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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46화 (46/187)

<46화>

마력 꼬리를 이용해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고 다니는 마계의 1등급 마수종, 혼돈마.

루인은 그런 혼돈마의 꼬리에 끊임없이 마력을 주입하고 있었다.

파아아앙-

엄청난 풍압에 의해 살갗마저 저릿해지는 감각.

활시위처럼 몸이 튕겨 나가자마자 수백 미터씩 공간이 삭제되고 있으니 사실상 점멸 마법에 준하는 위력이었다.

모든 지형지물을 무시한 채 왕성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고 있던 루인이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정말 엄청나군.’

전생의 경지를 회복하지 못한 지금의 상황에서 혼돈마의 꼬리는 엄청난 도움이 되는 아티펙트.

도보로 이동했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거리를 고작 사흘 만에 도착했으니 루인은 더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파아아아앙-

그렇게 몇 번 더 혼돈마의 꼬리에 마력을 주입했을 때 드디어 루인의 시야에 거대한 성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르마델 나이트 캐슬(Lemardel Knight Castle).

왕국의 심장을 감싸고 있는 그 육중한 성곽들은 르마델 왕실을 상징하는 청록빛으로 칠해져 있었다.

성문까지 기다랗게 이어진 인파의 행렬을 바라보던 루인이 특유의 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헬라게아. 혼돈마의 꼬리를 보관하겠다.”

스스스스스-

시커먼 공간의 틈이 아가리를 벌리자 루인은 미련 없이 혼돈마의 꼬리를 쑤셔 넣었다.

곧장 마력의 잔재를 털어 내는 루인.

-이렇게 많은 인간들은 오랜만이군.

커다란 짐을 이고 있는 상인들, 지친 여행자들.

지방의 하급 귀족과 신출내기 용병들, 형형색색의 유랑단 마차까지.

모두가 각자의 꿈을 안고 왕성에 입성하려 들겠지만 저들 중 대부분은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왕국의 모든 부(富)가 모이는 곳.

하지만 그 기회가 모두에게 돌아가진 않는다.

“이거 너무 오래 걸리겠는데.”

성문을 통과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입성 절차를 마치려면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굳이 고민할 필요가 있느냐? 혼돈마의 꼬리를 한 번 더 활용한다면…….

“왕성의 마법사들은 바보가 아니야. 마계의 강렬한 마기를 풍기고 있는 혼돈마의 꼬리는 금방 추적당하기 십상이다.”

문득 루인은 혼돈마의 꼬리가 인간의 화폐 기준으로 얼마나 가치 있을까를 가늠해 보았다.

마력만 받쳐 준다면 점멸 마법을 무한대로 쓸 수 있는 셈. 역시 쉽게 돈으로 환산되지 않았다.

이런 엄청난 아티펙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된다?

고작 2위계의 경지로는 그런 끈질긴 탐욕을 감내하기가 버거웠다.

분명 아카데미에 도착하기도 전에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겪을 것이다.

‘음…….’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루인은 베른의 성을 내세울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이 벌써부터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루인은 기다란 인파의 행렬에 함께 섞였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비켜라! 비오웬 남작가의 영애이시다!”

말고삐를 쥔 하인이 눈을 부라리며 기다란 행렬을 물리고 있었다.

루인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쥐꼬리만큼이라도 권력이 있는 놈들은 이미 저만치 앞줄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태.

드센 권력가 사이에서는 숨도 쉬지 못하는 허약한 귀족이라도 이런 곳에서만큼은 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루인이 무심한 표정으로 비켜섰을 때.

비오웬 남작가의 말이 멈춰 섰다.

“너, 방금 왜 웃었지?”

루인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불러 세운 소녀를 바라보았다.

검붉은 눈동자.

풍성하고 아름다운 흑발.

‘북부인인가?’

분명 흑발은 북부인의 특성이었다.

북부의 귀족가 대부분은 하이베른가에 종속된 귀족들.

하지만 루인은 비오웬이라는 성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도도하게 치켜뜬 눈.

데인을 처음 봤을 때처럼, 그녀 역시 오만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루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란을 일으키기 싫었던 루인이 한 차례 목례를 하며 인파 속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비오웬 남작가 영애의 입에서 더욱 차가운 음성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거기 멈춰!”

말없이 뒤를 돌아보는 루인의 두 눈.

감정 한 점 일렁이지 않는 그 눈빛은 결코 귀족을 두려워하는 자의 눈이 아니었다.

남작가의 영애는 자신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 상대의 눈빛에 더욱 화가 났다.

차아앙-

“너, 분명 날 보며 비웃었어.”

소녀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자 그녀의 옷깃 사이로 붉은 스크롤이 삐죽 튀어나왔다.

금방 스크롤로 향한 루인의 시선.

스크롤의 중심에는 자신과 다른 노란색 인장이 찍혀져 있었다.

하지만 스크롤 자체는 자신의 것과 한 치의 다름도 없는 마법학부의 입학 추천서.

금방 루인의 머릿속에 기막힌 묘안이 떠올랐다.

씨익.

“별 웃긴 귀족 영애를 다 보는군. 고작 웃었다고 검을 뽑을 정도라면 대체 그동안 얼마나 많은 평민들을 괴롭혀 온 거지?”

“너, 감히 귀족가의 명예를……!”

루인이 가볍게 소녀의 말을 잘랐다.

“귀족이 말하는 명예란 대체로 모멸감을 뜻하지. 아무 감정에나 명예를 덧씌우는 것만큼 우스운 짓도 없으니까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

귀족의 명예를 모욕하는 것은 즉결 처분의 대상.

말에서 내린 비오웬가의 소녀가 루인의 목젖에 검을 갖다 댔다.

“감히 하찮은 유랑민 주제에!”

얼마나 먹지 못했는지 비쩍 마른 몸.

지독하게 낡은 로브, 흔한 장신구 하나 없는 행색.

분명 상대는 작은 요행을 바라며 떠도는 유랑민이 틀림없었다.

르마델 왕성은 자비를 구걸하는 유랑자들에게 이따금씩 호의를 베풀기 때문.

식은 빵 한 덩이에 영혼도 팔 수 있는 유랑자 주제에 감히 남작가의 명예를 모독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비오웬가의 소녀가 검을 사선으로 내려칠 찰나.

비오웬가의 하인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가씨.”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주인이 함부로 검을 휘두르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혼쭐을 내는 정도는 자신이 충분히 가능한 터.

“감히 비오웬가의 영애님을 능멸하다니.”

휘이익!

퍽!

하인이 내지른 주먹을 말없이 움켜쥐고 있는 루인.

‘이, 이렇게 쉽게?’

비오웬가의 하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법 몸을 단련한 자신의 주먹을 상대가 너무나도 쉽게 막아 버린 것이다.

루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로브의 품을 뒤져 자신의 붉은 스크롤을 꺼냈다.

“어……?”

순간 비오웬가의 소녀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저것은 틀림없는 아카데미, 그것도 마법학부의 입학 추천서.

게다가 스크롤을 봉인한 문양은 자신과는 달리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왕실의 추천이라고?’

새하얗게 웃는 루인.

“그대도 마법사가 되기로 했다면 마법사들의 위계 체계를 모르지 않을 텐데.”

마법사들의 위계는 귀족가의 작위나 명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의 위계는 오로지 마법의 경지로 증명해야 하는 것.

루인이 소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비록 예비 생도라도 아카데미의 일원. 세속의 신분을 활용하여 같은 생도를 핍박했다면 그건 반드시 퇴교 사유가 되지.”

“아……!”

눈을 휘둥그레 뜬 비오웬가의 소녀를 향해 루인이 연신 자신의 스크롤을 흔들고 있었다.

그렇게 소녀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을 때 루인의 쐐기와 같은 목소리가 다시 그녀에게 박혔다.

“더구나 같은 예비 생도라면 위계도 동등하지 않은가.”

경악한 얼굴이 된 비오웬가의 소녀.

큰일이었다.

당장 상대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도 이미 주변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아진 이상 최대한 일을 조용하게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게 뭐니?”

“이름.”

상대가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비오웬가의 소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슈리에 루시느 비오웬.”

“좋은 이름이군.”

루인이 스스럼없이 걸어가 말고삐를 쥐더니 이내 전방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비오웬 남작가의 영애 슈리에 님의 행차시다!”

루인이 자신의 이름을 대놓고 외치자 슈리에의 얼굴이 금방 흙빛으로 변했다.

아카데미에 이 소식이 흘러들어 간다면?

입학하기도 전에 귀족의 신분부터 내세운 예비 생도라며 모두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것이 너무나 뻔했다.

“하, 하지 마!”

황급히 루인이 쥐고 있던 말고삐를 빼앗은 슈리에가 작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그 입을 다물 거야?”

입술을 꼬옥 깨물며 자신을 바라보는 슈리에의 간절한 눈빛.

마치 지갑을 꺼내 전 재산이라도 건넬 기세다.

루인은 그런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말고삐를 빼앗았다.

“좋은 길잡이가 생겼는데 놓칠 수는 없지. 영애님, 다시 말에 오르시지요.”

이대로 행차한다면 적어도 비오웬 남작가보다 더 높은 위상의 귀족을 만날 때까진 앞지를 수 있을 것이다.

루인으로서는 저녁까지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 것.

금방 루인의 의도를 읽은 슈리에가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말에 올랐다.

루인이 비오웬가의 하인을 응시했다.

“당신은 성문을 통과하지 못해. 어차피 거기까지가 당신의 임무인 것 같은데 이쯤에서 돌아가도 좋아.”

“아, 아가씨…….”

머뭇거리는 하인을 향해 슈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해.”

지금은 최대한 그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보는 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루인이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하인을 한 차례 훑더니, 입가에 묘한 미소를 흘리며 말을 몰기 시작했다.

금방 주변의 소란이 잦아들고 다시 행렬이 분주해졌다.

사람들은 귀족가의 일에 함부로 관심을 갖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소변을 보고 왔소! 어이 당신도 봤잖아?”

“난 잘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붐비는 만큼 여기저기서 시비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남작가 영애의 행차 앞에서는 모든 시비가 무의미한 일.

루인이 귀족들이 모여 있는 가장 선두에 도착하기까진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척!

“출신과 이름을 말하라 소년.”

기다란 창을 사선으로 늘어뜨린 채 루인의 발길을 막아선 경비 기사.

왕성의 출입을 담당하는 경비 기사의 눈에 루인은 영락없는 유랑민이었다.

“루인. 성은 없습니다. 파네옴에서 왔습니다.”

경비 기사의 눈빛이 금방 의심쩍은 눈초리로 변했다.

성이 없다는 것은 고아나 노예란 뜻.

“방문 목적을 말하라.”

루인이 묵묵히 로브의 안주머니를 뒤져 추천서를 꺼내 들었다.

“아카데미로 가는 길입니다.”

추천서를 감싸고 있는 선명한 봉인(Seal)을 확인한 경비 기사가 낯빛을 달리했다.

대체로 추천서를 들고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생도들은 신분이 남달랐다.

더구나 그 봉인은 왕실을 상징하는 청록색 드래곤의 문양.

그것은 이 소년이 지닌 재능의 비범함을 알아본 주체가 왕실이나 그 직속의 마탑이라는 뜻이었다.

결코 흔하지 않은 일.

경비 기사가 창날을 회수하며 빙그레 웃었다.

“예비 생도로군. 르마델의 왕성에 온 것을 환영하네.”

“감사합니다.”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듯,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고삐를 놓으며 성문 안으로 걸어가는 루인.

슈리에가 그런 루인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말에서 내려왔다.

“여기, 저도 아카데미 추천서예요!”

경비 기사에게 서둘러 추천서를 내보이며 금방 성문 안으로 진입한 슈리에.

“와……!”

시끌시끌.

시야가 닿는 끝까지 이어진 온갖 행색의 인파들.

슈리에는 그런 거뭇한 인파 사이로 막 섞여 드는 루인을 발견하고서 황급히 소리쳤다.

“야! 너!”

한 차례 바라만 볼 뿐, 흐릿하게 미소 짓던 그가 금세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갔다.

말고삐를 쥔 채 그대로 얼어 버린 슈리에.

그녀는 이 왕성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당장 아카데미가 어느 쪽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내 슈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얼굴에 드러냈다.

“뭐 저런 인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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