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염동(念動).
마법사에게 있어서 어쩌면 마력보다도 더욱 중요시되는 잣대.
마나 친화력이나 술식 구성과는 달리, 염동력은 마법사의 재능을 타지 않는 편이다.
염동력은 마법사의 살아온 세월에 정확히 정비례하며, 이는 염동력이 정신력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정신은 경험에 의해 단단해진다.
생과 사의 갈림길을 수도 없이 겪은 마법사와, 세상에 갓 나온 신출내기 마법사가 같은 정신력을 지닐 수는 없는 것이다.
하위 위계의 마법사들에 비해 초고위계 마법사들의 캐스팅 시간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이유.
복잡한 술식과 회로로 구성되어 있던 마법의 구동 체계 대부분을 염동으로 손쉽게 처리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문득 불길한 생각에 입술을 깨무는 루인.
하급 마졸들의 평균 수명은 500년.
개중에 뛰어난 마족들은 생에 첫 탈피(脫皮)의 고통 속에서 죽지 않고 마군(魔軍)으로 살아남게 된다.
무한히 이어지는 마계대전에서 살아남은 마군들 중 소수는 각성하여 마장(魔將)이 되고.
그런 극소수의 마장들 중에서 마신의 권능을 나눠 받은 자들이 바로 마왕(魔王).
사실상 이때부터 그들은 필멸자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흑마법이 백마법보다 더한 권능을 지니는 것은 바로 이 때문.
수천 년의 증오를 집어삼키며 성장한 전장의 마귀들이 필멸자의 굴레마저 벗어던졌을 때.
그들은 모든 감정을 초월하여 진정으로 자유로워졌으며, 덕분에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신력을 보유하게 된다.
하물며 진마력이라는 막강한 힘을 활용할 수 있는 그들은 인간에게 있어서 막을 수 없는 재앙.
그래서 마계의 침공이란 인간이 맞이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천재지변이었다.
한데 그런 마계의 정점에 서 있는 마신의 정신력은 어떨까?
더불어 처음부터 그런 괴물 같은 놈에게 흑마법을 배웠고, 또 수만 년 동안 그의 의식과 함께 지낸 자신이라면?
자신이 자연스럽게 여겨 왔던 모든 것들이, 저 백마법에 있어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면?
그 거대한 괴리 앞에서 루인은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마법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이유를.
이 간단한 걸 놓치고 있었다니.
“……내 염동력은 철저하게 흑마법에 맞춰져 있었군.”
같은 염동력을 발휘한다면 이 세계의 마나로 흑마법과 같은 위력의 마법을 시전할 수가 없다.
그 말인즉, 각 마법에 필요한 염동력의 수치를 엄청나게 상향 조정해야 된다는 뜻.
물론 큰 문제는 없었다.
흑마법을 배웠을 초기부터 마력술식만큼이나 염동력에 매달렸으니까.
회로 술식이고 자시고, 쟈이로벨의 마법을 펼치는 데에 필요한 염동력부터가 터무니없는 수준이었기 때문.
결국에 쟈이로벨은 어쩔 수 없이 온전한 마신의 마법을 전수하는 것을 포기했었다.
대신 두 단계 정도 열화(劣化)된 마법을 자신으로 하여금 익히게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흑암의 공포가 될 수 있었다.
어느새 루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흑마법을 회복할 길이 생겼으니 더 이상 아카데미나 마탑에 미련을 두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물론 같은 마법을 시전한다고 해도 전생보다는 염동력 소모가 막심할 것이다.
허나 자신은 차원의 거품 속에서 수만 년 동안 정신력을 갈고닦은 몸.
전생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염동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 즉 문제 될 게 없는 것이다.
이 세계의 마나를 진마력처럼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생긴 이상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짐을 쌀 기세처럼 일어난 루인을 향해 또다시 쟈이로벨의 영언이 울려 퍼졌다.
-섯부른 판단이다. 백마법을 포기한다는 것은.
“무슨 소리냐? 너답지 않게.”
흑마법을 향한 마신 쟈이로벨의 자부심은 흔들리지 않는 철탑과 같았다.
쟈이로벨의 열화판 마법으로도 모든 초인들 위에 군림할 수 있었기에 루인 역시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
이 바보 같은 아카데미 생활을 정리할 절호의 기회였기에 루인은 선뜻 동의하기 힘들었다.
인간의 백마법 수준이 저 정도로 처참하다면 굳이 익힐 이유가 없지 않나?
-들은 것만으로는 네 전생의 경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 물어보지. 강림한 상태의 본 마신을 상대로 너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음.”
생각이 길게 이어졌지만 나오는 건 웃음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쟈이로벨이 직접 강림하여 악제(惡帝)와 결전을 벌이던 광경이 지금도 생생했기 때문.
말 그대로 쟈이로벨은 마신이었다.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공간.
손짓 한 번으로 산 하나를 날려 버린다.
발길질 한 번에 지저의 세계로 이어진 듯한 거대한 구멍이 생겨나고.
날갯짓에서 피어난 살을 에는 소용돌이 수백 개가 악제의 군단을 통째로 휩쓴다.
언령 한 번에 대지는 용암으로 들끓었으며.
그가 펼친 광활한 뇌전 지대 역시 적이 근접조차 할 수 없는 지옥이었다.
그 모든 위용이란 가히 신(神).
천천히 마인딩을 마친 루인은 자조적인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길 수 없어. 강림한 널 상대할 수 있는 건 역시 ‘존재’들이나 악제(惡帝)뿐이다.”
-역시 그렇군.
쟈이로벨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다시 힘겹게 영언을 늘어놓았다.
-인간의 역사에서 이 쟈이로벨을 상대할 수 있었던 자들은 이전에도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네놈의 선조인 사홀이 그랬고, 그 전에도 몇몇이 있었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자신 역시 지금까지 존재했던 인간의 영웅들 중에서 ‘존재’의 자격을 얻은 자들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대부분 신화처럼 여겨지지만, 세계의 이면을 엿본 자들에게만큼은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
마신의 자존감을 생각했을 때 언급하기 힘든 말이었기에 루인은 쟈이로벨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중에는 분명 마법사도 있었다.
“마법사……?”
단지 마법사로 지칭하고 있었으나, 쟈이로벨이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
-그래. 놈은 존재들의 신탁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마계의 절대자들과 계약도 맺지 않은 마법사였다. 그의 권능은 오직 백마법, 그것으로 본 마신 이상의 경지를 이루었지.
루인은 인정하기 힘들었다.
“실제로 테아마라스와 겨뤄 본 적이 있었나?”
-그건 아니다.
“그런데 왜 그런 소릴 하는 거지?”
-그가 신들의 자식들을 몰살하는 광경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커다랗게 떠진 루인의 두 눈.
“신들의 자식들?”
순간, 루인은 대륙의 고대 전설들을 빠르게 더듬어 나갔다.
“설마 타이탄족?”
타이탄족.
대륙의 오래된 역사에 따르면 타이탄족은 존재들의 비호를 받는 종족인 드래곤들보다도 강성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멸망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타이탄족.
신들과 직접 닿아 있던 종족이었기에, 오히려 신들의 저주를 받아 멸망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단 한 명의 인간에 의해 종족 자체가 멸망을 맞이했다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사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인간계의 섭리와 인과율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일.
신들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그런 엄청난 재앙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존재들은 뭘 했지? 아니 그것보다 인간들 중에서 초월자(超越者)가 나타났다면 반드시 자신들의 품으로 받아들이려고 할 텐데? 테아마라스가 ‘존재’가 됐다면 섭리에 벗어나는 일을 벌일 수가 없잖아?”
-거부했겠지.
“……그게 가능해?”
인간계를 다스리는 주신(主神) 알테이아의 권능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절대로 저런 말을 할 수 없다.
악제(惡帝)가 모든 존재들을 소멸시켰지만 주신 알테이아만큼은 놈도 어쩌지 못했다.
물론 그녀는 언제나처럼 그 모든 재앙 속에서도 침묵했다.
알테이아 교단의 성자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도, 대륙의 인구 절반 이상이 쓸려 나가도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억척스럽게 세계의 주시자(注視者)를 고집하던 게으른 주신.
-그녀와 테아마라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알테이아는 침묵으로 그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주신 알테이아를 침묵시키고 대륙에 영원처럼 존재했던 신의 종족, 타이탄족을 말살한 인간이라…….
그 정도라면 절망의 악제 못지않은가?
“……넌 어째서 이런 얘기를 한 번도 해 주지 않았지?”
차원의 거품 속에서 쟈이로벨과 함께 지낸 시간은 무려 수만 년.
그 엄청난 시간 속에서도 쟈이로벨은 이런 엄청난 세계의 비밀에 대해 비슷한 예조차 언급한 적이 없었다.
-…….
쟈이로벨은 루인의 질문이 미래의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아무리 마신이라고 해도 경험하지 못한 미래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묘한 눈빛을 하고 있는 루인.
확실히 지금의 쟈이로벨은 뭔가 다르다.
훨씬 더 호의적이고 감정적이다.
하긴, 같은 쟈이로벨이라고 해도 각기 다른 시간선에 존재하는 감정이 같을 수는 없겠지.
“그래. 그럼 굳이 숨겨 온 이런 이야기들을 내게 해 준 이유는?”
-그 전에 다른 걸 묻겠다.
“또 뭐?”
-넌 전생의 경지를 초월해야 한다. 한데 염동력의 소모가 훨씬 심해진 흑마법의 기반으로는 절대로 가능하지가 않다.
루인이 피식 웃었다.
“아직도 날 그냥 인간으로 생각하는 거냐?”
-염동력이 마법사가 쌓아 온 경험과 정신에 비례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넌 과거로 왔지 않은가?
루인이 의뭉스럽게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과거로 왔지만 내 경험과 정신은 그대로다.”
-정신과 육체를 달리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네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육체란 영혼을 담는 그릇. 네놈의 수만 년 정신을 담고 있던 그릇은 미래의 것. 지금의 네 염동력은 필시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순간 이를 악문 루인이 마나 서클화된 오드를 소환했다.
순식간에 염동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루인이 명계의 잔혹한 불꽃을 이미지했다.
지잉-
지이이잉-
푸른 빛살들이 무수한 다차원의 회로로 이어졌을 때, 루인의 입에서 차가운 언령이 흘러나왔다.
“하기라사트라.”
하기라덴의 상위 마법, 하기라사트라.
화르르르르!
떠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는 루인의 두 눈 속에서 당황스러운 감정이 잔뜩 묻어 나오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한 엄청난 두통.
더구나 하기라사트라의 위력도 약해져 있었고, 빛깔마저 예전과는 달랐다.
“이게 뭐지……?”
원래라면 하기라사트라의 색깔은 명계를 닮아 잿빛.
하지만.
-아무런 색이 없군. 마치 무속성처럼 보인다.
당황한 루인이 냉기 계열 흑마법을 소환했다.
“샤드마하!”
츠츠츠츠-
여전히 아무런 색깔 없이 희미한 마나의 형상만 보이는 샤드마하.
“우움바라트!”
어떤 마법을 소환해도 원래의 속성조차 느껴지지 않았으며 파괴력 역시 과거보다 훨씬 약해져 있었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염동력 소모가 훨씬 심하다는 것이었다.
-막대한 염동력을 소모하여 억지로 이 세계의 마나를 진마력처럼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단순히 염동력만으로 가공된 이 세계의 마나가 진짜 진마력일 리가 없지 않느냐. 그건 허상 같은 것이다. 기본적인 성질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지.
허탈한 루인의 표정.
“백마법은…….”
이미 게리엘도스 교수가 연구하던 마력회로를 모두 봐 버렸기에 도저히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여전히 넌 착각하고 있다. 고위 마족들이 무한한 시간을 바탕으로 불가해의 마법을 구축할 수 있다면…….
쟈이로벨의 영언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인간은 그것을 전승(傳承)으로 극복하지. 그것은 우리들의 영원과 다를 것이 없다. 또한……
인간을 얕잡아 보는 감정?
그것 역시 쟈이로벨의 허상이었다.
그럼 진실은 무엇일까.
인간에게는 그 어떤 종족도 따라가지 못할 가장 완벽한 재능이 있었다.
-그렇게 전승된 지혜가 마침내 절대적인 재능과 함께 피어났을 때 인간은 전인미답의 경지를 이룰 수 있다.
루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애초에 기댓값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불과 백여 년의 수명이 전부인 인간이 영원을 살아가는 마신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절대적인 시간의 차이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조건.
한데, 이어진 쟈이로벨의 말에 루인은 멍하니 굳어졌다.
그로서는 절대로 말하고 싶지 않은, 기어코 부정하고 싶은 진실이었다.
-너희들 인간은…… 태초신의 축복을 타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