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55화 (55/187)

<55화>

루인이 지혜의 라이브러리에서 책만 읽은 지도 벌써 3개월째.

이대로 가다간 한 학기를 통째로 놓치게 되니 틀림없는 유급.

졸업을 앞둔 생도라면 몰라도, 무등위 생도가 유급을 당하는 것은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일 것이었다.

결국 게리엘도스 교수는 참지 못하고 아드레나를 호출했다.

“아드레나 생도. 녀석을 말릴 방법이 도저히 없겠는가?”

“에, 그건…….”

글쎄, 그게 과연 가능할까.

이제 루인은 같은 피와 살을 지닌 인간임이 의심될 지경이었다.

마법사가 책을 좋아할 순 있다. 아니 그것은 마법사로서 참된 자질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마법사가 루인처럼 할 수 있을까?

새벽 4시 기상.

이어지는 2시간의 체력 단련.

간단한 아침 식사 후 오후 12시까지 도서관.

점심 식사, 역시 이어지는 2시간 체력 단련.

저녁 8시까지 도서관, 저녁 식사.

새벽 1시까지 도서관, 그리고 취침.

무슨 정교한 시계처럼, 이 무식한 루틴을 3개월째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반복하고 있다.

그야말로 자고, 먹고, 뛰는 시간 외에는 모조리 책을 읽는 데 쓰는 것이다.

취침 시간도 고작 3시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세월이 없다면, 도저히 믿지 못할 한 인간의 행동이었다.

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는 법.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불가능한 것 같아요.”

게리엘도스 교수는 책을 읽는 루인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눈빛을 막상 설명하라고 하면 아드레나는 자신이 없었다.

열망? 탐욕? 염원? 갈구?

온갖 감정으로 얼룩져 마치 해부할 듯이 책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

말도 붙일 수 없을 만큼의 강렬한 녀석의 두 눈은 가히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드레나는 책을 읽는 루인을 한 번도 방해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드레나의 보고를 수도 없이 들었지만 황당한 것은 게리엘도스 교수도 마찬가지.

마법을 향한 학구열이라면 그 역시 자부하는 편이었지만 녀석처럼 하라고 한다면…….

암, 사람이 할 짓이 못 되지.

“녀석도 유급은 원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에…… 하지만 누가 봐도 미친놈이잖아요? 분명 녀석은 지혜의 라이브러리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읽기 전엔 나오지 않으려 할 거예요.”

“모, 모든 책?”

지혜의 라이브러리는 천년 르마델 왕국이 축적해 온 마법의 총아.

한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소화해 낼 수 없는 방대한 지식이다.

“에, 벌써 녀석은 4구역까지의 이론서들을 모두 독파했는걸요?”

“4구역?”

아무리 3개월이라지만 그게 가능한가?

빠르게 쏟아지는 최신 학술을 살피는 것만 해도 시간을 쪼개고 쪼개야 가능할 판국이다.

그렇게 각국의 마탑에서 보고되는 최신 학술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 정립된 이론들과 고대의 연구 업적들은 평생을 두고 살펴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마탑의 최상층부, 초고위 마법사들조차 책을 멀리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이유.

이쯤 되면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게리엘도스는 수업을 미루고서라도 루인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녀석을 직접 봐야겠다.”

*  *     *

“허튼소리, 전위(專爲) 파장에 아무리 변곡 저항값을 높여도 마나 수축으로 수렴되지는 않네. 그게 가능했다면 냉기 계열의 마법 자체가 존재할 수 없겠지.”

꼬장꼬장한 노인의 말에 루인이 피식 웃었다.

“파형 이동의 불연속성을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최신 파동역학에 따르면, 파형 내의 힘은 어떤 순간에도 행렬이 일정하거나 연속성을 띠지 않습니다. 미세한 자극에도 쉽게 이탈하죠.”

“흥! 역시 자네는 절대 상수를 부정하는 엘고라 학파를 따르는군!”

루인은 어이가 없었다.

이 노인은 줏대란 것이 없단 말인가?

어제는 바뭉드 학파라고 손가락질을 하더니 이제는 또 엘고라 학파라니.

처음에는 자신이 보고 있던 책을 힐끔거리던 노인이 놀라운 말들을 늘어놓길래 잠시 흥미가 일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이 마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이상 방해하지 마시고 그만 볼일 보시죠.”

피싯.

노인은 묘한 눈빛으로 비웃었다.

“제대로 여물지 않은 관점으로는 어떤 책을 본다 한들 자네의 지혜는 제자리일 걸세.”

루인은 노인을 존중하는 편이다.

늙었다는 건 살아남았다는 뜻.

하지만 자신만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노인의 고루한 아집(我執)까지 존중할 생각은 없었다.

피식.

“그게 언제 적 이론인데 아직도 거기서 허우적거리고 계십니까. 제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돌아가셔서 직접 마력회로를 그려 보든지 하시죠.”

마치 제 옷처럼 어울리는 루인의 비웃음에 노인은 더욱 화가 난 듯했다.

“어허! 전위 파장도 법칙을 위배할 수는 없다! 어떤 변주에도 굳건하기에 절대 상수라 불리는 것이다!”

금방 루인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수천 년 동안 진화해 온 인간의 백마법을 직접 살펴본 루인.

그런 장구한 세월에 ‘절대’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순간 모든 의미를 잃게 된다.

어떤 정립된 이론도 반박될 수 있으며 또한 폐기될 수도 있는 법.

한데 놀랍게도 노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며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부우우웅―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수축한다.

나직한 소음과 함께 일어난 소스라치는 냉기.

순간, 그의 발 주위가 쩍쩍 갈라지며 비명을 토했다.

6위계 결빙계 베리어 마법, 프로즌 아우라(Frozen aura).

노인의 주위로 청명한 하늘빛처럼 아른거리고 있는 수호 장막에 루인은 내심 놀라웠다.

수인(手印)이 맺히자 그 즉시 프로즌 아우라가 구현됐다.

그 말인즉 무영창, 즉 언령조차 생략된 마법이라는 뜻.

시전의 과정 대부분을 염동력으로 처리해 버린 것이다.

6위계 마법을 손짓 한 번으로 구현해 낼 수 있다면 적어도 7위계, 아니 8위계에 이른 대마법사란 말인가?

그러나 루인의 놀라움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노인의 수인이 변화한다.

스르르르르-

그의 전면에 희뿌연 빛살이 일어나더니 이내 투명한 프로즌 아우라에 덧씌워졌다.

그 즉시 드러나는 온갖 미세한 형태의 마력회로들.

5위계 감응 마법, 스캐닝(Scanning)이었다.

‘동시 구현이라고?’

손쉽게 더블 캐스팅을 구사하는 노인의 실력에 루인은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눈앞의 노인은 최소 8위계에 이른 대마법사였다.

“다시 부정해 보라.”

그렇게 노인은 친히 마법을 내보이며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반칙이 아닌가?

도서관에서의 심각한 교칙 위반이었다.

함부로 마법을 시전한다면 곧바로 최고 벌점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황당해하던 루인이 저 멀리 앉아 있는 사서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원래라면 다급하게 달려와 경고를 했을 텐데?

한데 사서는 그저 얼음처럼 굳어진 채 멍하니 노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법학부의 교칙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으로 보아, 틀림없이 이 똥고집의 노인은 마법학부의 고위직이거나 마탑의 일원일 터.

“어디 그 엘고라 학파의 잘난 지혜로 내 마법을 부정해 보란 말이다!”

“도서관에서 마법을 시전하면 최고 벌점이 부여됩니다. 지금 저더러 퇴학을 각오하라는 겁니까?”

“사서!”

노인의 외침에 황급히 뛰어오는 사서.

“부, 부르셨습니까?”

“지금부터 도서관 내에서의 교칙을 불용(不用)한다. 이는 한시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며 사서는 이런 내 뜻을 교율청에 통보하라.”

“아, 알겠습니다!”

루인은 핼쑥해진 얼굴로 후다닥 뛰어가는 사서를 쳐다보며 피식거렸다.

어쨌든 상대가 이 정도로 나오는데 물러선다고?

그것은 흑암의 공포, 대마도사 루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지이이잉-

루인의 수인이 허공에 수놓아진다.

그러자 미세한 마나의 파동들이 구현되며 물결치기 시작했다.

“흥!”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녀석의 전면에 떠오른 파동은 전형적인 전위 파장.

그것은 분명 하나의 성질로만 일정하기에 전위(專爲)라 불리는 마나의 힘.

한데.

츠츠츠츠츠―

순식간에 변화한다.

루인의 염동력과 수인이 어지럽게 맺히자, 마나의 파동들이 마치 춤을 추듯 불안정해진 것이다.

화려하지만 일정한 자극의 변주.

기어코 루인의 마나 파동이 순식간에 공기를 응축시키며 놀라운 냉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쩌저저적!

결정화된 공기가 사방으로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자 책상, 바닥 할 것 없이 그의 모든 주변이 급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새하얗게 뻗어 간 서리가 책장들을 덮치려고 할 때.

노인의 입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그, 그만―!”

루인이 차가운 눈으로 수인을 회수하며 마력을 털어 냈다.

“…….”

불신으로 가득한 노인의 눈빛.

두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전위 파장은 텔레포트와 같은 공간 이동 마법에 쓰인다.

고유의 왜곡되지 않은 성질 때문에, 마법에 안정성을 더할 때 필요한 마력 구현법인 것이다.

한데, 녀석은 자신의 주장대로 그런 전위 파장으로 진짜 결빙계 마법을 구현해 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녀석의 마법에서 느껴지는 마력량에 비해, 냉기의 위력이 프로즌 아우라를 능가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인즉 마력의 효율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다는 뜻.

“……이 마법의 이름이 뭔가?”

곧이어 루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직 이름을 짓지는 않았죠.”

“뭐?”

이름을 짓지 않았다?

녀석의 말이 뜻하는 바는 너무나 명확했다.

“네, 네가 그 마법을 창안했다는 뜻인가?”

“아직 어설프지만 뭐 일단은 그렇습니다.”

눈앞에서 절대적인 법칙처럼 믿어 왔던 전위 파장이 파괴될 때보다도, 노인은 지금이 더 놀라웠다.

믿을 수 없었다.

3등위 마법 생도가 마법을 창안하다니?

하나의 마법이 학회에 보고된다는 것은, 마탑의 수많은 마법사들이 수 년 동안 매달린 결과라는 뜻이었다.

완성된 마법이 아니라 단순한 이론의 정립을 위해서조차, 교수들은 연구실에서 평생 동안 골머리를 싸맨다.

“네 녀석! 이 신성한 지혜의 라이브러리에서 함부로 거짓말을…… 응?”

그때, 노인의 민감한 감각에 포착된 기이한 왜곡 마법의 파장.

분명 녀석의 어깨 부근에서 이질적인 왜곡의 기운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일루전?’

호기심이 치민 노인이 순식간에 마법을 재배열했다.

점점 일그러지는 노인의 얼굴.

단순한 일루전이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마력회로의 결을 읽을 수 없었다.

생도가 펼친 마법을 디스펠(Dispel)하지 못한 것은 처음.

루인은 자신의 마력회로에 끈질기게 간섭해 오는 노인의 마력을 억지로 흩어 내려고 했으나.

8위계의 대마법사답게 노인은 마침내 루인의 치밀한 마력회로를 파훼하고 말았다.

그 순간.

화르르르르―

노인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믿기 힘들 정도의 마력으로 응축되어 있는 하나의 마법구.

도저히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도로 이질적인 기운.

한데 그런 마법구를 휘돌고 있는 3개의 새하얀 고리에, 노인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 이게 설마……?’

마법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의 가정.

순간, 마법구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루인이 오드를 영계로 회수한 것이다.

“자, 자네 설마 그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분명 방금!”

그때, 이제 막 도서관에 도착한 게리엘도스 교수가 노인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학부장님을 뵙습니다. 한데 도서관에는 어쩐 일로?”

금방 눈살을 찌푸리는 루인.

‘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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