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디스펠(Dispel) 마법의 전제 조건을 생각해 보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건이었다.

하위 경지의 마법사가 상위 경지의 주문을 디스펠한다?

그건 차라리 꿈같은 일.

비교 우위에 있는 역량을 지니고도, 상대의 술식을 읽어 내는 안목이 없다면 결코 불가능한 것이 바로 디스펠이었다.

하지만 이론으로만 따진다면 상위 위계의 주문을 해제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초월적인 연산력.

술식을 꿰뚫어 보는 직관.

모든 비효율을 생략할 수 있는 염동력.

디스펠 주문의 완성도까지…….

무엇보다 시전자의 마력 자체가 더없이 정순해야 했다.

게다가 이 모든 요건을 충족한다고 해도 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실패.

한데 저 루인은 단 두 번의 도전 끝에 깔끔하게 디스펠해 버렸다.

일시적으로 대마법 방어진을 걷어 낸 것과 아예 디스펠까지 해 버린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

‘대체 염동력의 수준이 어느 정도란 말이지?’

시론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닌 생도라고 해도 분명 염동력은 마법사의 세월에 정비례하는 법.

세기의 천재들이 무슨 짓을 해도 현자의 아득함을 따라잡을 수 없는 건 바로 그 빌어먹을 염동력 때문이었다.

스스스스―

어느덧 마력을 흩어 내며 염동력을 다스리고 있는 루인.

생도들이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수만 년이 넘도록 이어진 루인의 정신.

단순한 잣대로는 결코 가늠할 수 없는 극한의 비현실.

그런 비현실적인 괴리는 생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하물며 대마법 방어진 주문을 직접 아다만티움 박스에 새긴 당사자의 충격은 어떨까?

‘마, 말도 안 되는……!’

루인의 마나 서클을 봤을 때보다 오히려 더한 충격으로 멍해져 버린 헤데이안 학부장.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보고도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저 아다만티움 박스에 새겨 넣은 대마법 봉쇄 주문 AMF(Anti-magic Field)는 7위계의 고위 마법.

그런 고위 마법을 이해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무려 디스펠이라니!

더욱이 그 파훼 방식 역시 상식적이지가 않다.

AMF의 마력 간섭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마력 구현법이 바로 염동 마법.

그런 녀석의 염동 마법도 놀라웠지만, AMF의 유일한 약점을 즉각적으로 파악하는 그 직관력이 더욱 무서웠다.

게다가 판단을 마친 녀석은 마나번을 각오하며 즉시 염동 마법으로 디스펠에 임했다.

인간인 이상 위험 부담이 크다면 잠시라도 망설이게 마련인데 녀석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이건 마치…….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 정도면 내 할 일은 다한 것 같군.”

루인이 새하얀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루인의 염동력이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지만 3위계의 경지로 무려 7위계의 주문을 디스펠한 상태.

소비한 마력이 상당했기에 당분간은 어떤 마법도 펼칠 수 없었다.

스윽―

지금까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던 생도 세베론이 일어났다.

“시론, 잠시 내가 살펴봐도 될까요?”

세베론이 아다만티움 박스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늘 시론의 곁에서 보조만 하던 그가 갑자기 생도들 앞에 나서는 것은 오늘이 처음.

교수들이 주목하고 있는 천재 생도였기에 그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뭘 그런 걸 묻나. 우리 모두의 과제다.”

이내 세베론의 수인에 의해 맺힌 마법은 일종의 발광 마법이었다.

광원에 의해 아다만티움 박스에 새겨진 미세한 회로들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세베론이 한참 동안 골몰하며 술식을 살핀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확실히…… 고전적인 방식의 회로 배열식이야. 그래서 변이 수열을 파악하는 건 역시 의미가 없을 것 같고…….”

문득 루인을 바라보는 세베론.

“하지만 네 주장은 너무 위험해. 등속 이심률을 크게 높여서 일시적으로 저항을 상쇄할 수 있다는 건 그냥 가정 같거든.”

“가정?”

시론의 질문에 세베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닿으면 특이점의 돌파값을 얻을 순 있겠죠. 하지만 역시 특이점이라는 건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잖아요. 만약에 만곡화된 힘이 불안정해지면?”

곰곰이 생각하던 시론의 얼굴이 이내 핼쑥해졌다.

“진행되던 힘이 일시에 행렬을 벗어난다.”

콰콰콰쾅!

모든 생도들이 거대한 폭발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생도들의 시선이 루인에게 모였을 때, 다시 세베론의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묻는데…… 네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험 결과나 연구 사례가 있어?”

고개를 가로젓는 루인.

“그런 건 없다.”

“그럼 왜 그런 위험한 주장을 하는 거야?”

루인의 두 눈이 아득한 빛을 머금었다.

“내 이미지의 결과니까.”

동시에 표정을 구기는 시론과 세베론.

설마 녀석의 주장이, 본인의 심상 수련 속에서 떠올린 여러 가정 중 하나란 말인가?

한 마법사의 세계, 심상(心想)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그런 심상 실험을 함부로 실체처럼 말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

심상으로 얻은 이미지는 말 그대로 작은 영감일 뿐이었다.

그런 영감들이 끈질긴 연구와 실험으로 검증되고, 실증 결과로 증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마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무지막지한 염동력만큼이나 위험한 놈이로군. 심상 실험을 마치 검증된 이론처럼 떠벌이다니.”

하지만 이건 루인이 생도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어떤 백마법의 이론서나 학술서에도 존재하지 않는, 대마도사 루인의 경험에 의한 결과값.

또한 동시에 마신 쟈이로벨과 함께 쌓아 올린 마탑(魔塔)이기도 했다.

-크흘흘. 역시 귀여운 핏덩이들의 보잘것없는 연산 체계구나. 등속하는 힘이 크게 이심하여 돌파값을 뚫는다 하더라도 결코 상보성(相補性)을 위배할 수 없다. 인간들은 이 작은 이치를 정말 모르는 것이냐?

루인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엄청난 양의 마법서를 살펴봤지만 아직까지는 마력의 상보성을 발견한 마탑은 없었다.

이 상보성의 성질을 이해하기 위해선 보다 강력한 위력의 마나, 즉 진마력을 연구해야만 가능했다.

인간 마법사가 진마력을 접해 볼 기회란 오직 마왕의 강림 때밖에 없었다.

“너……!”

“이 자식! 지금 우릴 무시하는 거냐!”

우습게도 생도들은 루인의 미소를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리아만은 달랐다.

“네 말을 증명할 수 있는가?”

고개를 흔드는 루인.

“보다시피. 이제 마력이 남아 있지 않아서.”

루인의 그 말에 시론이 이를 깨물며 주머니를 뒤졌다.

곧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작은 유리병.

유리병 속, 투명하게 발광하며 출렁거리는 액체의 정체란 명확했다.

“설마 저건…….”

“마, 마력 포션이다!”

마력 포션.

리랑 단위로는 도저히 계산이 불가능한 초고가의 아티펙트.

마시는 것만으로도 마법사의 마력을 채워 주는 고위 연금술의 기적.

생도의 신분으로는 절대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과연 현자의 손자.

“호오.”

금방 루인의 두 눈이 이채로 물들었다.

과거의 현자들도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만 활용하던 마력 포션.

적어도 마법사에게 있어서만큼은 여벌의 목숨이나 마찬가지인 보물이었다.

값도 값이었지만 특유의 희소성 때문에 돈이 있다고 해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물론 진마력을 활용하던 자신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고작 과제 하나 때문에 이 비싼 마력 포션을 허비하겠다고?”

“고작?”

루인과 시론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생도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신들 역시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으로 여기까지 왔다.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은 모두의 꿈.

세베론이 정색한 얼굴로 루인을 응시했다.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

“네가 뛰어나다고 해서 다른 이의 삶이 진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루인이 열정으로 들끓는 생도들의 눈빛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제법 흥이 일었다.

저 젊은 열기들이.

루인은 시론이 내민 마력 포션을 그대로 들이켰다.

휘둥그레 떠진 시론의 두 눈.

“한 번에 마시면 마력이 폭주할 수 있다!”

그러나 루인은 가늘게 파동하며 차오르는 마력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절반가량인가.”

“저, 절반……?”

최소 5위계에 이른 마법사의 마력을 단숨에 회복시킬 수 있는 중급 마력 포션이었다.

그런데 절반이라니?

그럼 녀석은 무슨 고위 마법사라도 된다는 뜻인가?

사르르르―

루인이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수인을 뻗었다.

지극히 유려하고 자연스러운 손짓.

순간 환상처럼 마력이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허공에 맺힌 아름다운 도식(圖式)과 빛나는 선형(線形)들.

찬란한 마력의 정수들이 아지랑이처럼 흩날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이내 하나의 술식을 완성해 냈다.

발광하며 타오르고 있는 루인의 마법을 바라보며 시론이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이건…….’

한 마법사의 마력 술식은 그의 심상을 오롯이 닮는다.

루인의 마력 술식.

수인을 맺는 모습이나 염동력으로 마력을 재배열하는 광경 등 모든 과정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대체 몇 번을 연습해야 저런 고아한 주문이 가능한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허허롭고 오묘한 기운, 그런 아득한 느낌이 마치 할아버지의 마력 술식을 보는 것 같았다.

화아아악-

완성된 루인의 마력 술식이 잦아들듯 아다만티움 박스에 스며들었다.

순간 새하얀 빛이 방출되기 시작한 아다만티움 박스.

루인의 디스펠 주문과 충돌하며 개폐 마법이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우우웅―

길게 이어지고 있는 진동.

천천히 공중에 떠오른 아다만티움 박스가 이내 힘없이 떨어진다.

그 순간 모든 생도들의 감각에 하나의 생경한 느낌이 포착되었다.

아다만티움 박스에 강력하게 덧씌워져 있던 마력.

철옹성 같았던 그 개폐 마법이 씻은 듯이 사라진 상태였다.

루인이 굳어져 버린 세베론에게로 걸어갔다.

저벅저벅.

“이름이 뭐지?”

“나?”

멍하니 루인을 올려다보고 있는 세베론.

“세, 세베론이야.”

고개를 끄덕이던 루인은 어느새 더없이 진지한 눈빛이 되어 아다만티움 박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함부로 말했던 것을 사과하지. 하지만 생도들의 삶을 무시한 적은 없다, 세베론.”

진동이 멈추며 열린 아다만티움 박스 속에는 황당하게도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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