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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49화 (49/187)

<49화>

“어, 루인 씨의 방은 여기네요.”

자신을 향해 생긋 웃고 있는 아드레나.

루인은 친절한 그녀의 행동에 피식 웃어 버렸다.

어디 좋아서 그러겠는가, 돈 때문에 저러는 거지.

덜컥.

“방 안까지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어머? 반말?”

귀족도 아닌 평민 출신, 그것도 예비 마법 생도가 반말을 건네올 줄은 몰랐는지 아드레나가 묘하게 눈을 흘기고 있었다.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고 작정했다면 이 정도 대접은 감수해야 하지 않나? 이토록 명징한 불쾌감은 오랜만이라 나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

루인은 마탑의 지시를 받는 사람 앞에서까지 굳이 평민 연기 따위를 유지하기는 싫었다.

이 빨간 머리 소녀는 언제든지 마탑의 늙은이들을 통해 자신의 정보에 접근이 가능한 인물.

“어, 그렇다고 그런 앳된 얼굴로 늙은이처럼 굴 필요까진 없잖아요? 말투가 너무 이상해. 무슨 교수님들 같아.”

이어 재빠르게 일지를 꺼내 무언가를 적는 아드레나.

『오만함. 말투가 늙음.』

씨익 웃던 그녀가 곧장 루인의 반대편 방문을 열었다.

루인이 금방 미간을 찌푸린다.

“빈방이 원래 이렇게 많나?”

“어, 빈방이 아닌데요? 봄 방학이라 생도들이 도착하려면 아직 일주일 정도 남았죠.”

“고작 날 감시하기 위해 멀쩡하게 주인이 있는 방을 허락도 없이?”

“어, 이 게리엘도스 교수님의 조교님에겐 무등위 마법 생도들의 방 배정 따윈 쉽게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요? 힛!”

“알 만하군.”

쾅―

루인은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고서 방 내부를 찬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간신히 누울 수 있을 것만 같은 좁은 침대, 그리고 그 위에 정돈된 생도복 두 벌.

낡은 책상 위의 가지런한 필기구와 수업에 관한 안내 책자, 또 삐거덕거리는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침대를 제외하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고작 서너 걸음 남짓.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 있다면 작은 창문을 완벽히 가려 주고 있는 마법 커튼이었다.

커튼에 새겨진 술식을 살피던 루인이 피식 웃었다.

빛이나 소음, 냄새 따위를 완벽히 막아 주는 차폐 마법이 새겨져 있었다.

일종의 아티펙트인 셈.

그나마 마법사의 민감한 성향을 고려해 저런 커튼이라도 매달려 있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루인이 침대 위에 있는 생도복을 집어 들더니 곧 펼쳐 보았다.

펄럭.

“으음…….”

과연 왕실 아카데미의 생도복답게 화려한 금장 단추들과 정교한 문양, 그에 대비되는 깔끔한 디자인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걸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정말로 소년이 된 기분이군.”

찝찝한 표정으로 생도복을 입고 있는 루인.

역시 뭔가 치욕적이다.

대마도사의 고고한 자아가 생도복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아…….”

그렇게 루인이 자괴감에 비틀거리고 있을 때, 쟈이로벨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클클! 네놈의 수준에 딱 맞다! 햇병아리 마법 생도 정도가 네놈에게 딱 어울려!

그때.

똑똑―

낯선 노크 소리.

루인이 문을 열었을 때, 아드레나가 낑낑거리며 땀을 닦고 있었다.

“어, 이거 당신이 보낸 물건인가요?”

아드레나가 간이 수레로 힘겹게 끌고 온 것은 육중한 자물쇠로 잠긴 궤짝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루인이 활짝 웃었다.

“알맞게 도착했군.”

역시 집사 아길레의 일 처리는 너무나 완벽하다.

도착할 날짜만 알려 줬을 뿐인데, 딱 쟈이로벨이 시건방을 떨 즈음에 절묘하게 배달된 것이다.

-저, 저, 저건 또 왜 가져온 것이냐!

‘네놈 주둥이에 자물쇠를 채우기 위함이지.’

-이, 이런 빌어먹을……!

루인이 간이 수레에서 궤짝을 내린 후 방으로 질질 끌고 갔다.

이마의 땀을 닦던 아드레나가 안경을 올려 썼다.

“도대체 이 무식한 자물쇠는 뭐죠? 금은보화라도 들었나요?”

“고맙군.”

쾅―

안 그래도 좁아터진 방에 궤짝까지 한 자리를 차지하자 더욱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그럼에도 루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 무식한 마신 놈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아이템.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한껏 비웃음을 늘어놓던 쟈이로벨이 언제 그랬냐는 듯 침묵하고 있었다.

드르륵―

루인이 금방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이어진 마인딩.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아카데미에서의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했다.

흑암의 공포에게 휴식과 여유란 그야말로 아득한 것.

의미 없이 보낸 시간은 결국엔 파멸로 돌아올 것이다.

‘…….’

지금부터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은 미래를 바꾸는 일이었다.

더구나 도래될 재앙을 막는 길.

변수를 줄이고 위험을 대비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루인은 확신할 수 없었다.

본디 미래란 깨진 유리와 같아서 신조차도 예측할 수 없는 것.

당장 이 마법 생도의 생활조차도, 만 년이 넘는 마인딩에서 한 번도 떠올려 보지 못한 변수였다.

인정해야만 했다.

신조차도 깨진 유리의 결을 헤아릴 수 없듯, 자신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결국 루인은 차원 거품에서의 모든 마인딩의 결과값을 백지화했다.

일단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마도사의 역량을 키워 나가는 것.

잃어버린 마법의 체계를 회복하는 것만이 모든 계획의 시발점이 될 터.

아니, 반드시 전생의 경지를 초월해 새로운 마도를 개척해 내야만 했다.

“…….”

더 이상 모두를 잃고 남겨지긴 싫었다.

남겨진 자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분노밖에 없었으니까.

꽈득.

루인이 이를 물며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막 회귀했을 때와 비교하면 시야가 제법 선명하게 돌아와 있었다.

십 년 이상 움직이지 않았던 근육들도 혈주신에 의해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

아직 심장을 포함한 주요 장기들이 쇠약한 상태이긴 하지만.

인간의 육체란 결국 정련되는 쇠와 같아서 단련하면 할수록 강해지는 법.

‘일단 몸부터.’

혈주신 같은 외부의 권능에 기댄 육체가 아니라 온전하게 강한 인간의 몸, 일단 그것이 필요했다.

정신이란 묘해서, 결국 육체가 강건하지 않으면 제대로 마도의 사념을 완성할 수가 없었다.

철컥-

루인이 다시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아드레나는 복도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말끔하게 생도복을 입고 나온 달라진 루인의 모습에 아드레나는 꽤 놀란 듯이 보였다.

“어? 제법…….”

아드레나의 노골적인 감시가 거슬렸는지, 루인이 홱 하고 그녀를 지나쳐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  *  *

“헉! 허억!”

아카데미의 운동장을 이제 열 바퀴 정도 돌았을 뿐인데 한계까지 숨이 차오른다.

루인은 신경질적으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찢어질 듯 부풀어 오른 폐부로부터 비릿한 피내음이 올라왔다.

“빌어먹을…….”

처음으로 혈주신의 권능을 활용하지 않고 몸을 혹사시켜 본 결과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형편없었다.

루인이 쉴 새 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다시 일어났다.

고작 열 바퀴를 첫 번째 한계로 규정하긴 싫었다.

끊어질 듯한 폐부를 견디면 견딜수록 내일은 좀 더 쉽게 숨을 쉴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비척거리며 나아간 루인이 이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뭐야 저 남자…….”

루인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아드레나는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마법사라고 해서 몸을 단련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마법의 역량이 갖춰졌을 때야 생각해 볼 일.

당장 마법 이론 하나 마법회로 하나 더 살펴봐도 모자랄 햇병아리 시기에 몸부터 단련하려 드는 마법 생도는 처음이었다.

‘설마? 아까 연구 일지에 제멋대로 휘갈긴 그 회로도가 제대로 된 조언이었다구?’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게리엘도스 교수님의 반응이 워낙 남달랐기에 아예 가능성이 없어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내젓는 아드레나.

‘말도 안 돼. 그건 교수님께서 2년이 넘도록 매달린 연구야. 그럴 리가 없어.’

한 번 스윽 본 것만으로 2년 동안 교수님을 괴롭히던 난제를 단숨에 해결해 준다?

세상에 그런 천재는 없다.

아니, 마탑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이 아카데미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당장 게리엘도스 교수님의 포커싱 마법에 아무런 마력도 포착되지 않았다.

그런 자의 재능이라고 해 봤자 뛰어난 마나 감응력 정도가 전부라는 뜻.

관찰까지가 임무였지만 선배 생도로서 작은 조언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아드레나가 비틀거리는 루인에게로 다가갔다.

“저어, 지금 뭐 하시는 거죠?”

“허억허억……!”

흐릿해지는 의식, 기울어져 가는 초점을 간신히 부여잡고 루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후우우…… 보면 모르나……?”

철퍼덕.

결국 열두 바퀴가 한계.

루인이 그대로 운동장에 쓰러지자 그의 위로 가느다란 그늘이 졌다.

아드레나가 아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어, 무등위 마법 생도의 생활은 절대로 만만하지 않거든요? 아직 시즌 전이지만 이렇게 의미 없이 체력을 써 버린다면 정작 수업 때 견디지 못할 거예요.”

“……의미가 없다고?”

예의 비틀린 웃음이 루인의 입가에 떠올랐을 때 아드레나의 친절한 목소리가 조금은 고양되었다.

“마법사의 마력은 정신에서 나온답니다. 그런 지친 몸으로는 절대로 정신을 가눌 수 없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루인이 가슴을 움켜쥔 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 달려 보지 않았군.”

아드레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는 마법 생도 생활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업, 조별 과제, 마나 강화, 염동 수련, 심상 수련, 언령 개화, 회로 개발, 술식 논증. 더 말해 드릴까요?”

“…….”

“거기에 마법 외적으로 머리 아픈 일들도 수두룩하죠. 생도들과 부딪히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감정 소모, 파벌들끼리의 피곤한 견제. 거기에 교수님들이 소속된 학파에 따라 눈치도 살펴야 하고, 그런 괴팍한 교수님들의 짜증도 견뎌야 하고. 아 말하고 나니까 또 열받네.”

루인은 그저 빙긋이 웃고 있었다.

마법을 배우는 자가 저리도 머리가 복잡하니 그 안에 마도(魔道)의 깨달음이 들어서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달려 본 적이 있는가를 물어보는데 이상한 대답을 하는군.”

“아니, 대체 학부 생활과 달리기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냐고오!”

루인이 말없이 웃고만 있자 아드레나가 더욱 크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체력 소모 외에 달려서 뭘 얻을 수 있는 거죠? 항시 말끔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마법사의 기본이라는 것도 모르면서 마법학부에 입학한 건가요?”

“정신.”

“에, 뭐어?”

말끔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헛되이 체력을 낭비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데 그런 정신을 얻을 수 있다니?

“이, 이……!”

“달려 보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테니 궁금하면 내일부터 함께 달려 보든가.”

아드레나는 코끝을 찡그린 채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선배의 진심 어린 충고를 한 귀로 흘려버리는 녀석에게 더 이상 해 줄 조언 따윈 없었다.

“크으…….”

힘겹게 일어난 루인이 태연한 얼굴로 아드레나를 바라본다.

“밥은 어디서 먹지?”

“흥.”

다시 일지를 꺼내 들며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는 아드레나.

『철이 없음.』

게슴츠레하게 왕국을 엿보던 태양이, 노을과 함께 눈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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