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데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형의 달라진 행색에 가슴이 무거워진 것이다.
흔한 여행자의 복식, 하지만 너무 낡고 더러워 얼핏 보면 부랑자에 가까웠다.
“형님. 그래도 이런 옷은 너무…….”
아무리 신분을 감추는 것이 중요하다지만 형은 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다.
평민 정도로 꾸미면 될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초라해질 필요는 없었다.
분명 형의 행색만 보고 가볍게 여기는 자들을 수도 없이 만날 것이다.
“눈에 덜 띄는 쪽이 편하다. 걱정 말거라. 내 몸 하나쯤은 지킬 수 있으니. 너도 잘 알지 않느냐.”
“…….”
하긴, 왕국의 천재라 불리는 자신을 고작 두 합 만에 제압한 형이었다.
고위 기사도 아니고 불량배 정도쯤은 형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할 것이다.
루인이 곧 친위 기사 유카인의 앞에 섰다.
“유카인 삼촌이 있어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습니다. 부디 아버지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루인의 그 말에 인상을 찡그리는 카젠.
“감히 이 카젠을 어린아이 취급한단 말이냐?”
루인이 슬며시 웃으며 아버지를 마주 바라보았다.
“오히려 아이가 아니라서 문제죠.”
“이 녀석…….”
루인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카젠도 모르지 않았다.
유카인의 장점은 단순한 호위나 업무의 도움 같은 것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는 가주 카젠의 사상과 마음을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는 자.
그가 아니었다면 카젠은 지난 십 년 동안 몇 번이고 마음이 무너졌을 것이다.
“데인이 성년이 되면, 제가 병세 악화로 대공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공표해 주시죠. 아니 그냥 아예 병으로 죽었다고 하는 쪽이 더 편하려나?”
가주의 위계는 가문의 장자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이 르마델의 왕법.
이를 어긴다면 왕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어떤 식으로든 가문에게 압박이 가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유도 없이 데인을 대공자로 만들 순 없었다.
“루인.”
어느새 비어 버린 눈으로 루인을 바라보고 있는 카젠.
그야말로 감정 한 점 일렁이지 않는 눈빛이었으나, 루인은 아버지가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있는지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전 괜찮습니다.”
하이베른가의 숨은 검.
공을 세워도 공표할 수도 없고 마땅히 보장된 예우와 권위도 누릴 수 없는 지독히 외로운 길.
그에게는 이제 영광이 들어설 수 없으며 명예도 뒤따르지 않을 것이다.
카젠은 그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내 입으로 어찌 아들의 죽음을 말하란 말이냐. 넌 참으로 이 아비에게 가혹하구나.”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요. 하긴 조금 힘들긴 하겠네요. 제 진면목을 직접 본 기사들이 너무 많아서. 이미 렌시아 놈들이 제 존재와 위상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본 가에 첩자는 없다.”
일말의 여지조차 두지 않는 사자왕의 자부심.
그러나 루인은 그런 확신이 얼마나 허무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지난 생에서 혹독하게 경험했다.
“함부로 확신하지 마세요. 아버지의 그런 믿음이 확고할수록 상대는 오히려 그 믿음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 루인의 말을 카젠은 무시할 수 없었다.
가문의 기사도를 향한 자신의 믿음.
그것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수 있는지, 루인에 의해 지난 몇 달 동안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왕실에 제 병세 악화를 알리는 쪽으로 가시죠. 십 년이나 누워 있었던 몸이니 아마 렌시아 놈들도 크게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하마.”
그때.
갑자기 카젠이 허공을 향해 손짓하자.
마치 허공에서 생겨나듯 두 명의 집행자가 몸을 드러냈다.
“충!”
“충!”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집행자들의 예를 받아 주던 카젠이 다시 루인을 응시했다.
“왕실 문제는 네 의견을 따를 테니 너 역시 나의 요구를 하나 들어 다오.”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루인.
“아버지. 싫습니다.”
“대 하이베른가의 혈족이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긴 여행길에 나섰다! 호위는 필수 불가결이니 잔말 말고 내 명에 따르거라!”
화를 내는 아버지 앞에서 루인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고귀한 하이베른가의 혈족이 약속을 어기고 맹세를 저버리는 건 온당한 일입니까?”
이미 루인은 현자 에기오스에게 신분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마법사의 의식으로 맹세했다.
흑암의 공포, 대마도사의 영혼을 지닌 루인으로서는 마법사의 이름으로 약속한 맹세를 결코 저버릴 수가 없었다.
“본 가의 집행자들이다. 이들의 은신술은 왕국에서 가장 뛰어나다.”
“왕실에는 초인이 있습니다 아버지. 아시잖아요?”
가주 직속의 집행자들이 아무리 은신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초인의 감각을 속일 순 없다.
시공간의 비틀림마저 인지하는 초인 앞에서 집행자들이 무슨 수로 몸을 숨긴단 말인가?
“후우…….”
긴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루인.
“대체 저를 뭘로 보십니까?”
“뭐……?”
갑자기 강렬한 빛을 발하는 루인의 두 눈.
“제가 다시 가문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더 이상 저와 토론으로 승부하실 수 없을 겁니다.”
루인의 시선이 자신의 허리춤에 향해 있는 것을 인지한 카젠이 입술을 기괴하게 비틀었다.
“이 사홀의 용맹을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투기를 전성기 수준, 아니 어쩌면 그 이상까지 이룩하셔야 할 겁니다.”
“크하하하하하!”
우르르르릉-!
강대한 투기가 섞인 카젠의 웃음소리에 사자성의 성벽이 거칠게 흔들린다.
“넌 그 말이 어떤 의미인 줄 알긴 아느냐?”
초인의 경지를 목전에 두고 있는 카젠.
지금 루인의 말은 자신더러 초인이 되어 승부에 임해 달란 뜻이나 마찬가지.
“초인 정도가 아니면 제 마법을 받아 낼 자격이 없죠.”
씨익.
자신만큼이나 기괴하게 비틀려 있는 루인의 미소.
실로 건방지기 짝이 없었으나 오히려 카젠은 지금까지의 화가 다 풀려 버렸다.
“오냐! 그 말을 꼭 지켜야 할 것이다! 이 카젠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땐 무조건 내 명에 따르는 삶을 살거라!”
“제가 이긴다면 제 소원도 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좋다!”
“무르기 없기입니다.”
그렇게 호쾌하게 약속한 루인이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데인에게 다가갔다.
“내가 없어도 잘할 수 있겠느냐?”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녀석…….”
데인의 머리를 헝클며 흡족해하는 루인.
이내 데인은 주변을 훑으며 아쉬운 표정을 하고 있는 형에게 담담히 말했다.
“데아슈와 위폰도 알아 버렸습니다.”
“음…….”
루인의 얼굴이 금방 안타까움으로 물든다.
어린 동생들도 언젠가는 알게 될 테지만 루인은 최대한 녀석들이 늦게 알길 바랐다.
그러나 뒤숭숭한 소문에 시종들마저 수군덕거리는 마당.
아무리 어린아이들이었지만 녀석들도 대 하이베른가의 혈족이었다. 시종들만 추궁해도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충격이 클 것이다. 동생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 할 수 있겠지?”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눈을 보면 됩니다.”
“하하.”
떠나갈 형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농담까지 할 줄 아는 데인을 바라보자니 정말이지 다 컸구나 싶었다.
“우리 형제들만이 아니다. 부모의 배덕을 알아 버린 것만으로도 큰 충격인데 부모의 죽음까지 겪었다. 많은 방계와 봉신가의 아이들이 슬픔에 잠겨 있을 테지. 충성을 강요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그 아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지 못한다.”
“저는 개 주인이 아닙니다.”
“그래. 그들을 늘 가까이하고 위로하거라.”
슬며시 웃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며 루인은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다.
데인과 함께 보낸 시간은 결코 헛된 수고가 아니었다.
“하이베른의 대공자, 루인. 몽델리아 산맥의 정령 아래 가주님께 맹세합니다.”
대공자가 자신을 향해 멋들어진 예법으로 몸을 숙이자 카젠 역시 가주의 위엄을 되찾았다.
“하이베른가의 가주, 카젠. 몽델리아 산맥의 정령 아래 그 오롯한 맹세를 친히 듣겠다.”
“성장하겠습니다. 죽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지극히 단순 명료한 세 마디의 다짐.
그러나 그 다짐들은 아버지가 듣고 싶은 모든 말이었다.
카젠은 말할 수 없이 솟구치는 믿음을 입을 열어 노래했다.
“믿겠다. 믿겠다 나의 대공자.”
멀어지는 대공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데인과 유카인이 최대한의 마음을 담아 예를 건넸다.
카젠 역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루인의 앞날을 내내 그 자리에 서서 축원하고 있었다.
* * *
차가운 밤공기에 루인이 로브를 추슬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어지럽게 우거진 숲 사이로 달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역시 비가 올 모양이었다.
스스슥-
루인이 서둘러 수풀을 헤집고 주변을 살폈다.
루인은 벨가노아 숲의 밤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습기를 잔뜩 머금은 벨가노아 숲은 늪지대가 된다.
그것도 그냥 늪이 아니라, 오랜 세월 낙엽, 곤충, 동물들의 사체 따위로 범벅이 된 늪, 즉 독성을 품은 늪지대로 변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늪은 당분간 온갖 독충과 식인 벌레들의 서식지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불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잔뜩 습기를 머금고 있어 불을 지피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루인은 마나홀을 소환했다.
화르르르르-
영롱한 빛깔로 회전하고 있는 마나홀을 주변으로 비춘다.
다행히 별다른 위험 인자를 발견할 수 없었기에 루인은 곧바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단숨에 생명력을 치환하여 혈주투계를 운용.
제법 큰 나무의 밑동 부분을 향해 루인이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꽈지지직-
물결처럼 뻗어 나간 파동.
그대로 나무에 시원하게 구멍이 뚫리자 루인이 서둘러 들어섰다.
-허!
고작 나무에 구멍이나 내자고 생명력까지 치환하여 혈주투계를 운용하다니.
사홀의 사념이 언제 깨어날지 몰라 내내 긴장하며 침묵하던 쟈이로벨이 오랜만에 걸쭉한 욕설을 해 왔다.
-미친 새끼. 본 마신의 혈주투계가 무슨 도끼더냐?
루인이 가볍게 그의 말을 무시하고 꼼꼼하게 로브 자락을 이불처럼 덮어썼다.
벨가노아 숲에서 긴 밤을 나려면 체온의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잘 거니까 말 걸지 마.”
-정말 미련한 놈이구나. 가문에 썩어날 정도로 돈이 많은 녀석이 왜 이렇게 무식하게 도보를 선택한 것이냐?
“마신이 인간의 삶 따위를 이해할 리가 없지.”
말이나 마차를 타면 그 모든 것이 흔적이다.
가문의 말은 대부분이 전마(戰馬)이므로 어딜 가나 눈에 띌 것이고, 상인들에게 마차를 구입한다 해도 그 역시 구매 기록이 남게 된다.
이왕 가문의 숨은 검으로 살게 된 이상, 흔적을 마구 뿌리고 다닐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험한 숲으로는 왜 온 것이냐? 여긴 르마델 왕성을 향한 지름길도 아니지 않느냐?
쟈이로벨의 말대로 루인은 왕성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목인 세헬가 쪽으로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인 벨가노아 숲으로 와 버린 상황. 이건 거의 빙 돌아가는 수준이나 다름이 없었다.
“찾을 사람이 있다.”
벨가노아의 숲을 지나 만날 수 있는 황금 거인 산.
그 산자락의 끝에 위태롭게 팬 거대한 협곡.
그런 독특한 지형으로 협곡의 모든 바람이 모이는 마을.
황금 거인의 기침이 머무는 곳.
그 바람의 마을에 그가 있었다.
음울한 루인의 눈이 밤하늘을 향했다.
“시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