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48화 (48/187)

<48화>

아버지와 데인, 유카인과 소에느를 제외한다면 자신이 아카데미에 왔다는 사실은 가문에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고고한 기사의 신념으로 똘똘 뭉친 아버지나 유카인 삼촌이 대공자의 편의를 봐 달라는 청탁을 한다?

하물며 가문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마법사의 맹세.

이것 역시 그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안경잡이 빨간 머리 소녀가 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지를 루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나 동명이인이라도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드레나의 호명에 반응한 사람은 자신 하나뿐이었다.

“저어, 루인 라이언 씨 맞죠?”

‘라이언……?’

아드레나의 질문에 루인은 또다시 멍하니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보통 노예나 방랑자가 아닌 정상적인 영지민이라면 해당 영주가 하사한 성을 따른다.

라이언은 베른 공작령에 속한 영지민의 성(姓).

이로써 명확해졌다.

자신이 베른 공작령에서 왔다는 사실은 가족이 아니라면 그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마탑의 늙은이들이군.’

조금은 의문이 풀리자 루인은 겨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헤아리지 못하는 변수란 그야말로 질색이었으니까.

“내가 맞긴 한 것 같은데.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군요.”

아드레나가 안경을 고쳐 쓰며 다시 명단을 확인했다.

“어…… 베른 공작령에서 온 보결 생도는 루인 씨밖에 없는걸요?”

“…….”

루인이 별다른 반응 없이 묵묵히 입을 다물자 아드레나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슈리에에게 키를 건넸다.

“저어, 슈리에 님. 여기 이거 받으세요.”

슈리에가 키를 받아 들자 다시 말을 이어 가는 아드레나.

“그건 제 기숙사 키예요. 무등위 생도의 기숙사보단 훨씬 시설이 괜찮거든요.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시면 될 거예요. 저어…… 리리아 님?”

리리아는 여전히 분수대 옆, 비스듬히 벽에 기댄 채로 흘깃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슈리에 님과 함께 제 방을 쓰시면…….”

관심 없다는 듯 리리아가 다시 책을 향해 고개를 파묻었다.

슈리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당신은요?”

싱긋.

“전 게리엘도스 교수님의 조교라서 굳이 기숙사가 아니더라도 지낼 곳이 많아요. 힛.”

이어 아드레나가 분수대 옆에 있는 조각상에 다가갔다.

또깍. 또깍.

유려하게 뻗어 있는 조각상의 가냘픈 손 위로 예닐곱 개의 명찰을 올려놓는 아드레나.

“나머지 분들은 여기 명찰을 찾아가세요.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묵게 될 기숙사가 명찰에 기재되어 있어요. 귀찮은데 오리엔테이션은 생략해도 괜찮겠죠?”

예비 마법 생도들이 하나같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넵! 선배님!”

“모두 숙지하고 왔습니다!”

예비 마법 생도들에게 3등위 마법 생도는 그야말로 까마득한 선배였다.

3등위라면 적어도 그녀가 3개의 고리 이상을 이뤘다는 뜻이었으니까.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아드레나는 홱 하니 몸을 돌리며 걸어갔다.

“루인 씨는 절 따라오세요.”

인상을 찡그리며 잠시 서 있던 루인이 아드레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아드레나의 걸음이 멈춘 곳은 한 교수 연구실의 앞이었다.

똑똑.

“교수님. 아드레나입니다.”

연구실의 명패를 확인한 루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학회에 참석했다는 교수의 이름이 버젓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와도 좋아.>

덜컥.

연구실에 들어온 루인은 교수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온갖 시약과 스크롤, 연구 일지 따위들이 책상 위에 산처럼 쌓여 있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아드레나가 조심성 있게 걸어가더니 어지러운 물건들을 책상의 귀퉁이로 스윽 옮겨 놓았다.

그제야 얼굴을 쏙 내놓는 게리엘도스 교수.

편집증으로 가득한 눈빛.

붙임성 따위는 없어 보이는 표정.

고집이 느껴지는 입술의 씰룩임.

며칠 동안 씻지도 않은 듯, 산발한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 게리엘도스 교수는 괴팍한 마법사의 영락없는 전형이었다.

“자네가 루인?”

질문하면서도 눈은 연구 일지에 가 있다.

루인은 귀여운(?) 교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와 버렸다.

교수를 향해 피식거리는 예비 마법 생도의 행위에 의문을 가질 법한데도, 게리엘도스 교수는 그저 가볍게 손을 휘저을 뿐이었다.

지잉-

그렇게 그가 수인을 맺자, 다차원의 도형들이 허공에 맺히더니 이내 뿌옇게 흩어지며 루인의 몸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마나의 세계에 잠긴 듯한 부유감.

삽시간에 자신의 내부를 휘젓고 다니는 이질적인 마력들.

상대의 마법적 역량을 알아보기 위한 집속 마력술식, 포커싱(Focusing)이었다.

노골적인 교수의 행동.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민 루인이 뭐라 입을 열 찰나.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황당하다는 듯한 게리엘도스의 표정.

루인이 지닌 마법의 역량을 확인하고 싶었다면 저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영계(靈界)는 물질계와 정신계 사이, 그 중간 지점에 존재한다.

루인의 마나홀은 소환하기 전까진 그런 영계에 있었다.

영계를 느낄 수 있는 초월 등급, 즉 8위계 이상의 마법사가 아니라면 루인에게 아무런 마력의 잔향도 살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재능이라도 뛰어난 건가?”

게리엘도스 교수의 그 말에 아드레나는 웃음을 참는 태가 역력했다.

그가 재능론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기 때문.

그는 인과의 향상성, 그런 정당한 대가를 신봉하는 전형적인 노력론자였다.

“…….”

루인을 더욱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게리엘도수 교수.

녀석은 여전히 비틀린 입매로 조소하고 있었다.

비틀린 웃음이 사람에게 어울리긴 참으로 어려운데 녀석에겐 제 옷처럼 어울렸다.

일말의 마력도 없는 놈이었지만, 왠지 저 비틀린 웃음을 바라보고 있자니 흥미가 식진 않았다.

그들이 주의 깊게 관찰하라고 했다면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테니까.

현자님을 비롯한 마탑의 초고위 마법사들.

분명 눈앞의 소년은 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존재였다.

휘릭-

게리엘도스 교수는 수인을 털어 내고는 아드레나를 향해 덤덤하게 말했다.

“3등위 마법 생도 아드레나. 나의 어여쁜 조교여.”

“어, 네? 왜 그렇게 불길하게 보고 계시죠?”

아드레나는 오한이 치밀었다.

괴팍한 게리엘도스 교수가 이렇게 느끼하게 자신을 부를 때면, 늘 무리한 부탁을 해 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

싱긋.

“오늘부터 우리 아드레나는 이 루인이라는 생도의 생활을 주의 깊게 관찰해 줬으면 좋겠네. 특이 사항이 있으면 모조리 기록하고. 아니 아예 녀석의 모든 행동을 빠짐없이 일지에 적어 오도록.”

“어, 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관찰 연구를 해 보지 않았나? 관찰 일지를 적듯이 말이야.”

아드레나는 더욱 황당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아니까 묻고 있는 거죠! 온종일 붙어 다니며 기록하라는 뜻이잖아요?”

“우리 어여쁜 조교가 이해했다니 다행이군.”

“제, 제 수업은 어떻게 되죠? 학점은요? 제가 준비하고 있는 논문은요? 게다가 제 사정도 뻔히 아시잖아요!”

이어지는 게리엘도스 교수의 대답에 아드레나는 멍하니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관찰 연구를 무사히 끝낸다면 마법학부 졸업장은 물론 입탑 증서까지 발급해 주겠네. 아 그리고 매달마다 600리랑의 보수도 추가로 지급하지. 더 문제 있나?”

4등위를 거치지 않고 졸업장을 수여한다고? 모든 학과 과정과 논문도 건너뛰고?

거기에 모든 마법사들의 꿈이요 비원인 입탑 증서(入塔證書)까지?

더 황당한 것은 매달마다 600리랑이라는 보수의 지급이었다.

그 정도면 교수의 본봉과 맞먹지 않는가?

“에…… 노, 농담이시죠?”

“이 정도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자네라면 눈치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네만.”

아드레나는 즉시 안경을 고쳐 쓰며 눈을 빛냈다.

교수의 권한으로는 결코 확언할 수 없는 입탑 증서.

거기에 교수의 본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급여까지.

‘마탑에서 건너온 임무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더 들어 볼 필요도 없었다.

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내팽개친다면 모두가 바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아드레나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하죠! 하겠습니다 교수님!”

“좋아!”

그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던 루인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보통 이런 은밀하고 역겨운 행위는 당사자 앞에서 하지 않는 것이 예의 아닌가?

“이런 지저분한 거래를 당사자의 눈앞에서 하다니 재미있는 분들이군요. 제가 협조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게리엘도스 교수가 비릿하게 웃으며 루인의 명찰을 바라본다.

이내 손을 내미는 게리엘도스.

“내 요구에 응하고 싶지 않다면 마법학부의 명찰을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

진득하게 입술을 깨무는 루인.

지금 이 순간에도 절망의 악제는 가파르게 역량을 키워 가고 있을 터.

한시라도 빨리 전생의 경지를 회복해도 불안한 마당이었다. 하지만 마탑의 협조 없이는 결코 전생의 경지를 회복할 수 없다.

‘으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현자 일행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그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필요성도 있었다.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준만큼의 정보만을 내어 준다.

어차피 자신의 마법에 담긴 미지(未知)에 몸이 달아 있는 쪽은 그쪽이니까.

피식.

“정말 고약한 교수님이군.”

루인은 눈을 감았다.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마인딩을 해 보니 교수의 선명한 의도가 그리 나빠 보이진 않는다.

적어도 자신의 뒤에서 일을 꾸미는 것보단 나았다.

이렇게 대놓고 친절하게 의도를 드러내 준다면 오히려 대응이 쉬웠으니까.

겉으로는 괴팍해 보이는 게리엘도스 교수였으나 그의 담백한 자존심과 직관적인 성격을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제법 마음에 드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흥이 일자 루인은 그에게 대마도사로서 작은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루인이 곧장 걸어가더니 책상 위의 연구 일지를 무심하게 바라본다.

괘씸한 애송이의 행동에 거칠게 화를 내려던 게리엘도스 교수가 이내 멍하게 굳어 버렸다.

곧이어 들려온 루인의 목소리에 사정없이 마음이 흔들린 탓이었다.

“수렴(收斂)이 불가능한 술식에 미련하게 매달리시는군요. 그 회로도는 가속이 아니라 확산(擴散)에 어울립니다.”

“뭐……?”

루인의 시선을 좇아 황급히 자신의 연구 일지를 바라보는 게리엘도스.

“미세 단위 저항값도 모조리 틀렸습니다. 누굽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회로를 연구랍시고 구현하려는 이가.”

“나, 난데?”

뚜벅뚜벅.

루인이 책상 위의 펜을 집어 든다.

이어 그의 연구 일지에 미세한 도형들이 제멋대로 그려진다.

“이, 이보세요! 무, 무슨 짓!”

감히 생도, 그것도 예비 생도 주제에 교수의 연구 일지를 더럽히다니!

아드레나는 어처구니없는 그런 루인의 행동을 다급히 제지하려고 했으나, 교수의 손에 제지당한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아드레나. 조용.”

휙휙.

루인이 아무렇게나 휘갈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게리엘도스의 눈은 점점 경악의 빛으로 커지고 있었다.

“약화된 마력을 길게 늘어놓는 시점에서 이미 가속은 힘을 잃었습니다. 당연히 플랫(Flat)을 다시 파형(Wave)으로 치환하고 싶다면 확산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치환 지점은 이곳, 그리고 이곳이죠.”

휙휙.

루인이 펜을 놓자, 그 즉시 게리엘도스는 심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새롭게 변형된 마력술식을 끈질기게 심상으로 추적하고 있는 게리엘도스.

부우우웅-

확산을 거듭한 마력이 임계점을 버티지 못하고 사방으로 힘을 뻗는다.

심상의 세계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아앙-

지난 세월 그토록 매달렸던 멀티 아레아 익스플로전.

그렇게 7위계를 이룩하기 위한 첫걸음.

그 간절했던 염원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완성되었다.

떨리는 마음을 겨우 추스르며 천천히 눈을 뜨는 게리엘도스.

“교수님이 베풀어 주신 작은 호의에 대한 제 화답입니다. 이것까지 마탑에 보고하고 싶진 않으시겠죠?”

게리엘도스가 미묘한 표정으로 표정을 굳혔다.

마탑에 이 일을 보고한다?

그 즉시 오랫동안 매달려 온 자신의 연구 성과는 모조리 루인이 가져가게 된다.

한데, 그것보다 더 의미심장한 말이 있었다.

“내가 베푼 호의라니? 이 게리엘도스가 자네에게 베푼 호의는 없네만.”

루인이 고아하게 목례를 하며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적어도 뒤통수치는 사람 같지는 않아 보여서요.”

철컥.

연구실의 문이 닫히고도 한참이 지날 동안 게리엘도스 교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게리엘도스.

“으하하하하! 정말 묘한 놈이군!”

그랬던 그가 금방 눈을 빛내며 아드레나를 향해 일침을 놓았다.

“지금 자네는 여기서 뭐 하는가? 어서 녀석을 따라붙지 않고?”

“에? 아, 아 넵!”

아드레나가 빨간 머리칼을 휘날리며 연구실 바깥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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