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42화 (42/187)

<42화>

소에느의 흐릿한 망막에 투영된 것은 탁자 위의 조그마한 액자였다.

차곡차곡 짐 정리를 하면서도 차마 액자만은 치울 수 없었던 소에느.

저며 오는 슬픔, 외면할 수 없는 자신의 죄업에 소에느는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마력 열상으로 찍힌 빛바랜 사진.

하이베른가의 아이들과 함께 다정하게 서 있는 자신.

‘데아슈…….’

지금쯤 그 아이의 상처가 얼마나 클까.

고모에게 받아 왔던 그동안의 사랑이 모두 가식임을 깨달았을 때.

어머니를 죽인 존재가 고모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그 아이의 작은 세계는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었다.

그 여린 가슴에 유리 파편처럼 알알이 박힌 상처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쓰리고 미어질까.

곁에서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소리치며 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저 마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아이에겐 아픔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오빠는 사자성에 남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반역자들의 구심점이었던 자신이 사자성에 남는다면 어떤 형태로든 갈등이 이어지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금 욕망을 피워 낼 자신이 가장 두렵고 싫었다.

욕망이라는 불(火).

그것이 얼마나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인지 알면서도 자신의 삶은 무모한 불나방이었다.

그 어두운 불꽃에 휩싸인 인간의 마음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가 바로 자신이 증명해 온 삶.

이제 그런 악착같은 삶은 정말이지 끝내고 싶었다.

끼이이익-

갑작스런 낯선 소음에 문을 쳐다보는 소에느.

“……대공자?”

소에느는 이 깊은 밤에 대공자가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곧 그녀가 황급히 눈가를 닦으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이 밤중에 웬일이니.”

그렇게 말하는 소에느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허름한 로브와 짧게 자른 머리.

등에 맨 낡은 여행 가방과 나무 지팡이 하나.

전형적인 여행자의 행색.

대공자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던 모든 화려한 의복과 액세서리들이 그에게서 사라져 있었다.

“정말로 너는 이 가문을 떠나려고 하는 구나.”

루인은 말없이 소에느의 방을 천천히 훑고 있었다.

텅 빈 방 안.

차곡차곡 포개어진 짐들.

남아 있는 것은 그저 작은 탁자와 그 위의 액자, 그리고 이를 바라보고 있는 소에느뿐이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네.”

이내 처연한 얼굴이 되어 웃고 있는 소에느.

함께 피식 웃던 루인이 낡은 가방을 벗어 내려놓더니 짐덩이 위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아직도 찾지 못한 건가?”

“……찾다니?”

잠시 생각하던 소에느가 이내 깨달은 듯 씁쓸한 눈빛을 했다.

<진짜 속죄하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당신의 가치를 찾아.>

선명하게 떠오른 대공자의 당부.

하지만 그가 남긴 화두에 답할 말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가치’라니.

그런 것이 남아 있어서도, 앞으로 꿈꾸는 것도 자신에겐 사치였다.

“너무 큰 욕심이야 당신.”

“응?”

“상처 입은 마음이 아무는 것은 말 그대로 과정이야. 세월이 필요하다고.”

소에느가 말없이 입술을 깨물 때, 루인의 고요한 두 눈이 탁자 위의 액자를 향했다.

“당장 달려가서 저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은 그 마음조차 당신의 고통을 빨리 덜어 내고 싶은 욕망일 뿐이야.”

“그, 그건 아니야!”

하지만 루인은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정해야 해.”

루인이 후드의 모자를 덮어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간의 자의식엔 절대로 멈출 수 없는 관성이 있어.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

“대공자!”

“그런 자신을 인정해. 세월로 갚을 생각보단 하루라도 빨리 용서를 받아 내고 싶은 욕망. 그 꿈틀거리는 마음을 참아 내는 것만이 전부인 스스로를 받아들여. 그게 아니면 나아갈 수 없어.”

“정말 그런 게 아니야!”

루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나로선 아니길 바라야겠지. 하지만 욕망을 멈출 수 없는 것이 당신이라는 인간의 속성이라면 난 굳이 멈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소에느는 그런 루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자신의 욕망으로 일궈 낸 모든 것들이 이렇게까지 가문을 재앙으로 몰아갔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대공자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소에느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그런 당신의 욕망이 우리 가문, 하이베른가가 아닌 외부로 향하길 바랄 뿐이야.”

“외부……?”

루인의 시선이 기울어 가는 달빛에 흐드러진 창밖의 정원을 향했다.

“가문의 이익을 해칠 적은 수없이 많아. 당장은 무엇이 더 이득일지 눈알을 굴리고 있을 파네옴 광산의 상인들이겠지.”

소에느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흥. 품위도 없는 장사치들 따위가.”

어느새 고고한 귀족가의 영애로 돌아와 도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에느의 모습에 루인은 웃음이 치밀었다.

“하하, 재미없을 것 같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니. 한낱 장사치들 따위와 이익 다툼을 하라니. 그건 귀족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야.”

피식.

“당신도 순진한 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멋쩍은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 루인.

소에느의 눈빛에 의문이 떠오를 무렵, 갑자기 그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잘 들어. 그들은 우리처럼 막대한 유산이나 권력 따위로 싸워 온 자들이 아니야. 빵 한 조각, 땅 한 뼘, 동전 한 닢에 목숨을 걸어 온 자들이지.”

“…….”

“가진 것이 초라한 자들일수록 더욱 절박하고 악랄하거든. 그들은 귀족가의 체면과 명분, 고고한 자존심을 절묘하게 이용할 줄 알아.”

“그들도 엄연히 우리 공국령에 속한 영지민인데 감히!”

“눈은 내리깔고 몸은 엎드리겠지. 입으로도 존경과 흠모를 가득 담아 공작가의 서사시를 읊어 대겠지.”

“그게 다 거짓이란 말이니?”

“고귀한 베른가의 여인도 가문을 뒤엎기 위해 십 년이나 본심을 숨겼는데?”

“너…….”

루인이 또다시 피식 웃었다.

“하물며 그런 당신보다 더욱 처절하고 절박하게 살아온 자들인데 과연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을까? 그들이 그렇게 무르게 살았다면 그 거대한 상인 연합이 어떻게 수백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지?”

소에느의 표정에 호기심이 서릴 무렵, 차갑게 잦아든 루인의 목소리가 다시 잔잔히 울려 퍼졌다.

“잘 들어 당신. 본 가의 순진한 기사들을 상대했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패배감을 맛보게 될 거야. 분명 철저하게 농락당하겠지.”

순간 소에느의 눈매가 날카롭게 섰다.

“이 소에느 프란시아나를 뭘로 보고!”

“자신감만은 칭찬하지. 하지만 당신은 상인들을 몰라도 너무 몰라. 상대는 속속들이 이쪽을 파악하고 있는데, 당신의 상태가 이 정도라면 이미 끝난 게임이거든.”

그 거대한 하이렌시아조차 왕국의 상인 연합을 만만하게 보지 않고 오히려 협력한다.

상인들은 암중으로 귀족과 왕실의 명분을 움직이고 그 사이에서 이득을 취한다.

이득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저지를 수 있는 자들, 그게 바로 상인들이었다.

무엇이 그리 분한지 어느덧 활활 타오르고 있는 소에느의 눈빛.

루인이 그런 그녀를 흡족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세상은 넓어. 그런 교활한 상인들까지 권력의 방패로 활용하는 귀족들이 이미 수도 없이 많으니까. 이 하이베른가에서의 권력 다툼? 그런 건 이 사자성 밖에서는 고작 아이의 싸움 같은 거거든.”

“너…….”

입꼬리까지 파르르 떨고 있는 소에느를 향해 루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그럼 증명해 보시든가.”

“뭐……?”

“진정한 욕망의 진창은 이 사자성 밖에 있어. 그곳에서도 당신의 욕망이 우뚝 설 수 있다면, 왕국의 모든 귀족가들을 당신이 평정할 수 있다면…….”

루인의 미소가 멈추고 상상할 수 없는 권위가 그의 전신에 내려앉았다.

“그땐 진실로 ‘베른’으로 인정해 주지. 나도 아버지도, 내 형제들도.”

“……대공자.”

루인이 소에느에게서 돌아서며 어두운 회랑 속으로 걸어갔다.

“당신의 욕망도 눈부실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와 데인에게 보여 줘. 그게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고 증명일 것 같군.”

루인의 발걸음이 다시 이어지자 잠시 머뭇거리던 소에느가 이내 허공에 손을 뻗었다.

“잠시, 잠시만 대공자.”

멈칫.

깊은 어둠 속에서 루인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났다.

“왜? 이제 가야 해.”

소에느가 입술을 꼭 깨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석방이 가능할까?”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지하 감옥에 있는 반역자들의 석방 문제는 이미 아버지와 이야기를 끝낸 후였다.

“그래. 자신의 사람도 없이 적을 상대할 수는 없으니까. 지하 감옥의 기사들을 다루는 일이라면 어쩌면 아버지보다 당신이 더 적합할지도.”

“그럼 다시 그들과…….”

“그 문제는 오히려 니젠 사령관을 통하면 더 빠를 거야.”

그제야 깨달은 듯 환해진 소에느의 얼굴.

가주와 대공자, 그리고 데인, 또 가문의 친위 기사와 오대봉신가의 가주로부터 부여받은 대속의 권능.

그 모든 명예와 권위를 짊어진 니젠은 이제 대공자와 맞먹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너무 고마워. 정말로.”

다시 뒤돌아서는 루인.

“아직 그런 얼굴은 보기 힘들군.”

가늘게 떨리고 있는 대공자의 어깨.

자신의 기쁜 표정을 보기 힘들다는 그의 말.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가슴에 너무나도 절절히 스며들기에 소에느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흐윽…… 흑흑…….”

“나, 그리고 내 형제들. 어머니를 앗아 간 당신을 아마 평생 용서할 수 없겠지. 다만 아버지가 당신을 사랑하기에…….”

억누르는 듯 답답한 루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저 삼킬 뿐이야.”

“흑흑……!”

점점 멀어져 가는 음성.

“나도, 내 동생들도. 그리고 고모도.”

“…….”

“일단은 견뎌 보자고. 혹시라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다 함께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소에느가 멍하니 루인이 사라져 간 자리를 바라본다.

‘날 고모라고……?’

자 차가운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자신을 고모라 불러 주었다.

그런 소에느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북받쳐 뭐라 외치려는 찰나.

“루인! 나는! 이 고모는……!”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해. 나 간다.

흔들흔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루인의 휘젓는 팔이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인다.

소에느도 간신히 울음을 삼키며 함께 손을 흔들었다.

“안녕. 루인…….”

저 멀리 떠나가 이미 대공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에느의 흔드는 손은 한참 동안 잦아들지 않았다.

*   *   *

짙은 어둠이 내리깔린 사자성의 성문 밖.

“이걸 받거라.”

데인이 아버지가 건네는 서류 뭉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책도, 그렇다고 스크롤도 아닌 말 그대로 종이 뭉치 같은 것이었다.

한데 정성스럽게 차곡차곡 개어 금실로 묶여 있는 그 모습이 왠지 심상치 않았다.

“네 형이 우리 가문에 남긴 ‘지혜’다.”

“예?”

깜짝 놀라며 급히 서류 뭉치를 훑어보는 데인에게 다시 카젠의 음성이 이어졌다.

“하인들에게 물어보니 무려 보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이것만 집필했다더구나.”

“아 그래서…….”

한사코 자신의 방문을 거절했던 형.

그렇지 않아도 그런 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내내 걱정해 온 데인이었다.

“후…….”

허탈하게 웃고 있는 카젠.

얼마 전 알게 되었다.

루인이 자연스럽게 이끌었던 토론 배틀이, 사실은 이 지혜를 가문에 남기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 서류에는 가문의 경영자가 지녀야 할 갖가지 소양, 앞으로 우리 가문에 닥칠 무수한 경우의 수, 그리고 그때를 대비한 여러 대응 방안이 적혀 있다.”

“예? 형님이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 듯한 데인의 황당한 눈빛.

카젠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점쟁이더구나. 아니 점쟁이겠지. 나도 이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도 읽어 보면 이해가 될 테니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살펴보거라.”

“예. 아버지.”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데인.

하긴 형님의 신비한 능력이 어디 한두 가지여야지.

그때, 저 멀리 성문 안쪽에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루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지근거리에서 카젠을 호위하고 있던 유카인이 가장 먼저 그를 알아보고 예법을 표했다.

척.

“대공자님.”

은은한 달빛에 드러난 루인의 얼굴.

한껏 찡그린 그의 두 눈이 금방 카젠을 향했다.

“와, 진짜 소름이 다 돋네. 그렇게 은밀하게 준비했는데 이렇게 배웅을 나온다고요?”

카젠이 씨익 웃는다.

“아직은 나의 사자성(獅子城)이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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