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대륙에 문명이 생겨난 이래, 인간들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태초신의 흔적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헤매 왔다.
태초신.
신(神)들의 아버지.
인간계를 관장하는 주신 알테이아조차도 비교될 수 없는 그 아득한 신격.
하지만 모든 차원과 생명, 물질과 마나를 창조했다는 그의 흔적은 그야말로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태초신의 축복이라면, 그의 힘을 나눠 받았다는 하계의 신들이나 드래곤 일족이라면 말이 된다.
한데, 한낱 인간이 그런 태초신의 축복을 받아 왔다니…….
맑은 영혼과 강력한 육체의 수인족.
터무니없는 수준의 친화력으로 고대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요정족.
엄청난 번식력과 전투력, 전사의 영혼을 타고나는 오크족.
손재주의 축복, 장인의 영혼을 타고나 강력한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드워프족.
그 모든 종족 중에서 가장 약했던 종족이 바로 인간이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들은 무수한 희생을 짊어졌다.
끈질기게 지혜를 전승하여 약자의 운명을 종식해 온 인간의 세월은 절망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
인간에게 주어졌던 그런 처절한 역사를 떠올려 보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도대체 인간이 무슨 축복을 받았다는 거지?”
-태초신의 축복이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태초신의 축복이 너희 인간족에게 깃든 것은 확실하다.
“도대체 뭔 헛소리냐 그게?”
축복의 실체도 말하지 못하면서 태초신의 권능이 깃든 것만큼은 확실하다니.
마계를 통치해 온 마신답지 않은 논리의 비약이었다.
-확실하다. 인간에게는 태초신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태초신의 의지에 화답하는 순간 너희 인간들은 그의 권능을 이어받게 된다.
루인이 피식 웃는다.
“그래서? 인간이 태초신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방법은?”
-모른다. 난 인간이 아니니까. 태초신은 억겁의 시간 동안 마계에는 단 한 번도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다.
“왜지? 마족도 그의 피조물이지 않나?”
쟈이로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쟈이로벨의 침잠한 영언이 들려왔다.
-……우리는 버려진 존재들이다.
루인은 그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쟈이로벨의 주장대로 태초신이 생명을 기꺼워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마구잡이로 다른 차원을 침범하여 생명력을 갈취하는 마족들은 신의 의지에 반하는 종족이었다.
더구나 마족들은 태초신의 종속을 직접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는가?
태초의 어둠 발카시어리어스.
그를 또 다른 ‘태초’라 부르며 자신들만의 악신을 따로 추앙하는 마족들을 태초신이 기꺼워할 리가 없었다.
“네놈들의 자업자득이지 뭐. 버려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가 소멸시켰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
어쨌든 루인이 쟈이로벨의 본심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어쩐지 허구한 날 흑마법의 위대함을 설파하던 마신 놈이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백마법에도 가능성이 있다며 추천하더라니.
그러나 생각이 이어질수록 루인은 점점 자괴감이 몰아쳤다.
데인에게 귀납의 지혜를 설파하던 자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마법에 매진해 온 세월만 따진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시간을 향유한 마법사가 바로 자신일 터였다.
한데 쟈이로벨조차 손쉽게 알아본 백마법의 구체성을 왜 자신은 몰라봤단 말인가.
루인의 그런 의문은 쟈이로벨이 곧장 해결해 주었다.
-네놈의 주위에는 죄다 초인들로만 득실거렸다. 네놈이 경험했던 것은 백마법의 구조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끝내 초인의 경지를 이룬 대마법사들의 절대적인 마법이다.
루인은 부정할 수 없었다.
광휘의 마법사 헤스론.
최후의 현자 유클레아.
인간 진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위대한 대마법사들.
오히려 사기 측면으로만 본다면 흑암의 공포였던 자신보다 훨씬 높은 영향력을 끼쳤던 인류의 희망이었다.
그런 자들의 권능만을 봐 왔으니 아카데미의 백마법이 이질적으로 느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물론 그런 대마법사들의 권능조차도 자신보다는 몇 단계 아래였다.
그러나 쟈이로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백마법을 향한 자신의 그런 선입견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미천한 염동력이 인간의 한계지만 극복하는 방법도 있다는 뜻이지. 일단은 그걸 찾아내는 게 네놈의 급선무다.
고개를 끄덕이던 루인이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결론이 났으니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철컥.
문을 열자마자 루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루인의 방문 앞, 벽에 기댄 채로 졸고 있던 아드레나가 황급히 침을 닦고 있었다.
“츄릅, 또 뛰러 가는 건가요?”
아드레나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루인은 순간적으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의 열정이라면 마법을 완성해서 조기에 졸업하고 입탑권을 노리는 편이 더욱 빠르지 않나?
“와아, 당신에게 그런 미소도 있군요. 보기 좋은데요?”
언제나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루인에게서 처음 보는 보기 좋은 미소였다.
“도서관이 어디에 있지?”
“에에, 도서관?”
크게 눈을 뜬 아드레나.
언제나 짐승처럼 운동장만 뛰던 루인이 처음으로 도서관을 찾으니 제법 놀란 것이다.
“에, 도서관도 종류가 다양하죠.”
“종류?”
아드레나의 미소에 자부심이 어렸다.
“여긴 ‘왕립’ 아카데미의 마법학부입니다아! 후읍!”
길게 숨을 들이마신 아드레나가 속사포처럼 열정을 토해 냈다.
“이론서와 전공서 위주로 구비되어 있는 지혜의 라이브러리, 민담집과 역사서, 고대 신화를 다루는 서적들 위주인 광명의 라이브러리―”
아드레나의 자부심이 더 길게 이어질 것 같았기에 루인은 단숨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
“지혜의 라이브러리로 가지.”
“오호, 역시 지혜인 건가요.”
길을 잡아 나서던 아드레나가 문득 묘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에, 그런데 첫날부터 오후 수업을 이렇게 빠진다고요? 교수님한테 찍힐 텐데?”
“관심 없다.”
루인이 휑하니 앞질러 나가자 아드레나가 빨간 머리칼을 휘날리며 쫓아갔다.
“악! 같이 가요!”
* * *
지혜의 라이브러리라는 거창한 이름의 도서관은 과연 왕립 아카데미의 명성에 걸맞은 장소였다.
루인이 큼지막한 매직 브러시 모양의 팻말을 눌렀다.
순간 탐지 마법진이 작동하며 문의 가운데에 반짝이던 보석이 붉은빛으로 타올랐다.
“거기, 보석에 명찰을 가져다 대세요. 빈틈이 있으면 인식이 안 되니까 꼭 밀착!”
루인이 묵묵히 가슴께에 매달려 있던 명찰을 빼냈다.
명찰을 인식한 붉은 보석이 다시 희미하게 빛을 잃자.
또다시 탐지 마법이 작동하며 거대한 도서관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호오.”
그야말로 광활한 도서관.
높은 천장까지 빽빽하게 책으로 채워진 책장들이 수십 미터나 넘게 뻗어 있었다.
낡은 책 냄새가 확 풍겨 오자 루인은 금방 흥이 일었다. 자고로 마법사치고 책을 싫어하는 이는 없었다.
루인이 다소 상기된 얼굴로 아드레나를 응시했다.
“이곳에 얼마나 있을 수 있지?”
“으음, 무등위 생도에겐 저녁 여덟 시까지. 3등위부터 무제한이죠.”
“……무제한?”
“3등위 생도부터 논문을 쓸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니까요. 제가 해결해 드려요?”
루인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그래 줄 수 있나?”
“에, 마법사라면 등가교환(等價交換)의 법칙쯤은 알 텐데요.”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며 뻔뻔하게 휘파람을 불고 있는 아드레나를 바라보며 루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대체 마법 생도 주제에 이렇게 수전노처럼 돈을 모으는 이유가 뭘까?
관심 없다는 듯 루인이 걸어가자 아드레나는 자신의 진짜 3등위 견장을 다급히 루인에게 건넸다.
“후불도 가능하거든요?”
“얼마.”
“100리랑!”
“상환 기간은 정하지 않겠다.”
“에? 그런 게 어딨어요?”
3등위 견장을 낚아채듯 빼앗아 간 루인이 이내 책장을 훑기 시작했다.
<약화계 술식의 오류성에 대하여>
<마나 유체 파장의 광전 효과>
<마력 열성(劣性) 현상에 대한 고찰>
<고호람의 마력 정제 이론>
<마나 역학 - 수직 이동성의 발견>
<편미분 확률과 열용량의 법칙>
<왜곡 마법 속의 물질은 왜 질량이 변화하는가>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간다.
두꺼운 책들의 중심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 각국의 마탑에서 보내온 최신 이론 연구들.
마침내 학회의 검증을 마친 이론들이 학술로 인정을 받아 이렇게 각국에 보고된 것이었다.
루인이 그런 최신 학술들을 빠르게 훑어 나가기 시작했다.
‘허…….’
루인을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저 다양한 연구들이 고작 한 분기에 완성된 업적들이라는 것이었다.
지난해 마법학회에 보고된 학술들만 해도 지금 자신이 본 책장에 있는 것의 네 배.
그런 학술이 백 년, 천 년 동안 쌓였다면?
생각지도 못한 논리의 다양성 앞에서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정말 한심하군…….’
루인은 자신의 편협함을 스스로 힐난했다.
흑마법의 위대성에 도취되어 백마법을 깔아 보던 편협한 시야는 쟈이로벨만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만 년 이상의 세월로 갈고닦은 위대한 마법이라고?
백마법 따위로 감히 마신의 마법과 대적하겠느냐고?
하지만 저 필멸자들의 무시무시한 집단 지성을 보라.
그들의 삶은 찰나지만 또한 불꽃이었다.
저 치열한 불꽃들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타오른다면 그야말로 하늘을 태울 것이다.
그 거대한 불꽃은 고작 수만 년 따위로 대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지혜의 향연 앞에서 대마도사 루인은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
이제 고작 첫 번째 책장.
저 멀리 끝도 없이 뻗어 있는, 수천 년 마법 역사의 찬란한 지혜.
그것은 루인에게 감동을 넘어 열패감으로 다가왔다.
스스로를 향한 모멸감.
완성된 마신의 이론만을 절대의 가치로 삼고서, 고작 안주하기만 했던 편협한 대마도사라니.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게리엘도스 교수를 향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자신이.
그의 가속(加速)은 언제고 길을 찾아갈 것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확산(擴散)을 넘어, 그 이상의 경지를 이룩할 수 있는 그의 가능성을 제한해 버렸다.
감히 그런 마법사의 치열한 열정을 바보 같다고 폄하했다.
-네놈, 자책할 것 없다.
때아닌 쟈이로벨의 위로에 루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이게 백마법이란 말이지.’
지혜의 라이브러리.
그 위대한 공간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나의 세계를 표류하는 마법사처럼 쉴 새 없이 마음이 울렁거린다.
그러나 가슴이 타는 듯이 뜨거워진다.
시야는 더없이 또렷해지고 대마도사의 세계는 느려졌다.
천천히 이 모든 지혜를 게걸스럽게 탐닉할 것이다.
역사 속의 마법사들이 남긴 모든 지혜를 집대성할 것이다.
그래서 기어코 또 다른 경지의 대마도사가 될 것이다.
그것이 흑암의 공포, 대마도사 루인이 살아온, 또 살아갈 삶.
루인은 비로소 확신하고 있었다.
백마법은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