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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57화 (57/187)

<57화>

리리아가 아다만티움 박스를 든 채로 루인의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투명한 눈빛으로 루인을 바라보자 생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겠지?”

“리리아가 왜 굳이?”

시론과 더불어 전반기 과제를 최고의 실력으로 돌파해 온 리리아.

한 학년에 쌓을 수 있는 최대 학점이 52점인데 벌써 그녀는 40점에 육박하는 엄청난 학점을 쌓아 가고 있었다.

“루인 라이언. 당신과 같은 조가 되고 싶다.”

리리아의 무심한 요구에 모든 생도들이 경악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번 기수 중에서 최고의 실력을 뽐내고 있는 마법 생도 리리아가 괴짜 생도 루인에게 한 조를 요구하다니!

그녀는 최대한의 이득과 실리를 챙기는 전형적인 마법사였다.

조에 영입이 될 때도 철저하게 실력 위주의 조원을 요구했고, 전반기 학과 과정 중 어떤 생도와도 별다른 친소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녀에겐 마법에 성공했다는 들뜬 모습도 없었다. 교수들이 늘어놓는 칭찬에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 리리아가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 조를 요구하는 모습은 꽤 희귀한 광경이었다.

“저도요! 저도 함께해도 되나요?”

반면, 슈리에의 저런 반응에는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슈리에는 철저하게 리리아의 성취에 기생하며 학점을 쌓아 가고 있었다.

“나 역시 그 조에 들어가고 싶군.”

놀랍게도 합류 의사를 통보해 온 생도는 시론.

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찬성이다.”

“시론 님이라면 저 역시 환영이에요!”

학부장이 초장부터 이런 빌어먹을 난이도의 과제를 낸 것을 보면, 틀림없이 현자 에기오스의 손자인 자신을 괴롭히려는 의도.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시론은 리리아와의 협력이 필수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시론까지?”

“그런……!”

앞선 모든 상황보다 더욱 놀라고 있는 생도들.

리리아의 라이벌, 알게 모르게 서로를 견제하고 있던 이번 기수의 수석 후보들이 같은 조에?

이렇게 되면 생도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도! 그 조가 되겠어!”

“난 원래 시론과 같은 조였다구!”

“아니 어차피 제한도 없잖아? 이럴 바엔 그냥 다 함께 같은 조가 되면 되지 않을까?”

“맞다! 어차피 이 과제는 고작 우리들 몇 명이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이건 4등위 생도들의 졸업 과제라고!”

헤데이안 학부장은 그렇게 부산스러워진 교실 내부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곧 그가 참관석에 앉으며 가져온 책을 펼쳤다. 전위 파장에 관한 최신 이론서였다.

“이번 과제를 일주일 내에 푼다면 모든 생도에게 최고 점수를 부여하겠네.”

하지만 생도들은 절대로 희망에 부풀지 않았다.

그 말을 반대로 들으면 일주일 내에 이번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0점이라는 말과 같았기 때문.

필수 과목의 전반기 학점을 날려 버리면 다음 학기에 메울 점수는 두 배가 된다.

몸서리치던 생도들이 서둘러 책상들을 모두 물렸다.

이어 생도들이 가운데에 아다만티움 박스를 가져다 놓은 후 빙 둘러앉았다.

짧은 단발이 인상적인 생도 프레나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투시계 마법으로 박스 내부에 있는 물건의 형질부터 파악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 함부로 충격을 줬다가 파손되면 끝장이잖아.”

“그렇지. 액체인지 고체인지 확인만 해도…….”

“그것보단 공간전이 마법이 답일 듯한데? 하지만 이래선 계산조차 할 수 없겠군.”

생도들의 의견에 고개를 가로젓는 시론.

“안 그래도 마력 저항이 상당한 아다만티움인데 거기에 항마력 술식까지 새겨져 있다. 투시 마법은 물론 공간전이 마법도 불가능하다.”

이어지는 슈리에의 의견.

“커터 계열 절단 마법은 어때요? 윗부분만 미세하게 자르는 것이 가능하다면 손상 없이 물건을 빼낼 수 있지 않을까요?”

눈살을 찌푸리는 리리아.

“아다만티움을 자르려면 최소한 7위계 이상의 고위 절단 마법이 필요하다. 투시 마법보다 더욱 바보 같은 소리다.”

“우린 혼자가 아니잖아요? 연습만 충분하다면 협력 술식으로 고위계 마법 하나쯤은 구현할 수 있을 텐데.”

미친년인가?

시론이 벌레 보듯이 슈리에를 쳐다보고 있었다.

수십 명의 생도들은 마력의 성향, 염동력의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미세한 회로 하나만 잘못돼도 술식이 파괴되는 마당.

그러므로 오랜 세월 합을 맞춰 온 동료 마법사들조차도 꺼리는 것이 협력 술식이었다.

한데 이 많은 생도들이 한 몸처럼 합을 맞추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물론 슈리에의 주장대로 오랜 세월 연습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남은 시간은 고작 일주일.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을 떠들고 있으니 그녀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론이 이를 깨물었다.

“일단 아다만티움 박스에 새겨져 있는 저 마법진부터 힘을 모아 디스펠해야 한다. 그래야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시론의 측근, 제드가 침을 꿀꺽 삼켰다.

“가능할까? 최소한 교수님들, 최악의 경우 저 무시무시한 학부장님께서 직접 새겨 넣은 마법진 같은데.”

“그럼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 같이 0점을 받든가.”

필수 과목에서 최악의 점수를 받는다면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을 모조리 헌납해야 한다.

그 무시무시한 상상에 제드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까짓거 해 보자! 졸업생 선배들도 이 빌어먹을 과제를 통과했다는 뜻이잖아? 우리라고 못하란 법은 없지!”

리리아가 시론을 쳐다봤다.

“내가 마력 투영을 맡지. 술식을 복사해서 바닥에 새기는 건 네가 해라.”

“좋다.”

우우우웅―

단숨에 허공에 수인을 그리며 마법을 재배열하던 리리아.

하지만 그녀는 아다만티움 박스에 자신의 마력을 투영하기도 전에 거칠게 튕겨져 나갔다.

비틀.

시론의 의문이 리리아에게 이어졌다.

“무슨 일이지?”

리리아가 입술을 깨물며 일어났다.

“마력이 간섭을 받았다. 집중하는 순간 모두 흩어졌다.”

“뭐라고……?”

단순히 마법을 방어하는 차원을 넘어 시전자의 마력 자체를 흩어 놓는 마법진이라고?

시론이 헤데이안 학부장을 힐끗 바라본다.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맺혀 있는 것은 분명한 미소였다.

으스러지게 주먹을 말아 쥐는 시론.

애초에 이건 무등위 생도의 수준으로 해결 가능한 과제가 아니었다.

리리아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어 그녀가 루인을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너의 의견은 없는가?”

리리아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루인에게 모인다.

루인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은 저 뱀 같은 학부장이 자신을 낚기 위해 마련한 무대.

난공불락의 과제를 던지면 틀림없이 자신의 오드를 끌어낼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똥인 걸 알면서도 받아먹을 수밖에 없는 개같은 상황.

그 더러운 기분에 루인이 기괴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놀아 주지.”

“뭐?”

리리아가 멍하게 굳어졌을 때 루인이 일어났다.

망설임 없이 일어난 그는 수인도 언령도 없이 그저 아다만티움 박스를 노려만 보고 있었다.

츠츠츠츠츠―

갑자기 미친 듯이 펄럭이고 있는 루인의 생도복.

마력이 모이는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즉각적으로 깨달은 리리아가 찢어질 듯이 두 눈을 부릅떴다.

“염동(念動)……?”

분명 루인은 어떤 술식도 없이 단순한 염동력만으로 마법을 구현하고 있었다.

현재의 자신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그야말로 상상 밖의 경지.

그제야 리리아는 루인의 의도를 명확하게 이해했다.

염동력이라면 언령과 술식 위주로 구현한 마력에 비해 훨씬 단단하고 순수한 마력을 모을 수 있었다.

염동력에는 시전자의 의지와 영혼력이 깃들어 있기 때문.

당연히 방어 마법진에 보다 쉽게 대항할 수 있었다.

지지지지직―

금방 아다만티움 박스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났다.

마력 충돌 현상이 명백했지만 루인의 염동 마법은 끝까지 마법진을 끈질기게 파고들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마침내 방어 마법진을 일시적으로 상쇄한 루인이 때를 놓치지 않고 허공에 수인을 맺었다.

복잡하게 생겨난 도식들이 곧바로 아다만티움 박스에 짓쳐 들었다.

지지직―

지지지직―

한참 동안 불꽃이 일던 아다만티움 박스에서 결국 미세한 마력회로들이 검붉은 빛을 띠며 나타났다.

이내 방어 마법진 속의 또 하나의 술식이 수인과 영창을 반복하던 루인에 의해 모조리 복사되어 교실 바닥에 새겨졌다.

파파파파팍!

수인을 걷어 내고 염동력을 진정시키고 있는 루인.

지금의 경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에 그의 얼굴은 탈력감으로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자욱한 연기가 모두 사라지자 생도들의 멍한 표정이 드러났다.

시론의 측근 제드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설마 더블 캐스팅을 한 거야?”

“그것도 처음 마법은 순수한 염동 마법이었어!”

붉게 상기된 얼굴은 리리아도 마찬가지.

과연 루인처럼 엄청난 신념을 지닌 자의 마법이 평범할 리가 없었다. 자신의 예상이 보기 좋게 적중한 것이다.

하지만 이건 좀 궤가 다른 수준이었다.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조차도 염동 마법을 함부로 시전하지 않았다.

강력한 영혼력과 극한의 정신력을 지닌 이가 아니라면 반드시 마법사의 마력 붕괴 현상, 즉 마나번(Mana burn)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

마법사에게 마나번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지를 잘 알고 있는 리리아로서는 루인의 모든 모습이 전율로 다가왔다.

마법사가 의심 없이 염동 마법을 구사한다는 것.

그만큼 자신의 염동력에 무한한 자신감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미, 미친! 정말 엄청난 놈이었잖아?”

“대단해! 더블 캐스팅이라니!”

“너도 저 녀석의 염동력을 느꼈어? 마치 온몸이 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고!”

시론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로 루인이 바닥에 새긴 술식을 응시했다.

시론은 방어 마법진을 걷어 내던 루인의 염동 마법이나 그 후에 펼친 복제 마법(Clone Spell)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술식이지?”

육안으로는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미세한 회로들.

모든 생도들이 사력을 다해 살핀다고 해도 단기간에 정수를 이해할 수 있는 술식은 결코 아니었다.

리리아도 기이한 눈초리로 바닥의 술식을 응시하고 있었다.

“알람 마법인가?”

고개를 가로젓는 루인.

“관성 마력에 별개의 갈래가 존재하지 않아. 알람 마법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반응 근일점’이 없다.”

“상수(常數)군.”

시론의 반응에 루인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 빌어먹을 노인네는 아직도 자신과의 승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 술식에 자신의 의지와 철학을 새겨 넣은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술식을 바라보던 루인이 곧 입매를 비틀었다.

“아무래도 고위 개폐 마법 같군.”

“개폐 마법……?”

의혹으로 가득한 시론의 시선이 루인에게 향했다.

이 짧은 시간에 이런 엄청난 술식을 파악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단 말인가?

자신조차도 몇 개의 수렴 지점만 개략적으로 이해할 뿐.

술식을 관통하고 있는 마력의 성질, 즉 전체의 결은 아직 근원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오! 그럴싸하군요! 아다만티움 박스를 통째로 녹여서 만든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열어야 물건을 넣을 수 있었겠죠!”

감탄을 늘어놓는 슈리에와는 달리 리리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절대 마력 상수로 개폐 마법이라니 무슨 의도지? 처음 열 때를 제외한다면 다시는 열지 않겠다는 뜻인가?”

피식.

학부장의 노골적인 의도.

이것으로 애초에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무대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또다시 자신의 신념이 부정된다면 이제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건 낡고 낡은 고대의 마나 역학이다.”

“고대?”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마치 늙은이의 고집 같은 술식이지.”

책을 읽는 척하고 있었지만 학부장의 손은 분명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루인의 웃음이 더욱 진해진다.

“수열을 통과하는 마력의 등속 이심률을 크게 높인다. 만곡화된 힘이 특이점을 돌파하면 단기적으로는 저항이 사라진다.”

“마나 수열 현상을 무너뜨릴 수가 있단 말인가?”

“동일 행렬, 동일 상수라도 절대적인 결과값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절대적인 마력 상수 따윈 이미 폐기된 이론이다. 그런 게 마법이라면―”

부우우우웅―

또다시 일어난 염동 마법.

푸른빛으로 일렁거리는 마력의 변주 사이로 루인의 새하얀 치아가 고르게 빛났다.

“재미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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