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마법학부의 아침이 밝았다.
여전히 한계까지 몸을 혹사시켰는지 루인이 땀에 범벅이 된 채로 기숙사의 식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
그와 함께 식당에 도착한 아드레나는 마치 질린다는 듯한 얼굴.
루인의 체력 단련은 철없는 소년의 오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늘 정해진 시간에 운동장에 나와 달리기를 시작했고,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그 미친 짓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역한 구토가 치밀 만큼 안쓰러울 지경.
그중에 몇 번은 의식까지 잃어버려 병설 의무대의 장교까지 소환했었다.
황당한 것은 그렇게 겨우 회복한 후에 또다시 달리기를 반복한다는 것.
오전 내내 달리기, 몇 시간의 휴식, 오후 달리기, 또 휴식, 저녁 달리기 후에야 일과 종료.
이 무식한 짓을 봄 방학 기간 내내 반복하는데…….
‘그는 이제 한 번에 50바퀴를 뛸 수 있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끝까지 목표를 완주하고야 마는 그 무시무시한 눈빛에 지금도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앞선 모든 것보다 황당한 시간은.
바로 지금.
“와…… 또?”
왕실 아카데미가 제공하는 식단은 매우 다채롭고 화려하다.
감미로운 향을 뽐내는 스튜만 해도 취향에 따라 이십여 종이 넘게 제공되고 있었고.
신선한 해산물과 채소로 볶은 스파게티, 갖은 향으로 드레싱한 샐러드들.
왕실 제빵사들의 실력을 알 수 있는 엄청난 종류의 빵, 쿠키, 파이들.
형형색색의 케이크, 샌드위치, 도넛.
온갖 청량한 향을 뿜어 대는 과일 쥬스와 차(Tea).
거기에 질 좋은 고기로 구운 스테이크의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
적어도 먹는 시간만큼은 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왕립 아카데미다.
한데.
루인이 식판 위에 담는 음식은 언제나 딱 세 가지.
한 주먹의 채소, 으깬 감자, 삶은 고기 반 덩이.
그의 식단은 절대로 이 기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양까지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늘 정확하다.
과거 아드레나는 수도원의 성직자들과 식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엄격한 절제의 상징인 성직자들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어차피 루인을 관찰하는 건 일이기도 했고 그동안은 괘씸해서 애써 참아 왔다.
하지만 아드레나는 오늘만큼은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다른 맛있는 요리들이 저렇게나 많은데 왜 항상 그렇게 먹는 거죠?”
의외로 그의 대답은 허탈하리만치 간단했다.
“습관이다.”
“…….”
오물거리며 씹고 있는 루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아드레나.
씹고 삼키는 속도도 지나치게 느리다.
마치 진미를 음미하는 듯이.
“에, 그러니까 그런 습관을 유지하는 이유 말이에요. 내가 듣고 싶은 건 그 이유겠죠?”
곧 루인이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인간의 행위는 반드시 의식에 영향을 준다. 식습관도 의식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지.”
“에, 의식이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런 자연스러운 행동을 거창하게 의식과 연결을 짓다니.
그러나 루인의 주장이 신선하게 다가왔는지, 아드레나는 더욱 호기심이 치민 듯 했다.
안경을 치켜 올리며 다시 관심을 보이는 아드레나.
“먹는 행위, 그러니까 식습관이 의식에 무슨 영향을 준다는 거죠?”
“비단 식욕에 한정되진 않아. 즐겁고 쉬운 것을 탐하는 본능에 길들여질수록 반드시 다른 무언가는 무뎌지지. 이를테면 끈기나 인내 같은 것.”
“끈기? 인내?”
다시 으깬 감자를 천천히 씹어 대던 루인이 포크를 놓았다.
“긴장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의식은 허약하다. 뛰다 보면 걷고 싶고, 걷다 보면 멈추고 싶지. 멈추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 끝내 누우면 자고 싶지. 이건 진리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
“…….”
“즐거운 맛을 탐할수록 더한 즐거움을 찾는다. 더 이상 즐거움을 채울 수 없으면 욕구는 비틀린다. 비틀린 욕구는 의식에 영향을 끼쳐 더한 자극이 올 때까지 부정정인 것들을 토해 낸다. 나태, 불신, 불만…… 타성에 젖는다는 건 그런 거지.”
아드레나는 더욱 멍해졌다.
아니 으깬 감자 먹는 것에 무슨 저런 터무니없는 철학까지 늘어놓는 거지?
“에……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요? 맛있는 걸 먹는 건 그저 힘들고 고된 삶에 자그마한 보상 같은 거잖아요? 굳이 그렇게까지 갖다 붙일 필요는…….”
씨익.
“그럼 넌 그렇게 살면 된다. 난 그저 질문에 대답해 준 것뿐. 각자의 방식대로 사는 거지.”
사실 루인의 오랜 습관이기도 했지만 급격하게 영양을 늘일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십 년 이상 쟈이로벨에 의해 생명력을 갉아 먹히며 피폐해진 몸.
아직 장기 기능이 원활하지 않았기에 소화할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시 으깬 감자를 씹어 가는 루인.
아드레나가 조심스럽게 일지를 꺼내 적기 시작했다.
『맛있는 걸 잘 안 먹음. 성직자가 더 어울림.』
그때, 한 무리의 예비 생도들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거만한 표정으로 그리 즐겁지 않은 일에도 낄낄거리며 입장하고 있는 예비 생도들.
그들은 루인과 함께 아카데미에 입소한 보결 생도들이었다.
문득 아드레나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결 생도들을 힐끗거리는 그녀의 눈.
그 눈빛에 깃든 감정은 일종의 혐오였다.
그저 자신의 뜻과 함께할 인재를 영입하거나 시간만 축내기 위해 입소한 귀족가의 자제들.
마법을 향한 열정도 간절한 목표도 없는, 그저 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철없는 아이들이었다.
아드레나는 그런 인간들에게까지 굳이 심력을 소모하고 싶진 않았다.
뭐, 돈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토록 쉬운 마탑의 임무가 자신에게 맡겨진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무려 600리랑이라니!
루인이라는 소년이 복덩이처럼 보이는 이유다.
“에, 전 나가 있겠어요.”
“나도다.”
삶은 고기를 입에 욱여넣으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는 루인.
그렇게 루인과 아드레나는 재빠르게 식당을 빠져나왔다.
* * *
첫 수업을 듣기 위해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인.
그가 곧 아드레나를 발견하곤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의 어깨 위에 있는 견장이 자신과 같은 무등위였기 때문.
단지 견장 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아드레나의 분위기는 확 달라져 있었다.
생기발랄하게 웃고 있는 표정이 영락없는 새내기 생도였다.
“어……?”
그런 아드레나를 발견한 슈리에가 깜짝 놀라며 입을 열 찰나, 아드레나가 황급히 쉿 하고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아드레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슈리에에게 눈짓하더니, 이내 루인의 옆자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았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어, 제 임무니까요?”
싱긋.
하지만 아드레나의 시선을 외면하는 루인.
곧 그가 봄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무등위 생도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보결 생도들과는 달리 그들의 눈빛에는 열기로 가득했다.
‘이제 좀 생도 같은 놈들을 만나는군.’
지금도 열심히 수련하고 있을 데인이 생각났는지 루인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그때 첫 수업의 교수가 나타났다.
‘게리엘도스 교수?’
깔끔한 달마티카(Dalmatica)를 걸치고 나타난 게리엘도스 교수는 전과는 확연히 분위기가 다른 모습이었다.
부스스한 머리칼도 깔끔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었고 인상도 한층 온화했다.
또한 난제를 해결한 것이 기뻤는지, 고조된 감정이 한눈에 느껴졌다.
잠시 후 그는 교탁 위의 교편을 집어 들더니 고아한 눈빛으로 생도들을 쓸어 보고 있었다.
그는 가타부타 인사도 없이 곧바로 수업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융해(融解) 마법에 대해 강론하겠네. 지난 과제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낸 학생이…… 쥬드 생도군. 쥬드 생도. 융해 마법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 보게.”
게리엘도스 교수에게 호명된 쥬드가 자신감 있게 일어났다.
“융해는 열화(烈火) 계열의 좀 더 진보된 마법입니다. 요구되는 마력으로 보나 술식의 난이도로 보나 훨씬 구사하기 어렵습니다.”
“……끝인가?”
쥬드가 입을 오므리며 자리에 앉자 게리엘도스 교수는 다소 실망한 표정이었다.
한데 그때 누군가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녀는 루인과 함께 입학한 보결 생도 리리아였다.
“오, 말해 보게.”
이내 리리아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융해 마법의 기초가 되는 마법은 마그마 필드(Magma field)예요. 요구 마력량 사천 리퀴르. 염동력 수치, 술식의 난이도, 언령 수준 등을 모두 고려한다면…… 최소 5개의 고리를 이룬 5위계 마법사 이상은 되어야 초보적인 단계라도 밟아 볼 수 있을 거예요.”
“정확하네.”
게리엘도스 교수는 의외라는 듯, 리리아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부터 여느 귀족가의 자제들과는 다르다.
보통 보결 생도들은 말썽만 피우지 학습에 열정적인 경우를 찾아보기 힘든데 적어도 리리아만큼은 달라 보였다.
남다른 보결 생도의 수준에 더욱 기대되는 것은 바로 저놈이었다.
“루인 라이언 생도.”
한 차례 눈살을 찌푸리던 루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 역시 융해 마법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 보게.”
이내 루인의 무신경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는 것이 없습니다.”
금방 자리에 앉아 버리는 루인.
하지만 게리엘도스 교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2년 동안 풀지 못한 자신의 난제를 풀어 버린 녀석이었다. 저 대답이 진실일 리가 없었다.
“지혜란 모두가 함께 쌓아 가는 탑과 같은 것일세. 마법사들의 이상과 역사가 마탑(魔塔)이라 불리는 곳에 모이는 이유지.”
게리엘도스 교수가 루인의 두 눈을 끈질기게 응시하고 있었다.
“자네가 진정으로 마법사의 길을 걷는 자라면…… 모두와 나누게. 그것이 마법이 지향해야 할 참된 길이 아닌가.”
한없이 무심한 눈.
잠시 게리엘도스 교수의 말을 음미하던 루인이 다시 담담하게 일어났다.
인간의 백마법.
그의 마도론(魔道論)이 루인의 마음을 조금은 움직였다.
“광역 마법을 배우기 전에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마력이나 염동력 같은 기술적인 면이 아닙니다.”
“……그럼?”
루인이 마법 생도들을 쓸어 본다.
“효율을 고려한다면 융해 마법 같은 마력 소모가 심한 마법을 대인전에 쓸 멍청이들은 없겠죠.”
“그렇지.”
루인이 교실의 창밖을 쳐다본다.
“광역 마법은 전장(戰場)에서 진정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단숨에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광역 마법이죠. 하지만―”
순간적으로 강렬해지는 루인의 두 눈.
“정도의 차이일 뿐 반드시 아군 측의 피해도 함께 일어납니다.”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교실.
“지휘관이, 내 동료들이 적과 함께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용암 속으로 타들어 가는…… 그런 비윤리를, 그런 비인간성을 내가 견딜 수 있는가.”
모든 생도들이 멍한 얼굴로 루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든 처참한 감정을 짊어진 채로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정신력. 그런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철저한 효율만을 강구해 낼 수 있는 무자비한 마음. 그래서 마법사란―”
반쯤 뜬 루인의 두 눈이 교실 속의 생도들을 담담히 훑는다.
“열상이니 융해니 하는 것보단 인간의 감정을 덜어 내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지금의 이 수업은 그래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죠.”
그대로 굳어진 게리엘도스 교수.
루인이 건넨 묵직한 감정이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생도들이 하나같이 멍하니 루인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