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힘겹게 벨가노아의 숲을 빠져나온 루인이 바람의 마을, 페이리스에 도착했다.
그의 눈앞에 가장 먼저 펼쳐진 것은 산양들과 함께 뛰어노는 아이들의 무리였다.
바람개비를 손에 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소년들.
들판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함께 웃고 있는 소녀들.
시르하가 지켜야만 했고, 우리가 살렸어야 할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모두 눈앞에 있었다.
계속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지금 이 순간이 재앙 이전의 과거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시선이 닿는 순간 모두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평화.
지난 생 내내 꿈꿔 왔던 환상.
“후…….”
루인이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어 차오르는 슬픔을 억눌렀다.
그러나 제멋대로 헝클어지기 시작한 감정을 끝내 가다듬을 수는 없었다.
이건 놈을 죽이고 난 후의 평화가 아니었다.
자신과 동료들이 지키고자 했던 평화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건 그저 재앙 이전의 거짓 평화일 뿐.
어느덧 루인의 가슴에 차가운 감정이 무겁게 나락졌다.
내가 왔으니까.
이 흑암의 공포가 돌아왔으니까.
이제 놈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거대한 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짐이라기보단 선언에 가까웠다.
한 인간의 의지라기보단 절규에 가까웠다.
핏물을 삼키며 견딘 억눌림에 가까웠으며, 죽음 속을 걸어 나온 자의 비명에 가까웠다.
비틀리고 메마른 증오.
그렇게 잿빛처럼 어두운 루인의 감정들이 혈주마공의 기운으로 어지럽게 흘러나왔을 때.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졌다.
“어어! 양들이! 얘들아 어디 가!”
“꺄아아악! 잡아!”
거칠게 날뛰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산양들.
루인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하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어? 여행자 형아다!”
“이방인!”
낯선 이를 향한 경계와 호기심을 함께 드러내는 아이들.
루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런 아이들을 바라본다.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겠니?”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아이는 맑은 눈망울이 인상적인 큰 덩치의 소년이었다.
“돌아가라! 촌장님은 이방인을 경계하라고 했다!”
챙이 넓은 모자, 널따란 판초, 허리춤에 매달린 무거운 사냥돌, 손에 들고 있는 가죽 채찍까지.
아마도 이 녀석이 일대의 목초지를 지키고 있는 가우초(Gaúcho)일 것이다.
아직은 목동 정도로 보이는 나이였지만, 가우초의 복식을 하고 있는 점이 기이했다.
루인이 로브의 소매를 보이다가 이내 한 바퀴를 돌았다.
“난 무기가 없다. 너희하고 나이도 얼마 차이 나지 않아.”
“그래! 그냥 여행자 형아야!”
“너무 말랐어! 배가 고파 보여!”
아이들이 가우초의 복식을 한 소년에게 달려들며 핀잔을 줬다.
하지만 가우초 소년은 아이들의 책임자답게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어느 마을에서 왔지?”
“파네옴.”
그제야 마음이 풀어진 듯한 가우초 소년.
이내 그가 작게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파네옴 광산의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우리 마을은 유랑민을 받아 주기엔 너무 가난하다. 넌 우리 마을이 아니라 베른 공작령으로 갔어야 해.”
“난 이 마을에 정착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럼?”
루인이 휘몰아치는 바람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 황금 거인 산을 조용히 응시했다.
“……친구를 찾고 있다.”
“친구? 그게 누구?”
생전 처음 보는 이방인.
그런 이방인의 친구가 어째서 우리 마을에?
가우초 소년은 오히려 더욱 미심쩍다는 눈초리로 루인의 위아래를 훑고 있었다.
“시르하.”
순간.
“시르하……?”
“그 괴물 녀석의 친구라고?”
하나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더욱 루인을 경계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의 급작스런 반응에 루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시르하가 괴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불길한 시르하!”
“저주받은 시르하!”
아이들이 저마다 불같은 감정을 토해 내며 방방 날뛰고 있을 때, 가우초 소년도 루인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 왔다.
“황금 거인 산의 저주를 받은 놈이다! 그런 저주받은 놈의 친구라니 썩 꺼져라!”
“뭐……?”
갑자기 루인에게 달려들어 아우성치는 아이들.
루인은 아이들의 그런 거친 반응에 당황하면서도 내내 머릿속에선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시르하가 무슨 저주를…….’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동료들의 마음을 한없이 편안하게 해 줬던, 그야말로 바람 같은 미소를 지닌 시르하였다.
그의 따뜻한 마음은 오히려 성녀보다도 아군에 더욱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순간 루인은 갑작스럽게 옛 추억이 떠올랐다.
최후의 전장, 테네브리가 성.
화염에 휩싸인 진지를 박차고 나온 시르하가 자신을 향해 무심코 던졌던 말.
허무한 감정에 짓눌린 듯, 지독하게 떨려 왔던 그의 목소리.
<그때 누가 날 안아 줬다면, 괜찮다고 한마디만 해 줬다면…….>
<루인…… 이 내가…… 이 시르하가 모두를 살릴 수 있었을까.>
루인의 음울한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페이리스 마을을 향했다.
바람을 닮았던 녀석을, 시르하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 보고 싶었다.
* * *
시르하가 있는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르하라는 이름을 꺼냈을 때, 마을 사람들 모두가 불길한 눈으로 계곡 깊숙한 곳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저벅저벅.
계곡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싯누런 리렘 나무들은 더 빽빽해졌다.
이 거대한 산이 황금 거인 산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쏴아아아아아-
또다시 몰아치는 계곡 돌풍.
황금빛 나뭇잎들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루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갑자기 걷기가 힘들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는 이 바람이 왜 황금 거인의 기침이라고 불리는지 루인은 곧바로 이해했다.
그때 굉음이 들려왔다.
콰아아앙-
계곡 전체를 울려 오는 강력한 타격음.
곧장 저 멀리 육중한 리렘 나무 하나가 천천히 기울어지며 기다란 비명을 질러 댔다.
꽈지지지직!
동시에 밀려오는 강력한 투기 파장!
루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사방을 옥죄어 오는 투기를 느끼자마자 깨달았다. 녀석이 이 계곡에 있다는 것을.
“…….”
빠르게 산을 오르던 루인이 멈춰 섰다.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그대로 얼어붙고 만 것이다.
온갖 기괴한 형태로 쓰러져 있는 리렘 나무들.
까마득한 정상까지 뻗어 있는 직선로, 마치 케이크에 팬 자국 같은 일직선의 공터.
루인의 흔들리는 시선이 만신창이가 된 리렘 나무들을 훑었다.
처참하게 우그러진 자국들에는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이건 수련이 아니었다.
한눈에 느낄 수 있는 증오였다.
루인이 거친 수풀을 헤집으며 정신없이 정상부에 다다랐을 때.
녀석이, 시르하가 서 있었다.
“…….”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
음산하게 드러난 시르하의 두 눈은 마치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상처받은 증오심 같기도, 메마른 허무함 같기도 했으나 어느 쪽이든 루인은 처참하게 가슴이 아려 왔다.
입을 열어 그 아픔을 물어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의식은 선명하지 않았다.
흐트러진 호흡,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투기.
서 있기조차 힘든 상태로 오직 의지만으로 저렇게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그랬구나. 시르하.’
네 웃음은 이 모든 걸 견디고 난 후에야 그렇게 찬란히 피어났구나.
형편없이 떨리고 있는 저 몸으로, 수도 없는 감정의 사선을 견디고 견뎌, 모든 것이 흐릿해지고 나서야 그렇게 환하게 웃었던 너구나.
루인은 그저 웃어 주었다.
오랜 세월, 그 처절한 절망을 견디며 이렇게 시르하 앞에 섰지만, 자신은 그저 웃는 것밖에 해 줄 것이 없었다.
“왜…… 웃는…… 거지……?”
간헐적으로 꺾이는 소리, 감정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시르하의 목소리.
루인은 피가 굳고 굳어 새까맣게 변해 버린 시르하의 주먹을 저릿하게 바라보았다.
무엇을 잊기 위해, 또 무엇을 얻기 위해 저리도 휘두른 걸까.
그렇게 둑처럼 터져 나온 감정이 입을 비집고 흘러내렸다.
“시르하.”
휘청이며 다가간다.
반쯤 의식을 걸친 채로 의뭉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르하.
그런 녀석의 무표정한 얼굴을 루인이 마주 바라본다.
“넌…… 누구……?”
복잡하게 엉킨 시르하의 감정이 느껴졌다.
루인은 그저 말없이 그의 두 손을 잡았다.
“……아프겠구나.”
바람의 대행자.
질풍의 시르하.
흑암의 공포, 대마도사 루인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르하에게도 이렇게 모진 과거가 있었다.
그럼에도 루인은 모두에게 따뜻함을 내어 주던 시르하만큼은 다를 것이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르하는 어쩌면 자신보다, 아니 누구보다 더 힘든 사연 속에서 사는 것 같았다.
“……아프지 않아.”
이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주먹을 털어 내는 시르하.
어느새 무감각하게 돌아가 버린 그의 두 눈이 다시 황금 거인 산의 정상을 향했다.
그가 다시 비척이며 걸어갈 때 루인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조금만 쉬자. 시르하.”
시르하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이방인의 손을 느릿하게 바라봤다.
자신을 발견하고도 도망치지 않은 첫 인간.
마음속에 작은 의아함이 번졌지만, 자신은 나아가야 했다.
“이것 놔…… 나는…… 가야 해.”
루인이 희뿌연 구름 속에 감춰진 황금 거인 산의 정상을 함께 바라봤다.
“저곳에 뭐가 있지?”
갑작스런 질문.
시르하의 눈빛에 동요가 번졌다.
그렇게 흐트러진 시르하의 마음 사이로 다시 루인의 음성이 비집고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구나.”
“…….”
시르하의 맹목적인 전진에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옛날 흑암의 공포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그저 과거의 환영 속에 허우적거리는 몸부림이었다.
이지러진 마음을 견디고 싶어 하는 갈망일 뿐이었다.
루인이 수풀에 앉아 시르하를 올려다보았다.
“같이 앉자.”
“……그러지.”
풀썩.
반쯤 풀어진 시르하의 눈.
루인이 좀 더 그에게 다가가 앉았다.
“사실은 아프잖아.”
시르하는 자신의 형편없는 주먹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로…… 아프지 않다…….”
루인은 말없이 그의 주먹을 감싸 쥐었다.
녀석이 이렇게 거짓말을 잘했다니.
“아……? 이게 무슨 짓……?”
주먹을 만지더니 갑자기 자신을 안아 오는 이방인.
그렇게 시르하가 당황하며 물러나려 할 때였다.
루인은 더욱 그를 깊게 안으며 등을 쓸었다.
그렇게 시르하는 어색하게 안긴 채 뜻 모를 감정으로 굳어 버렸다.
잃어버린 감정,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그 따뜻함이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아, 아…….”
잃어버린 감정이기에 표현할 수 없었다.
시르하는 자신의 거칠고 차가운 주먹을 억지로 폈다.
“크으으으…….”
시르하는 주먹을 펴는 것이 얼마만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괜찮다. 괜찮다 시르하.”
순간.
“아으…… 아으아아…….”
파들파들 떨리는 시르하의 두 손이 루인의 등을 안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와 가슴속을 휘저었다.
“그래. 시르하.”
떨려 오는 녀석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루인은 눈을 감았다.
그때 시르하가 원했던 위로가 무엇인지 이제야 모두 깨닫게 된 것이다.
“어으으으! 어으으으윽!”
꺽꺽 넘어가는 시르하의 울음소리가 황금 거인 산을 가득 메웠다.
루인은 이제야 시르하를 찾아온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