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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47화 (47/187)

<47화>

추천서에 기재된 입학 날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혼돈마의 꼬리 덕분에 꽤 일찍 도착한 것이다.

덕분에 루인은 여관을 잡고 간단히 식사를 한 후에 길거리로 나왔다.

‘그래. 기억이 나는군.’

멀쩡한 르마델의 왕성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루인은 감회가 새로웠다. 과연 오랜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 무식하게 얽혀 있는 길들도 그대로야.’

기본적으로 르마델 나이트 캐슬은 거대한 산비탈을 통째로 깎아 만든, 오직 수비만을 위해 축조된 성곽.

덕분에 성의 내부는 매우 비좁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극악의 인구 밀도와 함께 시너지를 일으켰다.

수많은 상점들 사이로 계단길이 미로처럼 얽히고설켜, 초행길의 여행자라면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도시.

르마델 왕실이 수도성을 이런 무식한 방법으로 축조한 이유는,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절대 패자 ‘알칸 제국’ 때문이었다.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제국의 침략과 핍박을 힘겹게 견뎌 온 르마델.

절대적인 철옹성, 르마델 나이트 캐슬이 아니었다면 왕국은 이미 몇 번이고 멸망했을 터였다.

‘…….’

루인은 그런 왕성 내부의 전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거대한 제국조차 허물지 못한 이 철옹성을, ‘악제(惡帝)의 군단’은 고작 보름 만에 처참하게 부숴 버렸다.

르마델 왕국이 자랑하던 철혈 기사단도 드높은 왕실 마탑도 군단을 막지 못했다.

사실 당시만 해도 루인은 왕국이나 가문에 대해 별다른 애착이나 감정은 없었다.

왕국과 가문의 멸망이 시작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살아 있는 모든 인간에게 닥칠 일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기 때문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전염병처럼 한순간에 대륙을 휩쓸어 버린 악제의 군단.

그 끔찍한 폐허 속에서도 군단과의 지옥 같은 전쟁은 백 년 이상 이어졌다.

‘남은 세월은…….’

군단이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이십여 년.

물론 어떤 이에겐 긴 시간일 수도 있겠으나 루인에게만큼은 찰나처럼 짧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안도했다.

가문으로부터 도망치고 도망쳐 도착한 어두운 할렘가.

음습한 지하실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던 과거의 자신은 이제 세상에 없었다.

그 모든 처절한 경험과 미래에 도래될 재앙들을 이 낡은 영혼에 낙인처럼 새기고 돌아왔다.

악제를 향한 호기심 때문에 자신에게 사악한 거래를 걸어왔던 쟈이로벨도 이렇게 벌써 세상에 나왔다.

그래서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달라질 미래를 위해 모두의 희생을 기꺼이 짊어졌다.

“후…….”

루인은 복잡한 옛 추억들을 떠올리며 미로와 같은 왕성 내부를 며칠 동안 더 유람했다.

여관의 짐을 정리한 후 왕성의 중심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

미로 같은 길거리를 벗어나자 드디어 밝은 햇살과 함께 시야가 확 트였다.

“저기군.”

하늘 끝 위로 솟아오른 두 개의 첨탑.

그런 거대한 두 첨탑 아래 고풍스러운 양식의 거대한 아카데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왕립 아카데미야말로 르마델 왕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진정한 국력의 산실.

단지 외부 전경만 살펴봤을 뿐인데도 이 왕국이 얼마나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루인이 왕실 아카데미의 경비병에게 입학 추천서를 보여 주자 육중한 아카데미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쿠웅-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몇몇 시선이 루인에게 모였다가 흥미가 식었는지 이내 흩어졌다.

루인은 홀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담소를 나누고 있는 예비 생도들을 무심하게 훑고 있었다.

“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비탄의 비수’군요! 정말 영광입니다!”

“이걸 알아보다니 그대의 견문도 보통은 아니군.”

“미스릴제 보검 중에서도 최고의 명성을 지닌 검이 아닙니까? 게다가 이게 어디서 나온 물건인지도 저는 잘 알고…….”

“쉿. 조심해. 여긴 아카데미야.”

“아, 그, 그렇군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

유심히 그들을 관찰하던 루인의 얼굴이 점점 험악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자신과는 달리 푸른 스크롤을 손에 쥐고 있는 저 소년들은 기사학부의 예비 생도.

넓은 홀에는 붉은 스크롤을 손에 들고 있는 마법학부의 예비 생도들보다 푸른 스크롤의 기사 예비 생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그 늙은이는?’

여기저기서 귀족인 태를 드러내려고 안달인 예비 생도들.

귀족가의 애송이들이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을 때는 서로 금칠을 해 대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을 쓴다.

그렇게 루인은 현자 에기오스와 했던 맹세가 얼마나 무의미한 짓이었는지를 아카데미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가만?’

그제야 루인은 예비 생도들의 스크롤에 찍힌 인장의 색 대부분이 노란색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인장의 모양을 좀 더 주의 깊게 관찰하는 루인.

‘……렌시아?’

이제 보니 그 노란색 봉인에 찍혀 있는 문양이 하이렌시아가를 상징하는 불새(Phoenix)의 모양이 아닌가?

점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루인.

지금은 아카데미의 정기 입학 시즌이 아니다.

그럼 여기에 모인 예비 생도들이 전부 보결 생도라는 뜻인데…….

그런 보결 생도들 대부분이 르마델 제일의 권력가인 렌시아가의 추천을 받고 왔다?

‘하…….’

그 말은 이들 대부분이 렌시아가와 친분을 맺고 있는 귀족이거나 최소한 렌시아가에게 줄을 댈 수 있는 유력자들의 자식이라는 뜻.

‘그래. 그럼 그렇지.’

사실 에기오스의 요구는 처음부터 의아한 것이었다.

어린 소년들의 권력 질서는 오히려 성인들보다도 더욱 철저하고 원시적이다.

이곳 아카데미까지가 저들이 겪은 세계의 전부이기 때문.

목숨을 내놓고 벌이는 처절한 권력의 진창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에 서툰 욕망을 감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늙은이.’

루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 귀족의 신분을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는 아카데미의 원칙은 그저 위계 체계를 확립시키기 위한 명목에 불과했다.

식사 예절만으로도, 아니 고아한 말투만으로도 드러날 귀족의 정체, 그것이 바로 왕립 아카데미의 적나라한 현실.

한데 현자 에기오스는 이렇게 너도나도 드러내고 있는 귀족의 정체를 왜 자신만 드러낼 수 없게 만들었을까?

대공자까진 아니더라도 하이베른가 출신이라는 것만 밝혀도 대부분의 귀찮은 일을 막을 수 있었다.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선배 생도들이다!”

“3등위 생도!”

여러 명의 생도가 이쪽으로 걸어온다.

그들의 어깨 위.

견장을 수놓고 있는 세 개의 푸른 매듭을 모든 예비 생도들이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귀여운 예비 생도들을 바라보며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히죽거리고 있는 기사 생도들.

그런 그들을 이끄는 가장 선두의 생도, 멋들어진 금발의 청년이 절도 있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척!

“3등위 기사 생도 유레아스다. 하울 어커드 교수님은 외부 출장 중이시다. 대신 내가 너희들을 인솔할 것이다.”

그때, 그들의 반대편에서 또 다른 생도가 걸어오고 있었다.

또깍. 또깍.

붉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소녀 생도.

어깨 위에 매달린 세 개의 매듭은 같았으나 그녀의 견장은 붉은색이었다.

마법학부의 3등위 생도.

“3등위 마법 생도 아드레나예요. 학회에 참석하신 게리엘도스 교수님 대신 그대들을 인솔할 거예요.”

루인은 의아했다.

이렇게나 많은 보결 생도들이 입학하는 자리에 이들을 인솔할 교수들이 동시에 나타나지 않을 확률?

그런 묘한 위화감이 감돌자 루인은 더욱 불쾌해졌다.

그때 기사 생도 유레아스가 ‘비탄의 비수’로 잘난 척을 늘어놓던 예비 생도를 향해 다가갔다.

이내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아카데미에 오신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분부대로 조치를 끝냈습니다. 반년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반년이야. 그 정도면 우리 늙은이도 화를 풀겠지.”

“가시죠.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하하! 그래!”

금방 허리를 편 유레아스가 모든 예비 기사 생도들에게 소리쳤다.

“호명된 예비 생도는 모두 따라온다! 후르켈! 미온! 하그웰! 스티아! 머레이……!”

호명된 이들은 서로를 향해 금칠을 늘어놓던 귀족 예비 생도들.

이어 유레아스가 남은 예비 기사 생도들을 향해 명찰을 촤르르 뿌렸다.

“각자의 명찰을 찾아 가슴에 달도록. 묵게 될 기숙사도 명찰에 함께 기재되어 있으니 알아서 찾아가도록 하라.”

“예!”

“넵! 선배님!”

한눈에 노골적인 상황을 파악한 루인은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3등위 기사 생도들을 따라간 예비 생도들이 앞으로 어떤 특혜를 받게 될지 너무나 눈에 선하다.

기사 생도 무리들이 모두 홀을 빠져나가자 3등위 마법 생도 아드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혹시 ‘리리아’라는 분은 어디에……?”

그녀의 말에, 홀의 중앙 분수대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소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유치한 짓 하려거든 그만해. 난 저 무식한 놈들처럼 고작 골목대장 놀이를 하려고 아카데미에 들어온 게 아니니까.”

“저어, 그래도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인데…… 1년이라고 하셨죠?”

“아니. 난 졸업까지 끝낼 거야.”

“어, 그러면 조금 곤란한데에…… 계약대로라면…….”

“그딴 계약은 내가 한 게 아니잖아.”

안경을 매만지며 코끝을 찡그리던 아드레나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슈리에 씨?”

루인의 두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녀의 입에서 익히 아는 이름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네. 저예요.”

그동안 무슨 낭패라도 겪었는지 슈리에는 의복도 여기저기 지저분했고 얼굴도 지쳐 보였다.

“슈리에 씨도 1년이시네요. 잘 부탁해요.”

“네. 저도.”

악수하며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그 모습에 그제야 루인은 이 빌어먹을 상황을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보결 생도들은 렌시아가와 친밀한 귀족가, 혹은 부유한 상인들의 자제들.

그런 귀족가 자제들 중에서도 어른들의 눈 밖에 난, 한마디로 저들에게 아카데미는 도피처, 혹은 유배지인 것이다.

르마델 왕국의 아카데미가 고작 사고 친 귀족 애새끼들의 유배지라니!

‘그럼 저놈들이 계약 운운한 것도 다 설명이 되는군.’

귀족가의 자제들에게 일정 기간 동안 편의를 제공하고 보수를 받는 일종의 아르바이트인 셈.

‘허, 그럼 교수들도?’

교수들이 하나같이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은 것도 이 상황을 미리 알고 묵인했다는 뜻이 아닌가?

‘아카데미까지 썩어 버렸다니…….’

지식의 요람, 왕립 아카데미마저 이 정도로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니.

루인은 이 모든 일이 렌시아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예비 생도들의 스크롤에 찍힌 노란 문양.

더러운 이권의 냄새, 그 고약한 욕망의 잔향에 루인은 으스러지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런데.

“어, 그 다음은…… 루인 씨?”

“뭐?”

루인을 알아본 슈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랐다.

“앗! 당신은?”

멍하니 굳어 버린 루인.

아드레나가 왜 자신을 부르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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