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저주받은 괴물을 죽여라!>
느릿하게 자신의 발을 보았다.
엄마와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이 빌어먹을 족쇄.
마을 사람들의 고함 소리는 더욱 가깝게 들려오고 있었다.
<모두 그 괴물 놈 때문에 일어난 재앙이다! 놈을 죽여라!>
<수인족과 붙어먹은 년도 함께 죽여라!>
“……시르하.”
“엄마!”
짓눌린 엄마의 목소리.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엄마의 눈,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던 그 음울한 눈빛에서 갑자기 거센 불꽃이 일렁인다.
악착같이 이를 깨물며 남아 있는 투기를 모두 끌어올린 엄마.
그렇게 엄마의 발이 걸레짝처럼 짓이겨졌다.
꽈직!
꽈드득!
“어, 엄마……?”
뼈를 드러내기 시작한 엄마의 발목.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진다.
터져 버릴 것 같은 감정이 폐부로부터 끓어올라 이내 토해졌다.
“안 돼! 무슨 짓이야―!”
그렇게 수없이 절망으로 소리치고 외쳐 봐도 엄마의 잔인한 자해는 끝나지 않았다.
꽈지직-
엄마는 마침내 스스로 양발을 끊어 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기어가던 엄마가 테이블 위의 고문 도구 중 하나를 힘없이 던져 왔다.
툭-
발밑에 떨어진 절삭용 톱을 멍하니 바라봤을 때.
“……황금 거인 산.”
점점 희미해져 가는 엄마의 눈빛.
“그곳에 네 아빠와 그의 일족이 살고 있단다…… 너는 족쇄를 끊어 내고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야 해.”
“흐윽…… 엄마…… 엄마의 발이…….”
“엄마는…… 네 아빠를 만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단다…….”
“마, 말하지 마!”
엄마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변해 가고 있다.
“괜찮아. 시르하. 엄마는 괜찮아…….”
“으아아아아―!”
* * *
“으아아아아!”
악몽에서 헤어난 시르하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헐떡였다.
“허억허억……!”
전신을 옥죄어 오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
동시에 어제의 기억이 파편처럼 머릿속으로 스며든다.
<괜찮다 시르하.>
‘누구……?’
아무리 애를 쓰고 떠올리려 해 봐도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크윽!”
처참하게 망가진 자신의 육체.
얼마나 주먹을 휘둘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분명 무의식의 경계 너머로 빠져들었을 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다.
자아를 유지할 수 없는 멸혼(滅魂).
그 옛날, 아버지가 수도 없이 강조하셨던 가장 경계해야 할 상태.
멸혼의 단계에서 살아남은 수인은 극소수였다.
더구나 인간의 몸으로 수인의 수련 방식을 흉내 낸다면 십중팔구 멸혼의 단계에서 죽게 된다.
‘그런데도 살아남은 건가…….’
밝아 오는 여명이 계곡을 비춘다.
시야가 닿는 모든 산자락에 지렁이 같은 자국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쓰러진 리렘 나무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투기가…….’
비록 육체는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으나 용솟음치는 활력, 거대한 투기가 내부에서 해일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아버지…….”
시르하의 두 눈이 거대한 황금 거인 산의 정상을 향해 있었다.
* * *
-네놈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이렇게 금방 떠나갈 거면서 그 먼 길을 되돌아왔단 말이냐? 전생의 인연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 정도면 충분해.”
루인은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물론 지금도 마음은 시르하의 곁에 남아 성장을 돕고 싶었다.
하지만 시르하의 삶, 그 처절함을 만난 순간 그 뜻을 접었다.
그의 삶에 이런저런 개입을 더한다면, 시르하가 이룰 불굴이 퇴색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 없이도 바람의 대행자로 성장할 무인.
자신의 개입으로 인해 시르하에게 오히려 악영향이 더해진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종족이 시르하를 지켜보고 있다고 했던가?”
-인간보다는 훨씬 맑은 영혼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강렬했지. 요정, 아니 수인족에 가깝겠군.
시르하는 수인의 강인한 육체와 따뜻한 인간의 마음을 함께 지니고 태어난 반인반수(半人半獸).
수인족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루인은 지금 시르하가 의식을 치르는 단계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에 의해 멸종 직전의 상황에 놓인 수인족은 결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아무리 시르하가 수인을 아버지로 두고 있어도 절반은 인간의 피.
시르하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에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힘내라. 시르하.’
그렇게 루인은 언제고 다시 시르하와 만날 날을 기약하며 길을 나섰다.
페이리스 마을이 아득해지자 다시 벨가노아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분 나쁠 정도로 질척거리는 늪지대를 견디며 나아가는 루인.
몇 차례의 야영을 끝마치고 벨가노아 숲을 빠져나올 무렵, 쟈이로벨이 영언이 다시 루인의 머릿속을 울려 왔다.
-뭐지? 이 익숙한 느낌은?
“음?”
급속도로 확장되는 마력 동화, 영혼에 직접 마력이 투사되는 듯한 농밀한 감각.
루인 역시 소스라친 눈빛이 되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천천히 하강하고 있는 공간 왜곡장.
사방으로 흘러나오는 진마력, 그 익숙한 감각에 루인이 멍하게 굳어 버렸다.
“헬라게아……?”
-나의 헬라게아가 왜 인간계에!
쟈이로벨의 의뭉스러운 외침.
헬라게아.
쟈이로벨의 마법 공간.
마계에 있어야 할 마신의 보물 창고가 왜 머나먼 인간계에 나타났단 말인가?
오랜 세월 마신 쟈이로벨의 진마력으로 빚어 창조된 헬라게아는 분명 초월적인 아티펙트였다.
그러나 아무리 헬라게아라고 해도 차원을 넘나들 수는 없었다.
그때, 일의 전후를 깨달은 듯 루인이 눈을 빛냈다.
‘역시 그랬나…….’
쟈이로벨의 영혼 소멸로 헬라게아의 소유권이 사라졌다.
당연히 그 소유권은 쟈이로벨의 계약자에게로 이어진다.
쟈이로벨의 초월 마법, 그 시공간의 비틀림 사이로 자신과 함께 스며든 것이다.
화르르르르-
쟈이로벨의 불타오르는 강림체가 루인의 영혼을 빠져나와 현신한다.
호기심이 치민 쟈이로벨이 금방 헬라게아를 향해 자신의 의지를 투사했다.
<크흐흘! 날 알아보겠느냐 헬라게아!>
하지만 헬라게아는 마신의 의지에 화답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철저한 무시.
헬라게아는 그저 도도한 진마력을 뿌리며 허공에 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루인의 무심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헬라게아. 개방을 명령한다.”
스르르르-
시커먼 공간의 아가리가 틈을 벌렸다.
거뭇한 진마력 사이로 상상할 수 없는 너비의 마법 공간이 드러났다. 그 엄청난 영역에 막대한 마계의 보물이 그득했다.
흡족한 듯 웃고 있던 루인이 다시 헬라게아를 향해 명령했다.
“헬라게아. 모습을 감추어라.”
이내 입을 닫고 다시 비틀린 공간 속으로 스며드는 헬라게아.
<크윽! 설마……!>
“그래. 주인이 소멸하자 주인의 계약자에게 귀속된 거다. 내 영혼이 소멸하지 않는 한, 앞으로 이 헬라게아는 내 거라는 뜻이지.”
쟈이로벨의 얼굴이 더욱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주인의 소멸을 느낀 헬라게아가 비틀린 시공간을 통해 루인과 함께 도착했다면 분명 모든 것이 설명된다.
몇 달의 간격을 두고 도착한 헬라게아.
시공의 폭풍 속에서 루인과 헬라게아 사이에 미세한 시차가 발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로 넘어오는 순간 제법 긴 시차로 벌어지게 된 것.
<이런 개같은……!>
마신 쟈이로벨이 만 년 이상 모아 온 보물들.
저 공간 마법 속에 들어 있는 마계의 보물들 중 평범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단 하나만 인간계에 드러난다고 해도 분명 아수라장이 될 터.
하지만 무엇보다 화가 나는 것은.
<그럼 도대체 내 헬라게아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마계의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진짜 헬라게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쟈이로벨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마계의 헬라게아를 소환하는 순간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어쩌면 초월 마법이 붕괴되어 내가 다시 차원의 경계 바깥으로 튕겨져 나갈 수도 있겠지. 아니면 둘 다 사라져 버리거나. 이론에 불과하지만 차원 충돌 현상을 배제할 순 없다.”
루인과 같은 흑마법의 지혜를 공유하고 있는 쟈이로벨은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이제 마계의 헬라게아는 열어 볼 수도 없는 계륵이 되어 버린 것이다.
헬라게아 없이는 결코 다시 대마신 므드라를 상대할 수 없었다.
<끄아아아아!>
처절하게 통곡하는 쟈이로벨을 향해 루인이 천연덕스럽게 위로를 건넸다.
“걱정 마. 내가 잘 써 줄 테니까.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군.”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절대적인 성능의 아티펙트들만 해도 수십 개였다.
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가 생존했던 ‘빛의 시대’에나 볼 수 있었던 전설적인 아티펙트들.
그것들과 견준다 해도 결코 모자람이 없는,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의 권능을 지닌 아티펙트들도 존재했다.
루인은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쓸모 있는 것을 금방 추려 냈다.
“헬라게아. 혼돈마의 꼬리를 꺼내라.”
스르르르-
시커먼 공간 아가리가 토해 낸 자줏빛 꼬리.
루인은 아직도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혼돈마의 꼬리를 흡족한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
<너 이 새끼! 잘도 그걸……!>
그렇게 루인은 절대마수, 혼돈마의 꼬리를 흔들어 보이며 쟈이로벨을 향해 웃었다.
“안 들어와? 아니면 혼자 간다.”
<…….>
쟈이로벨의 강림체를 바라보며 금방 미간을 구기는 루인.
저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마신의 얼굴로 울 것만 같은 표정도 지을 수 있다니.
<대체 혼돈마의 꼬리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루인이 피식 웃었다.
“차원의 거품 안에서 그 긴 시간 동안 너와 내가 뭘 했을 것 같냐?”
<…….>
“주절주절 잘도 늘어놓더군. 난 너의 모든 것을 다 알아. 단 하나도 빠짐없이.”
루인이 다시 헬라게아의 마법 공간을 닫으며 음침하게 웃었다.
“네놈의 업적을 다 알고 있으니 네가 차지한 마계의 보물도 빠짐없이 아는 거지.”
<하, 함부로 사용하지 마라. 몇몇 것들은 인간계의 인과율을 크게 벗어난다. ‘존재’들이 인식하지 못할 리가 없다. 놈들의 이목을 받는다면 네놈의 행동에도 큰 제약이 따른다.>
“일단은 그래야겠지. ‘존재’들이 모두 소멸하기 전까진.”
<뭐? 소, 소멸?>
인간계를 관장하는 초월자들, 인간들에게 신으로 불리는 그 ‘존재’들이 소멸한다고?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존재’들의 소멸이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태초신이 강림하기라도 한단 말이냐?>
“내 전생과 똑같이 흘러간다면.”
순간, 루인의 두 눈에서 처절한 빛이 흘러나왔다.
“‘존재’들은 모두 놈의 손에 완벽히 소멸된다.”
<뭐……?>
그대로 굳어 버리는 쟈이로벨.
자신이 마신의 본체를 소환한다고 해도 ‘존재’들과의 승부는 쉽게 장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태초신의 역량을 나눠 받은 존재.
그중에서도 ‘알테이아’는 드래곤을 수도 없이 거느린 인간계의 절대적인 주신(主神)이다.
알테이아의 신력을 직접적으로 상대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는 마계가 인간계를 직접적으로 도모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였다.
한데 그런 알테이아를 비롯한 세계의 주시자들을 모두 소멸시키다니! 그것도 인간이?
<놈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 봐라. 놈의 이름은 뭐지?>
“모른다.”
까드득.
이를 갈며 새어 나온 루인의 억눌린 음성.
“놈은 언제나 짙은 먹구름과 함께 나타나 자신을 진면목을 감추었다. 그저 인간들은 그를 절망의 악제라고 불렀지.”
절망의 악제(惡帝).
‘그’의 이명이 루인의 입에서 최초로 흘러나온 순간.
그대로 쟈이로벨은 전율했다.
거대하게 일렁이기 시작한 루인의 증오심이 벨가노아 숲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