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56화 (56/187)

<56화>

게리엘도스 교수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지만 학부장의 놀란 표정은 그대로였다.

‘…….’

틀림없었다.

더없이 강렬한 마나의 결정들.

그것은 분명 서클화된 마력만이 지닐 수 있는 고유의 마나 파장.

게다가 선명하게 유형화된 세 개의 고리까지 직접 보았다.

녀석의 일루전을 디스펠했을 때 자신이 본 것은 틀림없는 ‘마나 서클’.

하지만 마나 서클이 시전자의 심장이 아닌 몸 바깥에 맺힐 수가 있다니?

마법의 역사를 모조리 뒤진다 해도 그런 예를 찾기란 불가능할 터였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 중에서 생명체의 심장을 뛰어넘는 마나 매질은 존재하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마법사에게 있어서 그것은 마치 자연 현상처럼 당연한 섭리였다.

이처럼 학부장이 아무런 말도 없이 멍하게 굳어만 있자 게리엘도스의 의문은 루인에게 이어졌다.

“무슨 일인가 루인 생도? 혹시 학부장님께 무슨 무례라도……?”

“글쎄요. 전위 파장에 관한 제 의견을 피력했을 뿐, 무례라고 부를 만한 일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만.”

게리엘도스는 더욱 묘한 표정을 했다.

아직도 학부장님과 루인 생도 주위에는 잔존 마나가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들의 주위로 새하얀 서리들이 퍼져 나간 모양으로 보아 틀림없이 결빙계 마법을 시전한 흔적.

아무리 봐도 무슨 사고를 친 것이 확실한데…….

게리엘도스 교수가 더욱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루인을 바라본다.

“……전위 파장?”

“네.”

그런 간단한 이론 하나 때문에 학부장님이 저렇게 동요한다?

한데 그때.

학부장이 더욱 경악한 얼굴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 이건!”

마나 스캔을 통해 끈질기게 루인의 마나 서클을 추적하던 학부장이 마침내 희미한 영계의 자취를 찾아낸 것.

“자, 자네! 설마 영계를 다룰 수 있는가?”

게리엘도스 교수는 학부장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계를 극한으로 다룰 수 있는 현자(賢者)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계(靈界).

마법사가 그런 영계를 다룬다는 건 대마법사 너머의 경지, 즉 초인의 반열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루인이 뛰어난 재능을 지닌 마법 생도라고 해도 영계를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영계라니…… 그게 뭐죠?”

투명한 루인의 눈망울.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두 눈을 껌뻑이고 있는 녀석의 연기에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감히 이 대마법사의 눈을 속이려 들다니!

크게 화를 내는 학부장.

“감히 이 헤데이안을 바보 취급하는 것인가! 자네가 소환했던 마나 서클은 분명히 저기! 저 영계에 스며들었다!”

그 즉시 게리엘도스 교수는 헤데이안 학부장이 손짓하고 있는 방향을 시선으로 좇았다.

하지만 그가 가리키고 있는 허공엔 아무것도 없었다.

“저…… 학부장님?”

이어 들려오는 루인의 퉁명한 목소리.

“눈이 많이 침침하신 모양입니다. 하긴 저도 가끔 헛것이 보이기도 하죠. 나이도 있으신데 심상 수련에 너무 매진하진 마십시오.”

“이, 이익!”

피식 웃으며 게리엘도스 교수를 응시하는 루인.

“아니 마나 서클을 허공에 ‘소환’하다니? 교수님은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게리엘도스 교수가 눈살을 찌푸린다.

“그게 무슨 실없는 소리인가?”

루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거 보라는 듯 다시 헤데이안 학부장을 쳐다본다.

결국 헤데이안은 지그시 이를 깨물며 침묵하고 말았다.

괴상한 마법의 경지만큼이나 뻔뻔함도 보통이 아닌 녀석이었다.

이내 학부장의 차가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무등위 생도가 유급의 위기에 처해 있다기에 호기심이 생겨 찾아와 봤네.”

“아!”

마법학부에 입학하는 것은 왕국의 모든 어린 마법사들이 바라는 꿈이었다.

무사히 졸업할 수만 있다면 최소한 왕궁마법사로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왕궁마법사로서 성과나 업적이 특별할 경우 마탑의 입성까지 노려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마법사로서의 가장 이상적인 성공 루트인 셈.

때문에 무등위 생도가 유급을 당한다는 건 매우 희귀한 일이었다

적어도 수업만 착실하게 들었다면 유급을 당할 리는 없었으니까.

‘그룹’을 선택해야만 하는 2학기에 이르기도 전에 유급을 당하는 생도가 있다라.

아마 그건 마법 학부 역사상 처음 있는 일.

충분히 학부장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상황인 것이다.

“한데 오로지 책만 읽더군. 견장까지 위조하면서 말이야.”

“하, 학부장님 그건……!”

당황한 게리엘도스 교수가 뭐라 입을 열 찰나, 다시 헤데이안 학부장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찰만 확인해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교칙 부정을 도서관의 사서도 담당 교수도 침묵하더군. 그래서 궁금했지. 이 무등위 생도가 대체 누구길래 이런 특혜를 받고 있단 말인가. 보아하니 귀족가의 자제도 아닌데 말이지.”

학부장의 입에서 ‘담당 교수’라는 단어가 흘러나오자 금방 게리엘도스 교수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어쩔 수 없이 게리엘도스는 마탑의 은밀한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모두 고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 헤데이안 학부장이 마탑과 그리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뭐? 에기오스가?”

게리엘도스 교수의 귀엣말을 듣던 헤데이안 학부장이 더욱 호기심을 드러냈다.

현자 에기오스가 관심을 다해 지켜보고 있는 무등위 생도라…….

‘과연, 그래서 범상치 않은 놈이었구나.’

차가운 눈빛으로 고심하던 헤데이안 학부장이 게리엘도스 교수를 다시 불러 세웠다.

“게리엘도스 교수.”

“예. 학부장님.”

헤데이안 학부장이 루인을 노려보고 있는 채로 한 자 한 자 힘주어 또렷하게 말했다.

“다시 생도들을 가르칠 것이네.”

“예……?”

게리엘도스 교수가 믿기 힘들다는 듯, 두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헤데이안 학부장이 교편을 내려놓은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마탑의 현자님만큼이나 상징적인 존재.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마법사이자 현자 에기오스 님과는 다른 학파를 추구하는 라이벌.

그런 엄청난 대마법사가 새파란 생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다시 교편을 잡겠다니.

“특히, 저 녀석이 꼭 들어야만 하는 과목의 담당 교수가 누구인가?”

무등위 생도가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은 네 개.

초급 마력 이론, 초급 술식 이론, 초급 염동학 개론, 마지막으로 초급 마도학 사론이었다.

“초급 마력 이론과 술식 이론은 제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초급 염동학 개론은 제이드 교수가, 초급 마도학 사론은 오델로 교수가 맡고 있습니다.”

“음…… 알겠네.”

불안했는지 게리엘도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학부장님. 어쩌실 요량이신지…….”

“모두 유급 휴가 처리를 해 주겠네. 교수들이 오랜 연구에 지쳐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네만.”

설마 그 모든 수업을 본인이 직접 맡겠다는 말인가?

“저, 저는 제외시켜 주십시오!”

“음 왜지? 다시 말하네만 유급 휴가네.”

“괜찮습니다!”

루인을 향한 게리엘도스의 진득한 눈빛.

결국 헤데이안 학부장은 게리엘도스 교수도 자신처럼 저 기이하고 오묘한 녀석에게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지. 차 한 잔 마시겠는가?”

“영광입니다!”

그렇게 헤데이안 학부장과 게리엘도스 교수가 멀어져 가자 아드레나가 루인을 다그쳤다.

“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 서리들은 무엇이고 학부장님은 또 왜 저러시는 건가요?”

하지만 루인은 아드레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다시 책상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할 뿐이었다.

이에 다소 화난 얼굴의 아드레나가 루인의 견장을 뜯었다.

찌익―

루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100리랑이라고 하지 않았나?”

“에, 그건 없던 일로 해야겠어요. 무려 학부장님께서 아신 마당에 교칙 위반을 방조할 수는 없죠.”

“마법사의 등가교환을 운운하더니.”

“뭐, 아직 받은 것도 없잖아요?”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던 아드레나가 다시 루인을 설득한다.

“유급을 당하면 이 지혜의 라이브러리에 더는 올 수 없죠. 당신은 정말 그런 상황을 만들 거예요?”

루인은 짜증이 났다.

그 바보 같은 수업들을 듣는 것보다는 지혜의 라이브러리에서 학술서와 이론서를 접하는 편이 훨씬 진전이 빨랐다.

자신을 힐끔거리는 생도들의 시선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학부장과 담당 교수가 방해하고 나서니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거기에 3등위 생도의 견장이 없다면 예전 같은 루틴도 더는 어려웠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빌어먹을 오드다.’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도저히 마나 서클을 숨길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지혜의 라이브러리 덕분에 빠르게 3서클의 경지를 이루긴 했다.

그러나 3서클의 환혹 계열 마법으로는 아무리 눈속임을 해 본들, 마력의 결을 살필 수 있는 고위 마법사들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현자나 학부장이 그랬던 것처럼 모두 자신을 괴물처럼 여길 터.

이런 리스크는 적어도 6위계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계속 자신을 괴롭힐 것이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텁―

루인이 책을 덮고 일어나자 아드레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시 수업에 참여하시는 거겠죠?”

“그러는 수밖에.”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다시 지혜의 라이브러리을 방문하지 못하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루인이 자리를 정리하고 지혜의 라이브러리를 빠져나갔다.

*  *   *

마법 생도들은 비상이었다.

물론 왕국의 이름 높은 대마법사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은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하나 문제는 그가 마법학부의 모든 전권을 지닌 학부장이라는 것에 있었다.

“매우 괴팍하신 분이라던데…….”

“그 옛날…… 최고 벌점을 밥 먹듯이 부여하셨다지…….”

“과제의 난이도도 엄청나다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암담한 미래에 하나같이 우울해하고 있는 생도들.

시론 역시 가라앉은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최악이군…….’

마법 학부장 헤데이안.

그가 자신의 할아버지와 물과 기름 같은 사이라는 것을 시론은 잘 알고 있었다.

보통은 같은 왕국 출신이면 팔이 안으로 굽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현자 에기오스와 학부장 헤데이안은 마법학회에서 틈만 나면 서로를 힐난하며 대립했을 정도.

자신은 그런 현자 에기오스의 손자이니 분명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때.

“어? 저놈은?”

“루인 라이언?”

웅성웅성―

루인의 등장에 금방 소란스러워지는 교실.

그도 그럴 것이 루인은 첫 수업 이후 한 번도 수업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마법 생도들 대부분은 그가 오직 체력 단련과 지혜의 라이브러리에서의 독서만 반복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괴짜 무등위 생도 루인 라이언.

그의 유급이 당연시되던 차에 다시 수업에 나타난 것이었다.

“놓친 수업이 얼만데 지금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과제를 하려고 해도 조조차 없잖아?”

“지금 구하려고 해도 문제지. 전반기 수업을 죄다 놓친 생도와 누가 같이 하려고 들겠어?”

“그래도 도서관에서 책만 읽었는데 뭔가 대단한 면이 있지 않을까?”

“멍청한 놈. 책으로만 마법사가 될 수 있다면 대체 아카데미는 왜 존재하는 거냐.”

그렇게 생도들이 저마다의 감상을 늘어놓으며 떠들고 있을 때.

드르르륵―

교실의 문이 열렸다.

기다랗게 늘어진 새하얀 백발.

보는 이로 하여금 등줄기가 서늘해지게 만드는 차가운 눈빛.

편력과 고집, 고고한 자아가 동시에 느껴지는 미묘한 표정.

그렇게 교실에 입장한 학부장이 생도들을 훑으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초급 염동학 개론을 맡은 마법사 헤데이안이네.”

이름만 말했을 뿐,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부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말에 담긴 위력은 대단했다.

헤데이안.

현자 에기오스와 더불어 왕국에 둘뿐인 대마법사.

곧 그가 커다란 마법 박스를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모든 생도의 시선이 모였을 때, 마법 박스가 천천히 열렸다.

웅성웅성―

검은 천 위, 차갑게 발광하고 있는 작은 금속 상자 여덟 개가 있었다.

특유의 매끈하고 청아한, 마치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그 깊은 빛깔에 눈썰미 좋은 생도 하나가 다급히 외쳤다.

“아, 아다만티움!”

극도로 희귀한 금속, 아다만티움.

엄청난 강도(剛度)로도 유명하지만, 마력을 흩어 내는 항마력 때문에 마법을 막아 내는 무구의 재질로써 엄청난 가치를 지닌 금속이었다.

“이 작은 아다만티움 상자 속에는 어떤 물건이 있네. 이 상자 안의 물건을 바깥으로 꺼내는 것. 이것이 그대들의 첫 번째 과제일세.”

시론이 멍하니 굳어졌다.

이 과제는 4등위 생도들의 졸업 과제 중 하나로 유명했다.

그런데 이걸 무등위 생도들에게?

그때, 리리아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뭔가?”

“조를 이뤄야 하나요?”

“자유네. 그 말인즉, 혼자 하든 이 교실의 생도 모두가 같은 조가 되든 상관없다는 얘기지.”

리리아가 망설임 없이 걸어가 교탁 위의 아다만티움 박스를 꺼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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