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리리아의 초록빛 눈동자가 아카데미의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마법…….’
대부분의 생도들이 그렇듯, 리리아에게도 마법은 살아갈 ‘수단’이었다.
굳이 여러 결론을 상기할 필요도 없이, 마법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과 결부되는 것이었으니까.
가문의 쟁쟁한 형제들.
그런 치열한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것.
리리아 드리미트 어브렐.
그 이름을 갖게 된 순간부터 그것은 결정된 길, 그저 숙명이었다.
그래서 마법을 배우는 이유에 대해서 그리 큰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가치관이니 신념이니 하는 사치스러운 감정들도 멍청한 기사들의 전유물이라 여겼다.
마도명가 어브렐.
감성보다는 철저한 이성으로 살아가는 마도 가문.
칼 같은 실력주의, 피도 눈물도 없는 경쟁, 성과만이 모든 것을 증명하는 곳.
자신은 그저 그런 차가운 귀족가의 막내딸이었다.
“뭐 감정을 덜어 내? 왜 평소에 최악의 상황을 이미지하자는 거지, 나약해지게? 마법사라면 가진 지혜로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먼저잖아?”
“마법에 감성을 내세우는 건 그야말로 머저리 같은 짓이다. 마법이 그런 감상적인 학문이었다면 나는 마법을 배우지도 않았다.”
“무슨 영웅담 같은 걸 읽고 크게 빠져든 모양인데요? 사실 논할 가치도 없어요. 교수님께서 왜 동요하시는지 저는 이해가 안 돼요.”
“그것보다 저놈은 도대체 왜 달리고 있는 거지?”
루인을 관찰하고 있는 생도들이 저마다의 감상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리리아는 그들의 감상에 동요하지 않았다.
저들의 주장은 그냥 반사적인 거부감에 불과했으니까.
마법사로서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고?
그 위대한 현자님조차도 수많은 병사의 목숨을 무력하게 잃었다.
르마델의 역사, 그 처절한 전장의 기록을 한 번이라도 공부했다면 저들도 알 것이다.
마탑의 예측과 대책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했는지를.
현자의 지혜로도, 고위 마법사들의 마법으로도 제국이 일으킨 재앙을 모두 막지는 못했다.
“아까처럼 시선을 끌자는 수작이겠지. 교묘한 말재주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놈이다.”
“와, 저게 다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럼 너무 불쌍하잖아요?”
“가자 세베론. 시간이 아깝다.”
“어? 아, 알았어요.”
리리아의 두 눈에 묘한 이채가 감돌았다.
4등위 마법 생도인 오빠가 건네준 생도들의 정보.
그 정보에 의하면 세베론은 빼어난 재능과 성적으로 많은 교수들이 눈여겨보고 있는 천재였다.
한데 그런 그가 왠지 저 금발 머리 생도에게 끌려다니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마 그는 시론일 거예요.”
“시론……?”
자신에게 말을 건네 온 이는 짙은 흑발이 인상적인 소녀 생도.
‘슈리에라고 했던가.’
자신과 함께 보결로 입학한 생도였기에 안면은 있었다.
리리아가 사라져 가는 금발의 생도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저 남자가…….’
현자의 가문, 메데니아가(家).
저 금발의 청년이 바로 현자 에기오스 님이 남달리 아끼는 손자, 시론이란 말인가?
다른 어떤 생도보다 많은 설명으로 오빠의 인물 일람표에 적혀 있던 인물.
“그는 현자 에기오스 님의 손자예요. 명성과는 다르게 별다른 튀는 행동 없이 그저 묵묵히 수업만 듣는 편이죠.”
갑자기 친하게 굴며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리아는 금방 슈리에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나.
“뭐지?”
갑자기 새하얀 손이 시야에 들어오자 리리아가 슈리에를 날카롭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게 가치 있는 일이거든요. 당신과 악수를 하는 건.”
리리아의 가슴에 금방 혐오의 감정이 자리 잡았다.
마법에는 관심도 없는 주제에 그저 인맥 넓히려는 데만 혈안이 된 재수 없는 귀족 영애.
통성명 한 번 없이 자신을 알아보고, 시론과 같은 주요 생도들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배움의 성지 아카데미를 한낱 사교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런 인간들과 어울리는 것.
그건 리리아에게 일종의 모욕이었다.
하긴 재능과 능력, 하물며 노력할 각오조차 없다면 이게 저들의 살아남는 방식이라는 건가.
“치워.”
자신을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슈리에는 여전히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메데니아가가 당대의 현자를 배출해 낸 신진 마도명가라면.
어브렐가는 역사 속에 현자를 몇 번이고 배출해 낸 전통의 마도명가.
당연히 그 위상은 결코 메데니아가 못지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리리아에게 호감이 생기는 건.
“조금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우우우웅-
마나를 그리기 시작한 슈리에의 수인.
이내 복잡한 회로가 허공에 맺히더니 마력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번쩍!
3등위 화염계 원소 마법 열섬파멸구(熱閃波滅球).
간단하게 자신을 증명한 슈리에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술식을 흩어 냈다.
금방 달라진 리리아의 눈빛.
영창의 자연스러움이나 느껴지는 마력의 결 또한 분명한 3위계.
게다가 열섬파멸구는…….
“뷰오릭 학파를 따르는가?”
“이상에 이르는 길은 하나일지니―”
슈리에가 선창하자 엄숙한 선언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비록 파멸하여 모든 것을 남길 수 없더라도 그것이 진보의 끝이기에 뷰오릭은 영원하다.>
싱긋.
“제가 아버지를 괴롭혀 마법학부에서 1년간의 활동을 허락받은 이유는…….”
“그만. 네 마력을 느낀 생도들이 이곳을 보고 있다.”
“……알겠어요.”
마법사에게 있어서 학파란 굉장히 중요한 배경이다.
어떤 학파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마법적 역량과 성취가 완전하게 달라지기에.
뷰오릭은 전통적인 원소 계열 학파.
하지만 급진적인 이론과 독특한 연구 방식, 다소 극단적인 술식 구현법 등으로 인해 오랜 세월 마법학회에서 배척받아 온 학파였다.
“그럼 네 목적도 입탑권이겠군.”
“네.”
이 르마델 왕국에서 뷰오릭 학파의 마법사로 살아간다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뷰오릭 학파의 마법사는 모든 정치적인 지위에서 손해를 보게 되니까.
다들 쉬쉬하고는 있지만 마탑의 장로들 중에 뷰오릭 학파의 고위 마법사가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
그런 불합리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마탑의 일원이 되거나 적어도 마탑의 후원을 받는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리리아의 의문은 모두 해소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뷰오릭 학파…… 아니, 내가 3위계 이상의 마법사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무등위 생도들은 결코 함부로 학파를 선택하지 않는다.
자신의 재능이 어떤 학파의 마법과 어울리는지는 최소 3위계 이상의 경지를 이루고 나서야 가늠할 수 있게 되니까.
한데 리리아는 가문의 누구에게도 경지를 들키지 않았다. 형제들은 물론, 심지어 아버지에게도.
한데, 슈리에의 대답은 간단했다.
“비밀 집회에 참석하셨잖아요?”
“뭐……?”
뷰오릭 학파의 집회는 말 그대로 비밀 집회, 철저한 익명성이 보장된다.
가면과 음성 변조 마법이 허락되며, 원거리 통신 마법으로도 참여가 가능하다.
“설마 너는!”
뭔가가 생각났는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리리아.
“네. 그때 반지를 빼라고 조언했던 토끼 가면이 저예요.”
멍해진 리리아.
분명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상속의 인장을 깜빡하고 착용했었다.
그런 자신에게 친절하게 충고해 준 그 토끼 가면이 이 여자라고?
하지만 리리아의 의문은 남아 있었다.
상속의 인장으로 가문을 유추할 수 있었다고 해도, 정확히 자신을 구별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런 리리아의 눈빛에 담긴 의문을 읽었는지 슈리에가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 아까 교실에서 번쩍 들었을 때 바로 알아보았어요. 약지가 짧은 게 참 특이하잖아요?”
자신의 손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던 리리아.
곧 그녀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다시 슈리에를 응시했다.
“너…….”
이러면 차라리 철없는 귀족 소녀 쪽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생도란 여러모로 신경 쓰일 테니까.
더구나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벌써 3위계의 경지라니.
자신은 마도명가의 화려한 지원 속에서 이룩한 경지지만, 눈앞의 이 소녀는 들어 본 적도 없는 자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같은 학파의 학도를 팔아먹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테니까.”
마법사에게 있어서 같은 학파끼리의 결속력은 대단하다.
그제야 불안한 마음이 좀 잦아드는지 리리아는 다시 운동장을 뛰고 있는 루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에게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어요.”
“…….”
슈리에는 마치 확신에 찬 듯이 조소하고 있었다.
“나도 다른 생도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아요.”
리리아가 피식 웃는다.
“허세로 관심을 끌어 보겠다는 얄팍한 행동이라는 건가.”
“보기 좋게 성공했잖아요? 기존 생도들의 말에 따르면 게리엘도스 교수님이 그렇게 동요하는 건 처음 봤다고 하더군요.”
“글쎄.”
하지만 리리아는 여전히 생도들의 주장이 별로 와닿지 않았다.
저 달리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게 단순히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라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로 보는 이가 안쓰러울 정도로 비틀거리는 소년.
쓰러지는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세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나도 할 수 있을까?’
저렇게 뛴다는 건 보통의 마음가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극한의 정신력과 단호한 결심, 한계를 의심하지 않는 강력한 믿음, 나아가 삶의 목표가 명확한 자의 행동이다.
정말로 저 소년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뛰고 있다면, 그것이 한결같은 그의 신념이라면.
‘그의 마법은 다를 거야.’
마법은 정신으로 빚어내는 창조(創造)다.
어브렐가의 가언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자가 저 생도라면…….
‘좀 더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어.’
* * *
루인은 오후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전 수업처럼 필수 과목도 아니었고, 자신에게 필요한 수업은 더더욱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2위계에 머물러 있는 마력을 뿜어낼 수 있는 것이 전부였다.
마력을 구현할 새로운 체계가 필요한 것이지, 마법적 해석이나 술식 공부가 필요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기숙사에 돌아온 루인이 책상에 앉아 골몰하고 있을 때 쟈이로벨의 영언이 들려왔다.
-전에 그 인간 마법사의 마력회로 말이다.
“마력회로? 아, 게리엘도스라는 자.”
-네놈이 했던 조언대로 술식의 방향이 틀린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뭔가 불필요한 걸 잔뜩 집어넣은 느낌이 강했다.
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리엘도스 교수의 술식은 애초부터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마력회로로 가득했다.
처음부터 확산(擴散)이 목적인 듯한 마법.
마력 구현부터 염동 체계, 회로의 진동 방향까지.
이 모든 조합이 모조리 확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그는 억지로 가속(加速)에 끼워 맞추고 있었다.
마법학부의 교수라고 해서 내심 기대했었는데 그 수준이 너무 처참할 지경.
“당연한 거 아니냐? 처음부터 어긋난 회로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 보니 이것저것 불필요한 회로가 추가될 수밖에.”
-그래도 그놈은 인간 마법사 중에서 꽤 실력이 있는 놈이 아닌가? 아카데미의 교수란 놈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회로를 그리는 것에는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겠지.
루인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력을 구현하는 체계를 살펴보지 않았을 뿐 현자들의 백마법, 그들의 술식을 전생에서 수도 없이 경험했다.
비록 마계의 흑마법에 비해 완성도는 모자랄지라도, 백마법은 특유의 독특함이 있었다.
한데, 게리엘도스 교수의 술식은 그런 독특함마저도 엿볼 수 없었다.
“그건 그냥 그놈의 실력이 형편없는 거다. 달리 다른 해석은 필요하지 않아.”
-내 가정이 궁금하지 않느냐?
“가정?”
-네놈이 그 인간 마법사 놈의 회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말이다.
얼굴을 찡그리는 루인.
처음부터 잘못된 방향의 마력회로라는데 자꾸만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으니 짜증이 난 것이다.
-내가 본 인간의 백마법은 염동(念動)의 수준이 한심할 정도로 낮다. 간단하게 염동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부분까지 모두 회로로 구현해 내려고 드니 그렇게 자꾸만 꼬이는 것 같은데.
루인이 설마하는 표정으로 굳었다.
“그 무슨…… 에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